#124
분노로 들끓어도 정신은 맑다. 지금 레이샤의 상태가 그러했다. 숱한 분노에 파묻힌 순간에도 그녀는 내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레이샤는 지금 어떻게 일이 흘러가고 있는가를 곧바로 직감한 듯했다.
황후의 시해 사건. 백작 가의 영애를 죽이려 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죄목이었다.
미수에 그쳤어도 재판에서 무죄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한 번 갇힌 감옥에서 나오기란 힘들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레이샤, 내가 널 죽일 수야 없지. 어떻게든 멀쩡하게 살아 있어야 해, 너는.’
끝까지 네 숨통을 네가 조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껏 내게 뱉어낸 악담과 악행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때까지. 평생.
“시해라니 웃기지 마. 황후궁 뒤뜰에 독약이 있어요! 내가 봤어요. 당장 조사해 보세요. 황후가 꾸민 일이라는 게 밝혀질 거예요.”
“뒤뜰? 조사하겠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그 전에 공작저를 수색하는 게 먼저겠지요.”
레이샤의 간절한 바람에 진실로 기껍게 응해 주었다. 그에 레이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뒤뜰을 수색하라며 간곡히 외쳐대던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빛이 고인 눈은 얼마쯤의 공포를 담은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몸수색이라는 당연한 수순을 뒤로하고 공작저를 수색한다고 하니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레이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일이 벌어지는 동안 가만히 자신을 지켜만 보고 있던 벨리타를 쳐다봤다.
“영애.”
자신을 대변해 주기를 바란다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그 부름은 질문이었다. 설마 하는 의심이기도 했다.
“공녀님.”
그녀의 부름에 응하듯 천천히 발을 내디뎌 벨리타가 레이샤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포박된 레이샤를 똑바로 마주하며 벨리타는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세요.”
“너, 너!”
“공녀님께서 사용하신 에스페톡, 제가 구해다 드렸잖아요. 공녀님께서 이렇게 처참히 망가지는 모습을 저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요.”
그 한 마디를 끝으로 홀 안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누구 하나 작은 말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잘 짜인 연극을 감상하고 있었다.
레이샤, 네가 만든 연극을.
“하, 하하!”
숨 막히는 고요를 깨뜨린 건 바로 레이샤였다.
소리를 죽여 가며 끅끅거리고 웃던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폭소했다.
미친 거지 드디어.
“벨리타 영애, 지금 한 말 전부 사실입니까?”
“네.”
적당한 질문을 던지자 예상한 대답이 나왔다. 그 후 순식간에 기사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벨리타는 나를 보고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후련한 미소였다.
벨리타가 저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그녀가 매번 지어 보인 교활한 웃음은 벨리타 그녀의 것이 아닌 레이샤의 것이었다.
“지금 당장 공작가를 샅샅이 뒤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찾아내세요.”
“예, 황후 폐하!”
몇 명의 기사들이 명을 받고 홀을 빠져나가고 벨리타는 레이샤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남아 있는 기사들에 의해 포박되었다.
“네가 날 배신하고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네가 아니라 네 가문도 나락으로 떨어질 거야.”
“배신이라니요. 공녀님과 저 사이에 믿음과 신뢰가 전제되지 않았는데 이게 어떻게 배신이죠?”
“내가 그 비밀을 다 퍼뜨리면 네 아버지는 너를 버리고 네 오라비들도 너를 경멸…….”
“마음대로 해. 네 비열한 짓들에 가담하는 것보단 낫겠지.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하나뿐이라서 참 다행이야. 망설임 없이 너를 끌고 함께 추락할 수 있으니까.”
그 대화를 끝으로 벨리타는 레이샤를 외면한 채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스스로 걸어서 홀을 빠져나갔다.
벨리타의 양팔을 붙잡고 있던 두 명의 기사들도 그녀를 따라 멀어졌다.
바닥에 늘어뜨린 벨리타의 붉은 드레스 자락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자 언뜻 우는 것처럼 보이던 레이샤의 기괴한 웃음소리도 뚝 그쳤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는 그렇게 레이샤와의 거리를 좁혔다.
겨우 한 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멈춰 서자 핏발이 선 눈을 똑바로 뜨고 레이샤도 나를 바라봤다.
그리 쳐다봐도 이 수렁 속에서 그녀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다.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더 이상의 궤변을 늘어놓는 대신 날 빤히 응시하고 있던 그녀는 그럼에도 체념하지 않고 분노하고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네.”
나는 레이샤의 얼굴을, 드레스를, 긴 머리카락을 찬찬히 뜯어 봤다. 내게 이런 악취미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망가진 레이샤의 모습은 내게 얼마간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 네가 없는 앞날에 대한 기대감? 둘 중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을 만큼 기뻤다.
그러다 문득, 정말 문득 이유 없는 불안감이 또다시 마음 한 편에 들이닥쳤다.
분명 끝이 보이는데 아직도 이런 기분이 든다는 게 조금은 이상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 그런 거겠지. 그래. 그래서 그런 걸 거야. 나는 괜한 시름을 털어 내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레이샤. 오늘 네 방에서 에스페톡이 발견될 거야. 넌 수일에 거쳐 재판을 받게 될 테고 당연히 유죄겠지. 황후를 시해하려 한 죄, 언론을 조작하려 한 죄, 그리고 그간 네가 벌인 짓들까지 모조리 더해 벌하면 형량이 얼마나 나올까? 아무래도 죽어서야 보겠지 우리.”
“내가 이대로 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릴 것 같아?”
레이샤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분노를 실어 대답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법이 있나?”
“아니! 난 무죄로 나올 거야! 그리고 플로리아 네가 감히 에스타란토를 사칭해 사람들을 속이고 황실과 신전을 기만한 죄를 물을 거야!”
“아직도 그 얘기야? 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훗날 깨닫게 되겠지. 참, 옥에 갇히면 이제 알 수 없으려나.”
“끝까지 뻔뻔한 것 좀 봐. 더러운 것. 역시 천한 본성은 못 숨기는 거지. 결국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네가 나를 끔찍한 진창까지 끌고 가는구나.”
“이렇게 말이 많을 줄 알았다면 해독제를 조금 늦게 줄 걸 그랬어. 데려가세요.”
멍하니 나와 레이샤를 번갈아 보고 있던 기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레이샤를 잡은 팔에 힘을 꽉 주어 그녀를 끌고 갔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내내 욕설을 퍼붓던 레이샤의 격한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정말 끝이 났다.
이토록 쉽게.
이토록…….
“황후 폐하,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저희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장로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는 터라 소식을 빨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가 보도록 해요.”
다른 신전 기사들과 함께 아델이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의 태도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하드엘이 있으니 차라리 이편이 낫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도 질투를 할 사람이니까 그는.
신전 기사들이 나가자마자 그 질투 많은 남자가 뒤에서 불쑥 내 손을 잡았다.
단단하게 맞잡은 손으로 익숙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나는 환히 웃으며 돌아섰다.
“끝났어요, 폐하. 이제 다시 시작점이에요.”
* * *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 거지?”
“제가 나가 살피고 오겠습니다.”
집사가 나가고 공작은 빛이 드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유리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열을 맞춰 걸어오는 황궁의 기사들이 보였다.
이마저도 익숙지 않은 풍경인데 그 행렬이 공작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가 생각하며 눈썹을 찡그리니 방금 나갔던 집사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공작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난 것이냐?”
“화, 황궁에서 기사들을 보냈습니다!”
“뭐?”
당황한 공작이 그답지 않게 허둥대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 본 행렬이 어느새 공작저 앞에 다다라 있었다. 선두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공작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가로채듯 받아든 그것은 수색영장이었다. 대법관의 낙인이 찍힌, 거짓일 리 없는 명령장.
“황후 폐하의 시해 사건으로 수색이 필요합니다. 협조해 주시지요.”
“지금 뭐라 하였는가? 시해 사건이라니.”
해괴한 소리라도 듣듯 기사가 읊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공작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딱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레이샤.
오늘 의상실에 간다고 했지.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의상실에 있는 게 맞나?
“수색하여 찾은 증거물은 모두 압수될 것입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지요.”
말릴 새도 없이 기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다른 층에 머물러 있던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차차 일층의 계단 앞에 모여 지금 이 상황에 관해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수군거렸다.
공작은 도끼눈을 뜬 채 레이샤를 따라나섰던 잔느를 미친 듯이 찾았다.
레이샤와 얽혀 있는 사건이 맞다면 잔느는 기사들의 뒤를 쫓아 당장 공작 저로 달려왔을 것이므로.
아니어야 한다.
이 사건이 레이샤와 연관되어서는 안 돼.
절대!
하지만 그의 바람을 산산이 깨부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사들이 흩어지고 시야가 트이자 잔디를 밟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잔느가 보였다.
공작에게 다다라서야 그녀는 맨바닥에 맥없이 털썩 주저앉아 서글프게 울음을 쏟기 시작했다.
“고, 공작님. 어떡하죠, 어쩌면 좋아. 이를 어쩌면 좋아. 아가씨를 구해야 하는데……!”
“무슨 상황인지 똑바로 설명하거라.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정확히 고해.”
낮게 잠긴 음성이 차분했다. 하지만 공작저의 사용인들 전부 지금껏 공작에게서 이보다 더 냉혹한 음성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잔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마련하신 식사 자리에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어요. 흐윽.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살 수 있는 거죠? 공작님께서 꺼내 주시는 것이지요?”
“찾았습니다!”
때마침 위층에서 들려온 건장한 기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놀라움을, 절망을, 의아함을 품은 각기 다른 눈이 계단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 큰 소리를 낸 기사 하나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손에는 정체 모를 병을 든 채였다.
“저게 뭐야?”
“글쎄?”
어리둥절해하는 사용인들을 등지고 선 공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노기를 담고 붉어졌다.
황후의 시해 사건, 이름 모를 병. 던져진 몇 가지 단어만으로도 그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를.
레이샤. 네가……. 네가 결국!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는 공작의 손에 힘줄이 터질 듯 도드라졌다.
쥐고 있던 수색영장은 그의 손안에서 처참히 구겨졌다.
“공작님께서는 이 시간 이후 가택에 연금되실 겁니다. 공녀의 재판 참관 외의 모든 외출이 제한된다는 점 알아두시죠.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곧 대법관님께서 사람을 보낼 것이니 자세한 것은 그분께 물어 주세요.”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기사들은 마지막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은 평소처럼 살갑게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매정하게 몸을 틀어 버렸다.
언젠가부터 그의 얼굴은 깊은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공작은 집사만을 곁에 둔 채 절제된 동작으로 서재를 향해 걸어 나아 갔다.
층을 오르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 들어서서야 공작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만남을 앞당겨야겠다. 일전에 연락이 닿은 귀족들 모두를 당장 수도로 불러들여라.”
“네, 공작님.”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시지요.”
그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동시에 복도에 날카롭게 메아리치던 구두굽 소리가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