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유난히도 화창한 오후였다.
밝은 빛 아래서 세상은 자신이 품은 것들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곧 색이 변할 무성한 초목들도, 저 하늘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멀리 날아가는 새들도 찬연한 빛 아래에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벨리타를 따라 황궁에 들어선 레이샤도 어김없이 그 빛 아래에 존재했다.
그녀는 홀로 황궁의 푸른 잔디밭을 거닐고 있었다. 황후궁 앞에서 예상보다 손쉽게 벨리타를 따돌린 덕이었다.
목적지가 분명했기에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황궁의 전경을 눈에 담아 가며 한 치의 조급함도 없이 레이샤는 여유롭게 황실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를 지나쳐 가는 그 누구도 지금 그녀의 품 안에 독약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로지 레이샤, 그녀만이 아는 것이었다. 이 독약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플로리아,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울까?
“울었으면 좋겠는데.”
제발 처절하게, 아주 안쓰럽게 울었으면 좋겠어.
언뜻 보면 상념에 젖은 듯도 한 얼굴에 메마른 미소가 번져갔다. 그 사이 황실 주방에 도착한 레이샤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홀 안으로 들어갈 식사가 미리 준비되어 밖에 나와 있었다.
이어 나올 다른 음식을 준비하느라 주방 안은 정신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경계할 여유가 없었다.
어쩜 이리 완벽할 수가.
모든 것이 바라던 대로였다. 레이샤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은색의 돔 디쉬 앞에 다가섰다.
황후의 식사는 대개 은제의 식기에 차려진다. 그러니 벨리타의 몫은 이 옆에 있는 금색 테두리의 접시에 담겨 나온 것이겠지.
레이샤는 빠른 동작으로 독약 병의 뚜껑을 열었다.
발끝에 달린 그림자가 더디게 주방 앞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그녀의 손은 재빠르게 독약 병을 기울였다.
투명한 액체 두어 방울이 투둑 접시 위로 떨어지더니 흔적도 없이 불투명한 수프에 스며들었다.
부디 고통 없이 한 번에 가길.
볼일을 마친 후에 레이샤는 느긋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기다란 복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난 창문이 열려 있어 그 틈 사이로 요 며칠 사이 선선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한더위 끝 시원스러운 공기는 어딘가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드높았고 햇살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최근 들어 이보다 더 좋은 날도 없었으리라는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태연히 내딛는 걸음을 따라 드레스 자락이 사르르 흔들렸다. 여전히 입꼬리 끝은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다.
플로리아, 망가질 그 여자의 앞날에 대한 기대감.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그 여자가 아니라는 아쉬움. 그리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경멸.
무수한 감정 중 단 몇 가지만을 헤아린 덕이었다.
레이샤는 계속해 걸으며 심상하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죽기에는 지나치게 맑은 날이네.”
* * *
“폐하, 벨리타 영애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녀님도 함께였다고 기사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래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녀의 목소리에 나는 길게 내려오는 붉은 머리를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은색 팔찌의 매끄러운 곡선 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는 거울 속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나는 걸음을 떼고 마샤티아 백작 부인의 앞으로 나아 갔다.
오늘에야 레이샤와 끝을 보겠구나.
벨리타로부터 레이샤의 방 안에 독약 병을 잘 숨겨 놓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정확히 이 주가 지난 날이었다.
“부인, 내 말 잘 기억하고 있죠?”
내가 질문하자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에 젖은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전 너무 걱정됩니다. 혹시나 제가 실수라도 하게 되어 누군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부인, 그대는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알아요. 설사 실수를 한다고 해도 해독제가 있으니 애꿎은 사람이 잘못될 일은 없습니다.”
나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인을 안심시키며 그녀의 손등을 다독였다.
오늘 계획이 틀어질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 모를 대비는 했어도 누군가 다칠 거라는 걱정은 해 보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계획을 털어놓고 도와 달라 부탁한 게 마샤티아 백작 부인에게 너무 큰 짐이 된 게 아닐까 그게 걱정이지.
“내가 공녀의 식사를 준비해오라 명하면 벨리타 영애의 몫으로 준비되어 있던 음식 전부를 조금씩 덜어서 나와 공녀의 식사에 적당히 섞어 주기만 하면 돼요. 그 후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너무 걱정 말아요. 모든 일은 다 잘 끝나 있을 거예요.”
콘소메 수프 혹은 와인, 그도 아니면 커틀릿. 벨리타의 음식엔 어디든 독을 타 뒀겠지. 그게 오늘 레이샤, 네가 제 발로 황후궁에 다시 찾아온 이유니까.
너는 지금쯤 나의 끝을 상상하며 기뻐하겠구나. 수렁에 빠지러 오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신이 나 있을까.
가여운 레이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나는 이만 열린 문을 향해 나아 갔다.
황후궁 내의 아르아네 홀은 세 명이서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이곳의 용도는 차라리 연회장이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넓어도 오늘은 이곳이어야 했다. 기사들이 들이닥치기 딱 좋은 위치에 있으니까.
또한 그녀에게 나름은 극적인 연출을 선사해 주고 싶었으므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홀의 정중앙에 놓인 기다란 탁자가 보였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샹들리에의 불빛이 내려앉은 덕에 대리석 탁자는 꽤나 미끈해 보였다.
오늘 벌어질 참극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황후궁을 제 것으로 만들려 발악을 하더니. 결국 이곳에서 포박되어 끌려간다라.
‘참 근사한 광경이겠어.’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그렇지, 레이샤?
나는 뻔뻔하게 내 앞에서 낯을 들고 서 있는 그녀를 보았다.
루안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지난날을 다 잊은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곳에 루안을 데려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저렇게 태연한 꼴을 봤다면 루안은 더 상처를 받았을 테니.
정말 악마보다 더한 여자.
이보다 더한 표현을 찾지 못한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사랑하는 칸제로스가의 품위에 걸맞게 정중하면서도 우아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영애를 초대했던가?”
냉랭한 물음에도 레이샤는 빙그레 웃었다. 새까만 속내를 감춘 것치고는 말간 웃음이었다.
늘 그랬다. 레이샤 그녀는 항상 그렇게 날 속여 왔다.
더러운 소문을 지껄인 그 입으로 나를 위로하며 그렇게.
“폐하, 죄송합니다…….”
벨리타는 우물쭈물하며 나와 레이샤를 번갈아 보았다. 마치 난처한 상황을 맞이한 사람처럼 굴며 나와 눈을 맞추고 사과를 했다.
그 만족스러운 연기력에 환히 웃는 대신 장단을 맞춰 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무례하네요. 분명 공녀를 데려오지 말라 했을 텐데.”
“폐하, 벨리타 영애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저도 오고 싶어 온 건 아닙니다. 단지 폐하의 꿍꿍이가 궁금했을 뿐이지요.”
“꿍꿍이?”
“벨리타 영애를 따로 부르신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잖아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는 알겠네요. 공녀는 무서운 게 없나 봐요?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감히, 내 앞에서.”
“루안, 그 아이의 일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며 뺨을 후려치시고 뒤에서는 공작 가의 영지를 갈취하신 황후 폐하인데 제가 그런 분을 무서워해야 하나요?”
“하.”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레이샤가 입술 끝을 당겨 올렸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연갈색 눈동자가 한층 밝아져서인지 레이샤는 조금 들뜬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벌어질 앞날을, 벨리타의 죽음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의심되면 앉아서 지켜봐요. 내가 어떤 꿍꿍이로 벨리타를 불렀는지.”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마지막 인사에 답하지 않은 채 나는 문과 가장 먼 탁자의 끝으로 걸어가 그곳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벨리타와 레이샤, 그 둘도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부인, 공녀의 식사도 준비해 함께 내오라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황실 주방 앞에 보란 듯이 놓여 있을 두 사람분의 식사를 떠올리며 말을 잇자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수시로 굳게 닫힌 문을 흘긋거리는 레이샤는 긴장한 부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이를 틈타 나는 벨리타에게 눈짓을 보냈다. 앞으로 차려질 음식을 절대 먹지 말라는 경고와 같은 눈빛에 벨리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단단히 이야기를 해 뒀으니 내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잠시 후, 마샤티아 백작 부인의 지시에 따라 트레이 카드가 정렬되고 넓은 탁자에 음식이 채워졌다.
곁에 있던 하녀가 돔 형태의 뚜껑을 열자 갓 만들어 낸 수프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습게도 먹음직스러운 자태였다.
“다들 들어요.”
“네, 폐하.”
내 목소리에도 레이샤는 커트러리를 드는 벨리타를 빤히 쳐다보느라 제 앞에 차려진 음식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온 신경이 벨리타에게 집중되어 있는 건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들었던 스푼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레이샤를 유심히 바라봤다.
가만, 그런데 시선이 벨리타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않고 있잖아.
보고 있는 게 벨리타가 아니라면…….
수프?
알고 보니 확실해졌다. 벨리타의 손이 수프를 향할 때면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거나 혹은 침을 삼켰다.
정신없이 보고 있던 게 방금 나온 저 수프였다니.
어떤 음식에 독약이 섞였는지 딱히 찾을 필요도 없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알려줄 줄이야.
“공녀? 뭐해요?”
“네?”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 따라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 보면 벨리타 영애에게 볼일이 있는 줄 알겠어요.”
뼈가 있는 말에 움찔할 법도 한데 레이샤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환히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저렇게 뻔뻔한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어서 들어요.”
“예, 폐하. 그런데 벨리타 영애, 영애께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봐요? 아까부터 음식을 멍하니 보고만 있잖아요.”
“그런가요?”
“아닙니다. 이제 막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아, 그랬군요.”
레이샤는 가느다랗게 눈웃음을 지으며 테이블스푼을 들었다.
제 몫의 수프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벨리타를 향한, 정확히는 벨리타 앞에 놓인 수프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묽지도 되지도 않은 수프를 자신의 스푼으로 적당히 떠내는 순간마저 그러했다.
“아주 맛있을 거예요.”
말을 걸자 그제야 레이샤가 내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턱 끝을 살짝 내려 보이는 것으로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레이샤 그녀다운 아주 고아한 턱짓이었다.
“네, 그래 보여요. 그나저나 제가 벨리타 영애를 따라온 덕에 황후 폐하와 식사를 다 하네요. 저를 보기 많이 불편하실 텐데 어쩌죠?”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공녀와 영애 둘 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눌 입장은 아니죠. 특히 공녀, 그대가 있으니 불편해요. 아주 많이.”
불편할 리가.
네가 찾아올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린 심정을 넌 모르겠지.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넌 짐작도 할 수도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