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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21)화 (12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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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황후가 감시를 붙여 놨을 텐데 황궁에서 나오자마자 날 찾아오면 어떡해요, 영애.”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저의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먼저 레이샤의 방 안에 들어와 앉아 있던 벨리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오늘 있던 일을 글로 적기에는 한계가 있을 듯하여. 하지만 걱정 마세요. 황후에겐 공작저에 들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뭐라고요? 공작저에 가겠다 했다고?”

코앞까지 다가온 레이샤가 미간을 구겼다. 벨리타는 일그러지는 그녀의 표정을 뚫어져라 보다가 말을 이었다.

“걱정이 많으신 것 같으니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황후는 사과를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지만 앞으로 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건지 며칠 뒤 식사 자리에 저를 초대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공녀님도 함께 모셔오고 싶다고 말을 했고요. 황후는 싫다고 말했지만 어쨌든 그런 대화가 오갔으니 제가 공작저를 찾은 것을 두고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겁니다.”

“방금 식사 자리라고 했나요?”

레이샤는 눈썹을 치켜뜨고 벨리타의 말을 되새기더니 벨리타가 앉았던 자리와 마주 보는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텅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싶던 레이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빙그레 웃었다.

“황후의 속이 너무 뻔히 보이네요. 영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나를 치고 싶은 거겠지.”

내가 무슨 패를 쥐고 있는 줄 알고. 픽 웃는 레이샤의 마지막 말끝에 벨리타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레이샤는 옆에 서 있던 벨리타를 향해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벨리타는 그녀의 명을 순순히 따랐다.

“그 식사 자리 나도 동행하죠.”

기다렸던 한 마디에 벨리타는 찰나 눈빛에 스쳐간 차가운 분노를 사그라뜨리고 몹시도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주저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 황후는 절대 안 된다고…….”

“그랬겠지요. 영애를 꾀는 자리에 내가 함께 있길 바라겠어요? 그러니 같이 가자고 하는 거잖아요. 우리 벨리타 영애는 연기를 참 잘하니 우선은 혼자 가겠다고 해요. 늘 그랬듯 뻔뻔하게, 어려울 것도 없잖아요?”

“…….”

“영애?”

“맞습니다. 제겐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황후가 들여보내줄지 그게 걱정입니다.”

“같은 마차를 타고 가면 해결될 일입니다. 참, 독약 병은 잘 숨겼어요?”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샤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마치 치하라도 하듯 밖에 있던 하녀에게 벨리타가 마실 차를 내오라 명했다.

저 아름다운 웃음 뒤에 어떤 새까만 속내가 감춰져 있는지 벨리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폐하의 말처럼 공녀가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못 죽일 이유는 없었다. 지금껏 봐온 공녀는 득이 된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저지를 여자였다.

“어디에 숨겼어요?”

“황후궁 뒤뜰에 두었습니다.”

“뒤뜰 어디?”

“화단 근처입니다. 황후와의 식사 자리가 파해진 후에 제가 직접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내게 먼저 말을 하세요.”

“위치가 애매하니 가서 보시…….”

“내 말 이해 못 하겠어요? 아, 설마 그 비밀을 묻기가 싫은 건가?”

더 이상 저런 식의 협박은 두렵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걸 내려놓자 마음먹은 이상 벨리타의 목적은 하나가 되었다.

저 여자를, 악마나 다름없는 제국의 공녀를 끌고 함께 옥에 들어가는 것. 그거면 된다.

“말을 안 할 작정인가요?”

벨리타는 속으로 비소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뒤뜰 구석, 황후궁 침실이 있는 쪽입니다.”

“진작 이렇게 말하면 될 걸.”

-똑똑.

“아가씨, 차를 들이겠습니다.”

하녀가 들어오자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일었다.

찻잔과 찻주전자를 내려놓는 달그락 소리만이 고요 속에서 크게 도드라지자 하녀가 어리둥절해 했다.

“이만 가 보렴. 나머지는 우리가 할 테니.”

그런 하녀를 보며 레이샤는 수고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상냥히 웃어 보였다.

곧바로 의아함을 지운 하녀는 그녀를 따라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자신과 대화할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레이샤를 빤히 훑어보던 벨리타의 눈이 레이샤의 발등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는 그녀의 녹색 구두 위에 시선이 머무른 것이었다.

공작저에서 만날 때 레이샤는 거의 항상 같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자주 신던 구두가 바뀌셨네요?”

하녀가 나가고 서서히 고개를 들며 벨리타는 의미 없는 물음을 던졌다.

눈앞에 놓인 차를 다 마시기 전까지 그녀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가야 했고 별다른 주제가 없던 차에 레이샤의 변화를 발견한 것은 벨리타에게 있어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하지만 흘긋 자신의 발에 신겨진 구두를 본 레이샤는 별 반응도 없이 이내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르 빈 찻잔을 채우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자 명명한 허브 향이 방 안에 감돌았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야 오히려 고맙지. 그렇게 생각한 벨리타는 조용히 그녀가 내려놓은 찻주전자를 들었다.

“풉.”

레이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 건 그때였다.

조금은 뜬금없는 상황에 벨리타는 찻물을 따르려던 행동을 멈추고 레이샤를 바라봤다.

그러자 턱을 괴고 벨리타의 반응을 관찰하듯 지켜보던 레이샤의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쓸모를 다한 신발은 버려야지요. 버리고 새 신발을 사는 게 당연한 이치인걸요. 그나저나 영애는 좋겠네요? 이번 일만 끝나면 그토록 숨기려 애쓰던 비밀이 영영 묻힐 테니까. 그간 요긴했는데 아쉬워서 어쩌나.”

* * *

호숫가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은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하드엘과 나는 그 아래 자리를 잡았다.

물비린내가 섞인 훈훈한 공기 속에 싱싱한 풀냄새와 흙냄새가 은은히 배어 있었다.

햇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바라보다가 나는 하드엘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날 지켜보고 있던 건지 그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저 그게 좋아서 피식 웃음을 짓다가 손을 뻗었다.

울창한 나무 그림자가 일렁이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뺨에 손이 닿자 여름 볕 같은 따스함이 번져갔다. 이제 누구의 것일 수도 없는 하드엘 이 남자의 체온이었다.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던 하드엘은 얼마 안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빤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틀어 손바닥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이 사랑스러운 장난을 어떻게 맞받아칠까 고민하며 그만 손을 내리려는데 하드엘이 도로 내 팔목을 잡았다.

그는 손바닥 안에 제 뺨을 가져다 대며 감은 눈을 느리게 떴다. 하드엘 그의 온기가 아까보다 더 선명히 느껴졌다. 또한 나를 바라보는 회색빛 눈은 그보다 따사로웠다.

“우리 에스타란토께서 시간을 내달라 하셔서 달려왔는데 산책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소? 난 뭐든 좋지만.”

“사실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까. 그가 걱정할 게 뻔한데.

그래서 오늘 일이 일어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그 후에 말하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침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벨리타는 날 독살하려 온 게 아니었다. 고로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하드엘에게 말해야 했다.

그에게는 그래야만 했다.

“저, 폐하.”

“왜 그러시오?”

“며칠 뒤에 황후궁에서 일이 벌어질 겁니다. 황후를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공녀가 붙잡혀 갈 거예요.”

“플로리아,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드엘은 내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말해 보시오. 어서.”

“공녀가 벨리타 영애를 살해하고 제게 누명을 씌우려 합니다.”

“뭐?”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미리 알았으니 저는 역으로 공녀에게 죄를 물을까 합니다. 아벨리움의 황후를 시해했다, 그리 몰아 그동안 제게 저지른 짓까지 모두 처벌할 생각이고요. 벨리타 영애가 이를 돕기로 했습니다.”

“시해라니. 그리고 데보니안가의 영애가 당신을 도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잖소.”

“그렇기는 하나 애초에 벨리타 영애는 어쩔 수 없는 사정 탓에 공녀의 명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공녀에게 반감이 강한 사람이죠. 공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계획을 알게 된 마당에 저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경직된 그를 마주하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으려 애썼다.

하지만 벨리타가 뒤뜰에 독약 병을 숨기다가 들켰다는 둥의 자세한 내막을 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드엘은 내 일에 이성을 버릴 사람이었으니까.

나 역시 하드엘에게 나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침착함을 유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엇인지 쉽게 구분이 되었다.

“플로리아, 그럼 당신의 계획은 무엇이오?”

“며칠 뒤 제가 식사 자리를 마련하여 벨리타 영애를 초대할 것입니다. 초대받지 않은 공녀도 영애를 따라 함께 올 것이고요. 식사에 독을 탔다는 것을 확인하면 곧바로 기사들을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그 계획에 당신은 안전은 고려된 것이오?”

“제가 벌인 판입니다. 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을 리 없지요.”

해독제까지 구해 뒀다며 당당히 나와도 그는 조금도 안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를 더한 눈빛으로 아직 오지 않은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차라리 그 식사 자리에 내가 나가겠소.”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만나기 전부터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폐하, 이번이 아니면 공녀와 공작을 처벌할 수 있는 때를 놓칠 거예요. 이런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동안 저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이 희생될 거고 저는 그것을 견디지 못할 거예요.”

“머리로는 백 번 이해해. 하지만 모르겠소. 허락하고 싶지가 않아.”

“절 믿으시잖아요.”

싱긋 웃으며 나는 하드엘의 손을 맞잡았다. 당신이 어떤 마음일지, 얼마만큼 나를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난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벨리타에게 제안한 최선의 선택지가 결국은 내게도 최선이었기에.

한참이나 침묵하던 하드엘이 나직한 한숨을 뱉으며 잡은 손을 당겨 덥석 나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의 단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독 불규칙하게 심장이 박동하고 있었으나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의 것일지 모를 그 소리 사이로 낮게 잠긴 하드엘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믿지. 나는 플로리아 당신을 믿어. 뻔한 거짓이라도 당신이 하는 말이면 난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래서 더 두려워. 스스로 위험에 빠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에도 당신이 날 위해 거짓을 말할까 봐. 그리고 바보같이 내가 그 거짓을 믿어 버릴까 봐.”

나는 그의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하드엘.

속에 있는 말을 꺼내는 대신 나는 괜히 그를 새초롬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저를 위험에 몰아넣는 계획을 짜놓고 폐하를 위해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흠, 아무래도 제 계획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단 뜻으로 들리는데.”

“난 단지 플로리아 그대가 다치는 게…….”

뒤꿈치를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백금발 머리를 쓸며 하드엘, 그의 입술을 막았다.

숨결이 가빠지기 전에 나는 겹쳐진 입술을 천천히 떼고 나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염려 마세요. 폐하를 위해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해요. 제가 다치는 게 걱정되신다는 거죠? 어쩌다 넘어지면 투정을 부리겠습니다. 아프면 울기도 할 거예요. 그때마다 폐하께서 달려와 일으켜 주세요. 괜찮냐고 물어 주세요.”

바람에 흐트러지는 붉은 머리칼을 매만지던 그가 느릿하게 손길을 옮겨 방금까지 자신의 입술에 닿아 있던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리하겠소. 당신이 말하면 뭐든 기꺼이. 단 방금 한 약속은 지켜주는 거겠지?”

“물론이죠, 폐하.”

하드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내 대답에 대한 만족이 깃든 눈이 코앞에 보였다.

염려와 불안이 여전히 뒤섞여 있음에도 그 감정만큼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스르르 눈을 감으니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후엔 손끝이 간질거릴 정도로 조심스럽게 또 상냥히 내 입술을 탐하는 감촉만이 생생히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지고 어느새 등은 나무의 단단한 줄기에 닿아 있었다.

꿈결 같은 기분 속에서 손에 닿는 거칠한 나무껍질만이 유일하게 지금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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