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첫째, 이 독약 병을 공녀의 방 안에 숨겨 줘요.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내가 식사 자리를 만들어 영애를 초대하면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공녀를 데려오는 겁니다. 이 일에 대해선 딱히 걱정할 필요 없어요. 굳이 같이 가자 설득하지 않아도 공녀는 순순히 응할 겁니다.”
내게 누명을 씌우겠다 작정했다면 이리 좋은 기회를 레이샤가 놓칠 리가 없었다.
황후가 주최한 식사 자리에서 벨리타가 죽는다. 그것만큼 완벽히 나를 몰아갈 수 있는 각본도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난 공녀를 재판정에 세울 겁니다. 벨리타 영애, 그때 그대가 증인으로 나서 줘요. 그렇게 되면 옥에 가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황후를 시해하려 했다는 불명예는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내가 재판부에 직접 그대의 선처를 요구하면 받을 형량이 줄 수도 있겠죠.”
이야기를 모두 들은 벨리타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은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의심과 혼란. 그녀의 눈에 깃든 감정은 이와 같았다.
“왜 앞으로의 계획을 제게 전부 털어놓으시는 거죠? 저를 믿지 못하시잖아요.”
“맞아요. 난 영애를 믿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내민 선택지가 그대의 최선일 테니까 그걸 고려한 거죠.”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가문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살인자의 아이를 낳은 것을 숨겼다면 오히려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지금의 사건을 온전히 자신이 뒤집어쓰는 쪽을 택할 리가 없다.
게다가 벨리타가 레이샤를 따른 건 열렬한 추종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복종에 가까웠으니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다만, 벨리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밝혀지고야 말겠지.
나 또한 아이를 낳은 비밀을 억지로 들추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벨리타가 날 도와 목숨을 잃지 않게 된다면 레이샤가 그 비밀을 터트릴 게 뻔했다.
그럴 바에야 죽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벨리타가 먼저 자신의 입으로 숨기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는 게 나았다.
벨리타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엉망이 된 몰골로 그렇게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모를 절망이 충혈된 눈동자 위로 켜켜이 쌓이는 듯했다.
어쩌면 체념 또 어쩌면 허무함인 것도 같은 그 감정이 짙어지는 사이 나는 파헤쳐진 땅과 지저분한 벨리타의 손, 그리고 그녀의 꾹 다문 입술로 차례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아무 답도 없지만 싫든 좋든 그녀는 내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독약 병을 숨긴 일이 발각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럼 난 이만 가 볼 테니 일이 끝나면 내가 보낸 사람을 통해 소식을 전해 줘요.”
“폐하, 잠시만요.”
그녀에게 독약 병을 건네주려 마음먹은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벨리타의 입이 열렸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목소리의 끝이 갈라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바로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떤 이유로 나를 불러 세운 건지 알고 있었다.
‘죽은 아이 때문이겠지.’
더 정확히는 그에 얽힌 비밀에 관해서겠지만.
“제가 아이를 낳았다는 건 누구에게 물으셔서 알고 계셨던 겁니까?”
“리베른 영지에서 그대를 아는 사람을 찾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해 줄 수 있으나 누구를 통해 알았냐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왜… 왜 살인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숨겨 주셨어요? 제게 대갚음해 주고 싶은 것이 많으시잖아요. 그러니 차라리 공녀처럼 그 비밀을 이용해 저를 겁박하고 이용하셔야 하는 거잖아요.”
“내가 왜요?”
“폐하께서는 그동안의 저를 용서치 못하실 테니까요.”
“그래요. 난 벨리타 영애 그대가 한 짓들을 모두 용서할 수 없어요. 아무리 귀한 데보니안가의 여식이라 해도 그리고 당신이 어쩔 수 없이 공녀의 악행에 동조한 거라 해도 이런 내 생각은 변치 않아요. 하지만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죄도 없는 아이를 이용하는 파렴치한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답이 되었나요?”
“폐하께서는…….”
벨리타는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다시 눈물이 차오른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의 두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제 목소리와 함께 삼켜 버린 슬픔은 그렇게 만면에 드러나고 있었다.
난 여기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돌아설까 아니면……. 더한 진실을 밝혀 주는 게 좋을까.
피사트. 그자가 실은 레이샤가 붙인 사람이었다고.
벨리타 너를 이용하기 위해 레이샤가 너와 그자의 만남을 꾸며냈다고.
진실을 아는 건 때론 독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모르고 사는 것이 약이 되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밝히게 된 이상 이 진실 또한 아는 게 맞지 않을까.
“폐하께서는 정말 잔인하신 분이십니다…….”
벨리타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자책과 후회, 설움 같은 것이 범벅된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내 귀에도 선명히 들려왔다.
“제게 저주라도 퍼부으셔야 하는데, 그래야 제가 뻔뻔하게 한 번만 봐달라 빌 수라도 있을 텐데…….”
그녀의 말속엔 어느 순간부터 자조 섞인 씁쓸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벨리타의 기름한 속눈썹을 바라봤다.
벨리타. 나를 그렇게나 지독하게 괴롭혔던 꼭두각시 여자는 이제 내 앞에 없었다.
그저 벨리타 엔느 데보니안. 그녀만이 내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벨리타가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모든 것을 비워 낸 듯한 그녀의 눈 위로 강렬한 햇살이 퍼부어 내렸다.
마지막에 다다른 여름. 그 계절의 끝에서 가장 밝은 빛줄기가 얼굴 위에 내리쬐는데 그녀는 인상을 쓰는 법 없이 환히 웃었다.
불그스름한 눈을 휘어 가며 아주 밝고, 아프게.
“아까 폐하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뱉은 말들만큼은 제 진심이었습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세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흘끗 내 손에 들린 독약 병을 쳐다보았다. 내 뜻을 따를 테니 독약 병을 건네 달란 뜻이었다.
나는 병을 감싸고 있는 천을 살짝 내려 하단에 적힌 에스페톡이란 약명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그 병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여기요.”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늘 일은…….”
“잠시만. 영애에게 해 줄 말이 있어요.”
인사를 건네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던 벨리타가 멈칫했다.
이미 고민을 끝낸 터라 난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공녀에게 휘둘리지 말아요. 공녀는 자신에게 굴종할 영애가 필요해 처음부터 계획하고 영애와 피사트를 엮어 준 거니까.”
“네? 피사트, 그 사람을 저와 엮어 준 거라니요?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영애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요. 공녀는 피사트를 이용해 그대의 약점을 만든 거예요.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오직 그 이유 때문에.”
* * *
황후 폐하의 앞에서 또다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감히 무슨 염치로.
그래서 벨리타는 황후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태연하게 굴었다.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또 애쓰며 그녀는 입꼬리에 힘을 주고 아무렇지 않게 황후에게 이제껏 보아왔던 중 가장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물러났다.
마차에 올라서도 평소의 자신답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렇게 잠시나마 버텨 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어느새 창밖 풍경이 바뀌었다.
초록빛이 완연한 길을 지나자 사람들도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했다.
황궁을 빠져나온 것을 깨닫자 그제야 시야가 점점 아득해졌다.
고개를 떨구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피사트 그 사람 공작저에서 일하던 정원사였어요.’
말도 안 돼.
‘벨리타 영애, 그대가 리베른 영지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그 두 사람 사이 왕래가 있었고요.’
피사트, 네가 어떻게 나한테…….
살인자라는 것을 숨긴 것도 모자라 네가 어떻게 날!
철없는 사랑이란 건 알았다.
데보니안, 그 이름을 버리고 도망쳐 지키고 싶을 정도로 그 철없는 사랑이 소중했나를 떠올려 보면 그래 분명 한순간은 그랬다.
피사트 그 남자가 제 두 손으로 나의 숨통을 조이려 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토록 잔인하게 나락에 밀어 넣으려 했던 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우연히 만나 우연히 사랑에 빠지고 열렬히 불타올랐으니 그만큼 빠르게 식은 거라고, 아이가 죽고 도망치듯 리베른을 떠나려 짐을 챙길 때 별 관심도 없는 그 사람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영원할 것처럼 사랑을 속삭였지만 결국 이뿐이었구나. 그렇게 그저 그 남자의 마음이 떠났다고만 여겼다.
이런 하찮은 사랑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려 했다는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땐 오히려 피사트의 무관심이 고맙기도 했다.
죄도 없는 아이를 숨기느라 죄책감에 시달릴 때도, 공녀에게 협박을 받아 원치 않는 일을 해내야 할 때도 살인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피사트 그 사람을 그래서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웠으니까. 나를 찾지 않는 그가 밉다기보단 이제 고마웠으니까.
사랑이라는 초라한 마음을 쉽게 잊어준 게 눈물이 날 정도로 난 고마웠다.
이 모든 일은 어리석었던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공녀와 함께 날 속인 거라고?
공녀를 흠모해 나의 약점을 만들어 준 거였어? 뻔뻔한 낯짝으로 그렇게나 사랑을 지껄였으면서?
그의 심장을 도려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픈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 대한 기억도 모조리 리베른의 호수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피사트는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없다. 벨리타는 손에 쥔 독약 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분노를 누구에게 풀어야 할까 생각하니 공녀의 목숨 줄이 보였다.
이 독약을 공녀의 방 안에 숨기면 그 여자는 끝이다.
모든 불행의 시작이 레이샤, 그 고귀한 공녀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내가 뭘 더 망설여야 하지?
빛도 보지 못하고 떠난 아이에게 무수한 죄를 지었다. 불릴 이름조차 없이 떠난 그 가여운 존재를 숨기기 위해 몹쓸 짓을 하고 다른 이에게 또 죄인이 되었다.
벨리타 엔느 데보니안의 삶은 그렇게 지켜졌다. 그렇게 악독한 짓을 해서라도 지키고픈 삶이었다.
하지만 난 결국 또 어리석었구나.
어차피 더 이상 물러날 길도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귀족들의 질타도,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도 두렵지가 않았다.
눈앞이 아득하니 오히려 가야 할 하나의 길이 뚜렷하게 보였다.
피할 수 없다면 그동안 저지른 일에 기꺼이 벌을 받으리라.
그런데 혼자는 못 가지. 레이샤,당연히 너도 나와 함께 가야지.
“아가씨…….”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녀의 걱정스러운 부름에 벨리타가 소매 끝으로 눈물을 슥 닦아 냈다.
서글프게 울던 그녀는 언젠가부터 간악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부들에게 말머리를 돌리라 해. 칸제로스 공작저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