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벨리타의 붉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굵은 가지에 푸른 녹음이 무성한 이 여름에 맞지 않게 그녀의 야윈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져 갔다.
얼핏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을 해 보라니까?”
참으로 교활하다고 생각했었다. 첫 번째 생애에선 그녀가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수도 없이 빌었던 적도 있다.
그만큼 난 너를 싫어했는데. 내가 원망했던 모든 행동이 레이샤를 위한 연기였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는 동시에 처음으로 나는 벨리타가 네가 안쓰러워졌다.
그럼에도 그간 내게 했던 짓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만.
“잘못했습니다, 폐하. 그동안 폐하께 벌인 일 전부. 감히 사죄를 하겠다 나선 이 순간조차도 저는…….”
벨리타는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뒷말을 삼켰다. 한 줄기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나는 들썩이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가만히 바라봤다.
진심일까, 아니면 저것 또한 거짓일까. 한 사람의 생을 제 손으로 끝내야 하는 죄책감일 수도 있겠다.
“용서를 빌지 않겠다고 했으니 본인도 알고 있죠? 지금 이 사과 너무 늦었어요.”
“흐윽……. 흡.”
나는 억지로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자리에 앉게 했지만 눈물을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겨 붙어 시야를 가려도 그녀는 여전히 숨죽여 울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행동 전체를 의심하게 된 것도 이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차나 다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벨리타는 그 사실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실제로 어딘가에 독약을 탔으면, 게다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처음이라면 저렇게 나올 수가 없지 않나?
벨리타는 나와 있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 보이긴 했지만, 차려진 다과상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찻잔을 들어 벨리타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우느라 정신이 없을 뿐 경직되어 나를 바라보거나, 태도가 급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테이블 위에 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예상한 바가 아니었다.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건 두려우니 눈물로 시야를 가려 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 찻잔에 독약을 타지 않았다거나.
잠시 후, 벨리타가 얼굴을 들었다. 여전히 내 눈을 피하는 탓에 나와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주저하며 들썩이는 입술을 보았을 때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보며 그녀가 무슨 말이든 하기를 기다렸다.
곧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겨우 들렸다.
“폐하, 송구하지만 잠시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해 주시겠어요? 이대로라면 폐하께 제대로 된 사죄를 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요. 힘들게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내가 뭘 해 주면 되죠?”
“잠시 밖에 나가 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오고 싶습니다.”
벨리타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얼굴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도 걷어 냈다.
그런데 진정하려 밖에 나가겠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까보다도 더.
벨리타의 부탁을 들은 나는 그녀가 이 다과상 어디에도 독약을 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요. 그러도록 해요. 이렇게 있자니 나도 곤란하네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벨리타가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나 응접실을 나서자마자 나는 밖에 있던 시녀를 다급하게 불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시녀가 덩달아 조급해져 내게 물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벨리타 영애가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볼래요? 바로 돌아와 행적을 알려 줘요.”
* * *
‘폐하, 영애께서 황후궁 뒤뜰로 향하시는 걸 봤습니다. 구석에서 멈춰 서서 한참 주위를 살피시더라고요. 바로 돌아오라 하신 게 생각나 더 지켜보지는 못했어요.’
나는 시녀가 전해 준 이야기를 곱씹으며 벨리타가 있다는 황후궁 뒤뜰을 향해 갔다.
대뜸 사죄를 하겠다며 황후궁에 올 리가 없다.
사죄라는 건 핑계에 불과하다. 분명 이유를 지니고 왔을 테니 헛되게 돌아갈 리 없다.
그런데 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얼마 안 가 벨리타가 보였다. 그녀는 발끝으로 뒤뜰의 땅을 평평하게 다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을 마친 후에는 시녀의 말처럼 주변을 살폈다.
벨리타의 구두와 손은 이미 더러워져 있었다. 유난히 폭이 넓었던 소매 끝에 흙이 묻은 게 대번에 보였다.
“화, 황후 폐하!”
뒤늦게 나를 발견한 벨리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울어 새빨개진 흰자 위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순식간에 벨리타의 얼굴에 남아 있던 핏기가 모두 가셨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세워 두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벨리타는 혼이라도 나간 듯 같은 말만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방금까지 그녀의 발아래서 다져진 땅을 보았다.
티도 나지 않을 뒤뜰의 구석, 새끼손가락의 두 마디도 되지 않을 크기로 땅에 구멍을 냈었는지 딱 그곳의 흙만 주변과 달랐다.
빛깔이 붉고 진한 흙이 헤집어져 햇빛에 마른 흙과 뒤섞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작은 돌과 연녹색의 잔디가 헤쳐 있었다.
벨리타는 내가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눈치를 챈 건지 다시 자신의 구둣발로 방금까지 다져 놓던 땅을 밟아 가렸다.
“발 좀 들어 볼래요?”
“폐하, 그냥 저는…….”
난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아 뒤로 밀었다. 살짝 힘만 줬을 뿐인데 벨리타는 꽤 쉽게 밀려났다.
변명도 저항도 하지 못하는 벨리타의 두 눈은 이제 황폐하다 할 만했다.
구두코로 흙을 들추자 이미 구멍을 내놓은 땅이 쉽게 파헤쳐 졌다. 곧바로 발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지금 내 생각이 맞는다면 분명 저것은 독약 병일 것이다.
틀림없어.
독약이 두 병인 이유, 이제야 알겠네.
벨리타 그녀도 레이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죽이려는 레이샤의 함정에.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들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예상한 대로 작은 병이었다.
그 병을 흔들자 안에 반쯤 채워진 이름 모를 액체가 찰랑였다.
레이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확실하게 날 무너뜨릴 방법이 필요했던 거였다.
벨리타의 죽음에 내가 누명을 쓴 그때처럼.
‘역시 너였구나. 그때도 지금처럼 전부 네가 벌인 짓이었어. 정말 한결같네.’
그래도 그때와는 달리 이렇게 대담하고 정성스레 증거까지 만들어 주니 이걸 고맙다 해야 할까?
“벨리타.”
“…….”
내 부름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벨리타를 따라 무릎을 굽히고 손에 쥔 조그마한 약병을 그녀의 앞에 내보였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요. 나머지 한 병, 공녀에게 있나요?”
“…네?”
한발 늦게 내 물음을 이해한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눈동자에 잃었던 빛이 잠시 되돌아왔지만 그 빛엔 놀라움과 절망만이 깃들어 있었다.
“독약을 두 병 구했잖아요. 한 병은 눈을 피해 공녀에게 전했겠고, 남은 한 병은 공녀가 황후궁 어딘가에 숨겨 놓으라고 했겠죠. 내 말 맞아요?”
“어, 어떻게 폐하께서…….”
레이샤나 벨리타나 둘 다 철저히 숨겼다고 생각했겠지. 독약 기사를 내가 실은 게 아니었다면 나도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공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해요? 날 죽이려 이런 짓을 하는 거 같아요?”
벨리타는 입을 닫았다. 다문 입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여전히 붉은 그녀의 눈에 투명한 유리막이 씌워지듯 눈물이 차올랐다.
황후궁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꾸몄고, 들켰으니 침묵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여기서 기사들을 불러 당장 영애를 옥으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죄를 혼자 뒤집어쓰기 싫으면 대답하세요.”
계속 망설이며 주춤거리다 결국 그녀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아까처럼 한 줄기 눈물을 떨구는 게 아니었다.
소리 죽여 오열하듯, 벨리타는 그렇게 억눌러온 감정을 터트리며 내 앞에서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으로 무너지는 여자는 내가 기억하는 벨리타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의혹만……! 의혹만 만들면 되는 일이라 했습니다. 요즘같이 독약 미제 사건 기사가 매일같이 나오는 때에 폐하께서 독약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부정적 여론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전 무슨 일이든 했어야 했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든!”
“그래야 했겠죠. 살인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비밀을 숨겨야 했을 테니까.”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벨리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나와 마주 섰다. 그녀는 내게 질문을 던져 놓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나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턱 끝에 맺힌 벨리타의 눈물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대가 그토록 숨기는 비밀을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한가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벨리타는 지금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일의 모든 전말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악에 받쳐서라도 나를 도울 테니까.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며 나는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벨리타 영애, 그대는 죽을 거예요.”
“무슨 말씀을…….”
“공녀가 당신을 노리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영애의 죽음으로 누명을 쓴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라고 있는 걸 테지만.”
“그럴 리 없습니다. 공녀님께서 저를 왜요?”
“이제껏 공녀가 저지른 악행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죠?”
“…….”
“공녀는 당신을 언제라도 죽이려 했을 겁니다. 마침 그 죽음을 이용할 수 기회가 지금 생겨난 것이고 공녀에겐 더없이 좋은 일이죠. 나와 영애, 우리 둘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순식간에 흐르던 눈물이 그쳤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 벨리타는 바짝 굳은 채 고개를 들었다. 절망으로 가득 찼던 눈에 혼란이 새겨진 것도 이쯤이었다.
꽤 영리한 영애였으니 말로는 부정해도 내 말을 무시할 수 없겠지.
벨리타는 레이샤에게 건네준 한 병의 독약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가는 데에 쓰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찜찜하다 생각쯤은 했을 것이다.
부정적 여론을 이끌어 날 궁지로 몰고 가는 게 계획이라면 같은 종류의 독약이 두 병 필요하지 않으니까.
차마 레이샤에게 나머지 한 병의 쓸모를 묻지 못했을 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모르겠습니다, 전.”
“믿지 못하겠다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영애, 알고 있죠? 황후궁 뒤뜰에 독약을 숨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는 거. 황후를 시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명을 따라 줘야겠습니다.”
지금부터 벨리타가 필요했다.
칸제로스가를 몰락시키고,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 내려면 벨리타, 그녀가 절실히 필요했다.
벨리타가 나를 돕는다면 내가 원하는 결말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결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벨리타 자신도 목숨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손에 든 독약 병을 세게 쥐었다. 유리병을 반쯤 감싸고 있던 천 조각에 붙은 자잘한 흙이 손바닥에 거칠게 닿았다.
하드엘, 그의 앞에 흑마법사가 나타났던 끔찍했던 미래를 막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소중한 이들 모두를 지켜 내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어떻게든, 어떻게든 레이샤와의 악연을 끝내고 말 것이다.
앞에 선 벨리타의 어깨가 바들거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가 해야 할 말들을 차분히 읊었다.
“벨리타, 그대가 해 줄 일은 세 가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