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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16)화 (11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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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꽤 시원하네요.”

주위로 우거진 나무가 짙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사르륵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잔디는 굼실거리는 연녹색의 물결처럼 보였다. 약간의 더위마저 잊게 할 정도의 푸름이었다.

“여름이 지나면 이 풍경은 다시 못 보겠지요. 그래서 같이 보러 오자 했습니다. 황후궁과 신전 업무에 치여 다들 쉴 시간도 없었던 듯하여.”

그늘막 너머로 보이는, 유독 높고 맑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나는 다시 신전 기사들과 눈을 맞추었다.

“정말 좋은 풍광입니다.”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릭스는 신전 기사들 중 그나마 날 제일 어렵지 않게 대했다.

그런 릭스의 뒤를 이어 흐트러진 짧은 머리를 매만지던 릴리가 다소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항상 신전에만 있어 답답했는데. 저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바릴호움 경과 줄리아 경, 그대들은…….”

“감사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들려온 바릴호움과 줄리아, 이 두 사람의 우렁찬 목소리에 근처 나무에 숨어 있던 새 몇 마리가 파드닥 날아올랐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자 바릴호움은 멋쩍게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줄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손을 꼼지락거리며 하늘거리는 새하얀 테이블보만 내려 보았다.

어쩌지. 내가 편안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줘야 하는데.

“긴장할 필요 없어요. 오늘은 그냥 놀러 왔다 생각하고 편히 즐겨요.”

“그래. 너희들이 폐하를 불편…….”

“아델 경!”

“네?”

설마 하려던 말이 너희들이 불편해하니까 폐하가 이 자리를 마련한 거다.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으아, 지금도 저렇게 어색해하는데 더 어색해지잖아! 

나는 커다래진 아델의 두 눈을 마주 보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은근히 불안하단 말이지, 아델.

“왜 그러십니까?”

“앞에 다과 좀 먹어 봐요. 맛있을 거예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아델은 내 뜻에 따라 구운 과자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덕분에 꽤 자연스럽게 그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우물거리는 저 입이 못다 한 말을 잇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려야 한다.

“다들 신전 기사가 된 후에 어려움은 없나요?”

첫 질문으로는 나름 괜찮았다 생각한 물음에 가장 먼저 답을 하려 입을 연 건 역시나 릭스였다.

“네, 마법사로서 기사가 되는 일이 드문 만큼 오히려 즐겁게 임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전에 있다가 황후궁에 오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요! 신전에서는 장로님께서 막 부려먹으셔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앗! 죄송합니다.”

포크로 와인 젤리를 쿡 찌르며 다소 고조되어 말을 잇던 릴리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황후인 나와 기사단장인 아델 앞에서 실례가 될 만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염려와는 정반대로 곧 아델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후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역시 릴리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도 동감.”

그래 잘한다, 아델!

가장 수줍음이 많던 줄리아도 장로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은지 쭈뼛쭈뼛 나섰다.

“맞아요. 저도 황후궁에 오는 게 좋아요. 장로님과 있으면 귀가 따가워서…….”

장로, 미안해요. 아무래도 나 이 대화에 참여해야겠어.

“장로가 일을 많이 시키나 봐요. 힘들겠어요.”

“네! 엄청!”

케이크를 작게 잘라 입에 넣던 바릴호움은 묵묵하던 아까와 달리 내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옆에서 조그맣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줄리아를 보고 뭔가가 생각이 나기라도 한 건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줄리아 경, 근데 저번에는 황후궁에 폐하께서 계셔서 그곳에 가는 게 즐겁다고 하지 않았나요? 장로님 때문이란 얘기는 못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있어서 즐거워?

“쉿!”

줄리아가 다급하게 검지를 펼쳐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바릴호움을 조용히 시키기 위한 의도처럼 보였으나 애석하게도 바릴호움은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는 아랑곳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항상 제게 그랬거든요. 폐하를 뵈면 기분이 좋아진다고요.”

“정말이에요? 줄리아 경, 감동인데요?”

줄리아는 눈앞의 찻잔을 들어 찻물을 벌컥 들이켜고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네! 사실이에요!”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아델이 구운 과자를 툭, 떨어뜨렸다.

아델은 잔디에 떨어진 구운 과자와 줄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줄리아, 고백이라도 하는 거야? 아까운 내 과자.”

눈을 번쩍 뜬 줄리아는 아델을 향해, 정확히는 아델의 구운 과자를 보며 사죄의 의미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과처럼 발그레해진 뺨을 드러내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실은 어릴 적부터 역사서에서 에스타란토를 접하고 동경해 왔어요. 그런데 에스타란토이신 폐하를 이렇게 곁에서 보필할 수 있다니, 제게 너무나 큰 축복이라 행복…….”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었던 것 같은데.”

“바릴호움!”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지그시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찻잔을 들어 붉은 꽃잎 색이 진하게 우러난 차를 음미하듯 마셨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물론 평온이 깃든 적막도 좋지만 때론 이렇게 어수선하게 들뜬 분위기가 반가웠다.

가만히 있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날들, 내가 나서 할 수 있는 건 없고 생각을 정리하는 게 최선인 그러니까 특히 요즘 같은 날들이 이런 분위기가 반가워지는 때였다.

신전 기사들과 어색함을 풀기 위한 자리였는데 오히려 내가 더 위안을 얻어 가는 것 같네.

“근데 또 다른 이유라는 건 뭐야?”

나와 같은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던 아델이 돌연 의아쩍은 눈초리로 줄리아를 추궁했다.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표정은 꽤나 짓궂었다.

“아델 경, 난처해하잖아요.”

“그렇지만 폐하, 너무 궁금한걸요.”

사실 나도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부담스러워할 테니 내가 나서 아델을 말려야겠지.

“너, 너무 아름다우시니까……!”

“네?!”

“너무 아름다우셔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요! 반짝거려서 그래서 눈을 잘 못 마주치겠어요!”

그녀가 속사포처럼 뱉은 말에 바릴호움을 뺀 나머지가 모두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만, 릴리는 입 밖으로 뿜을 뻔 찻물을 겨우 삼켜내고 캑캑거렸다.

“푸흡!”

나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말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저 너머 오후의 햇살과 닮은, 편안하고 포근한 그런 웃음소리였다.

부끄러워하던 줄리아도 결국엔 입가에 보드라운 미소를 그려냈다.

“줄리아,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저도요, 줄리아 경.”

아델과 다른 신전 기사들이 줄리아를 지지하고 나섰다. 내 얘기에 내가 끼는 게 우습긴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솔직히 나도요.”

“폐하께서 줄리아의 의견에 공감하신다고요?”

“그럼요. 내 얼굴은 내가 아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그들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며 자기들끼리 내 입장을 헤아리고 나섰다.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혼자 가만히 미소 짓는 아델이 보였다.

나를 보자 그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성공.’

그의 입 모양이 말하려는 건 너무도 분명했다.

신전 기사들과 친해지는 게 목적이었으니 그걸 성공했다 말하는 거겠지.

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의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피었다.

“아델 경이 그렇게 웃으시는 거 처음 봐요.”

“뭐?”

나와 눈을 맞추던 아델이 서둘러 고개를 돌려 릭스를 쳐다봤다.

화사하던 얼굴이 단숨에 굳어진 것이 조금 당황한 사람처럼 보였다.

응? 근데 아델은 항상 이렇게 웃고 있는데? 평소 신전 기사들에게는 엄한가?

“아델 경이 평소에 잘 안 웃나요?”

“오늘처럼 종일, 그것도 저렇게나 밝게 웃진 않으십니다. 특히나 장로님 앞에서 웃는 모습은 아예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내가 그랬나?”

이번에 아델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최대한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러자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듯 릭스가 주춤거렸다.

의자에 앉아 있기에 물러날 곳이 없으니 몸만 살짝 뒤로 물리는 식이었다.

근데 방금 웃은 건 내가 봐도 어색했다.

“네, 그랬습니다.”

“에이, 릭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장로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방실방실 잘 웃는데. 요즘 장로님과 내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그것도 모르지?”

“음, 제가 기억하기로는 얼마 전에 또 두 분이서……”

‘얼마 전에 또 두 두 분이서’ 그 뒤에 이어질 말, 왠지 예측이 되는데.

“혹시 둘이 또 싸웠어요?”

“아니요? 싸우다니요, 폐하.”

“싸우셨죠. 네. 그건 분명 싸우신 겁니다.”

그럴 줄 알았지. 또 티격태격했구나?

“이번에는 무슨 일인데요? 쇠테가 박힌 나무 상자에 있는 사탕을 훔쳐 먹었어요?”

“장로님께서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까?! 언제요?”

“얼마 전에요.”

아델은 고개를 젖히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제 눈을 가려 버렸다.

그렇게 아델이 의자에 축 늘어진 채 혼잣말로 투덜대는 사이 릭스는 아델을 대신해 차분히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이번에는 마법서 때문이었습니다.”

“마법서가 왜요?”

“얼마 전에 아델 경께서 엄청난 마법서를 발견해 궁 안에 들고 오셨거든요.”

릭스가 말하는 마법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얘기를 듣자마자 왠지 아델이 내게 가져다준 마법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직감이 틀린 것은 아니었는지 뒤이어 내 생각에 확신을 줄 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책에 걸린 보존 마력이 사라질 정도로 아주 오래된 마법서였습니다. 제가 보아도 대단한 마법서였어요.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고대의 마법 원리가 아주 체계적으로 적혀 있었거든요. 장로님이 탐을 내실만 하셨죠.”

“그 마법서 아무래도 나한테 있는 것 같은데요?”

“폐하께요?”

“맞죠, 아델 경?”

그는 눈에 얹은 손을 천천히 내리고 긍정했다.

릭스와 옆에 있던 릴리, 바릴호움, 줄리아. 그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델을 바라봤다.

“장로님께는 절대 드릴 수 없다 하셨잖아요!”

“그야 황후 폐하께 드려야 하니까.”

“한 달만 빌려 달라 해도 안 주셨잖아요!”

“그야 황후 폐하께 빨리 드려야 하니까.”

이런. 괜히 장로에게 미안해지네.

“내가 서둘러 읽고 장로에게 빌려줘야겠네요.”

“네? 서둘러 읽으신다니요?!”

이번에는 아델까지 합세했다. 그들은 아까보다도 더욱 커진 눈으로 기겁하여 물었다.

“그 마법서를 서둘러 읽으실 수 있나요? 다 보시는 데 얼마나 걸리실 것 같으세요?”

“…아마 한 달? 많이 어렵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대니 아델이 입을 열었다.

“폐하, 방금 신전 마법사들에게 엄청난 자괴감을 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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