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손에 든 접시 위, 케이크의 산딸기 장식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하녀 둘은 당황하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식사도 거르신다 하시기에 좋아하시던 케이크를 가져왔습니다. 저, 저희는 아주 잠깐 이것만 드리고 가려고…….”
“마, 맞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어 가며 둘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명을 이어 갔다.
잔느는 그런 하녀 둘을 묵묵히 지켜보다 입을 뗐다
“이만 돌아가 보세요. 아가씨는 주무십니다.”
“잔느 님, 그런데 이 자물쇠…….”
“이만 돌아가라 했을 텐데요. 공작님께 알리길 바라는 겁니까?”
쭈뼛거리던 하녀들은 결국 고개를 꾸벅 숙이며 종종걸음을 쳐 달아나듯 물러났다.
한숨을 깊게 내쉰 잔느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방문을 바라보다 그 너머에 있을 레이샤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역시. 며칠 동안 그래왔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그래온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그녀는 또다시 애걸했다.
“아가씨, 제발요. 이제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됩니다.”
여전히 복도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혹시나 오늘은 다를까 기대하던 잔느의 낯빛은 어제와 다름없이 어두워졌다.
공작이 자신을 가둔 그날 이후로 레이샤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이상 애타게 공작을 부르지도, 저택이 떠나가라 울부짖지도 않았다.
잔느는 의원이 들를 때마다 간간이 본 레이샤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아물어 가는데 도리어 얼굴은 푸석하게 메말라갔다.
생기 넘치던 꽃. 마치 그와 같던 레이샤는 물을 주지 못해 시든 것처럼 볼 때마다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오소소 소름이 끼치던 말들을 늘어놓던 그때가 차라리 잔느는 그리워졌다.
모든 것을 텅 비워 낸 것만 같은 레이샤의 눈동자는 어쩐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황량해 보였으니까.
어릴 적 레이샤의 조그마한 손, 맑은 눈동자, 사랑스럽기 그지없던 사소한 습관들을 기억하고 있는 잔느에게 있어 피폐하게 변해 가는 레이샤를 지켜봐야 하는 일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차라리 황후가 병이 나 죽어 줬으면 좋겠다.’
레이샤를 위해서 잔느는 요즘 그런 생각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생각뿐이었지만.
“답하지 않으셔도 우선 식사는 올리겠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핑 도는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방문 너머에서 레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모.”
“아가씨!”
요 며칠 보아왔던 얼굴만큼이나 목소리가 퍼석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반가워 잔느는 문에 바짝 다가섰다.
“이제 기운이 드신 거예요? 몸은 어떠세요?”
“…….”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안 하셔도 돼요, 먼저 식사를 드셔야 하니 일단은…….”
“알겠어, 먹을게. 유모, 근데 내가 부탁이 있거든?”
“부탁이요?”
“신문을 좀 가져다줄래? 아버지는 모르게 식사와 함께 방 안에 넣어 줘.”
* * *
평온하지만 마냥 평온하지만은 않은,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여전히 레이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볼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그녀가 공작저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공작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마는.
무모하게 달려들면 모를까 이렇게 가만히 있을 레이샤가 아닌데.
한편 레이샤와 달리 공작은 베르토반 영지를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활발히 귀족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항의서를 받아 내기 위한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과연 일이 어떻게 흘러갈까. 레이샤를 제외하면 일이 생각대로 풀리고 있기는 했다.
나는 창문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창문을 열었다.
밀려들어 오는 바람에 온전히 걷지 않은 얇은 시폰 커튼이 살랑 나부꼈다.
잇따라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마법서의 책장도 팔락거리며 넘어갔다.
봄에 비해 유독 짧은 여름이 지나가려는 것인지 요즘은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아직은 더운 공기에 짙은 풀 향이 가득 배어 있지만 조만간 이 푸른 계절도 끝이 나지 않을까 싶다.
여름이 왔다고 말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생각해 보니 아벨리움으로 되돌아온 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 갔다.
가을과 겨울. 이 여름보다 더욱 짧을 그 계절만 지나면 정말 일 년이 온전히 채워진다.
길다면 길고 빠르다면 빠른 시간이었다.
그간 있던 사건 사고를 생각하면 1년이 이 아니라 2년이 이라도 흐른 것 같았지만 하드엘, 그와 함께한 시간을 생각하면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다시 다가올 아벨리움의 긴 봄을 떠올리면 흘러간 시간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
다음 봄엔 하드엘과 화원의 다리에서 에스트라의 꽃이 피는 것도 함께 볼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봄날,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난 봄날,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봄날.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또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맑게 흘러가는 새소리를 들으며 나는 창틀에 턱을 괴고 평화롭고 노곤한 오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신전 기사 둘이 시야에 들어왔다.
점처럼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멀리에 있었기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형체는 흐릿했다.
신전을 상징하는 백색의 망토만이 바람결을 따라 펄럭이며 그들의 신원을 내게 알려 주고 있었다.
오늘 황후궁 근무인 신전 기사들인가 보구나. 장로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며칠 전만 해도 덥다 덥다 노래를 불렀는데.
신전 기사들을 보자 장로가 떠올랐고 그를 생각하자 불현듯 머릿속에 잊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에스타란토의 힘은 도대체 언제 발현되는 거지?
루안이 그런 안 좋은 일을 당하고, 한동안은 에스타란토의 힘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어 완전히 잊고 살았다.
전처럼 울렁거리는 느낌도 없어서 의식조차 못 했다 하는 게 맞을지도.
장로는 내가 이미 신성과 마력의 흐름을 다스리고 있다 했으니 곧 조짐이 보이려나?
이미 이야기가 틀어져서 함부로 때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벨리타의 죽음에 누명을 쓰는, 혹은 흑마법사가 나타나는 그 끔찍했던 일의 시작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것처럼.
지난 생에 있었던 일들은 이대로 지나갈지도, 수호자의 말처럼 더욱 악랄하게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일어날 일들의 인과를 하루빨리 끊어낼 수 있도록 나를 단련시키는 일뿐이었다.
어쨌든 에스타란토의 힘만 무사히 깨어난다면 모든 게 쉬워질 텐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신전 기사들이 가까워졌다.
동시에 그들의 형체가 또렷해져 난 두 명의 신전 기사가 줄리아와 바릴호움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둘은 길을 걸으며 편하게 서로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었다.
어깨를 툭 치기도, 인상을 쓰기도 그러다가 배를 부여잡고 끅끅거리기도 했다.
그런 기사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많이 친해졌구나. 처음에는 어색해 눈치만 보더니.
앗, 눈 마주쳤다.
창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그들이 순간 멈칫하더니 바짝 긴장하여 허리를 숙였다. 아까의 밝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그들은 다시 허리를 폈다.
잠깐, 뭐야? 설마 내 앞에서만 어색하고 그랬던 건가? 아델은 분명 신전 기사들이 나를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했는데?
부서져 내리는 한낮의 햇빛 탓에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삐걱대며 걷고 있는 줄리아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후로 오른발이 나갈 때마다 오른손이, 왼발이 나갈 때마다 왼손이 같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정작 줄리아는 나를 의식하느라 본인이 얼마나 어색하게 걷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나 불편한가?’
돌이켜 보면 신전 기사들과 따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저렇게나 불편하다고?
지금에야 상황이 달라졌지만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던 일은 예전의 나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나를 어려워하는 것에는 나도 아직 적응이 안 된다.
신전 기사들이고 앞으로 가까이 지낼 사람들이니 어색함 정도는 풀고 싶은데 어쩌지.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골똘히 고민하던 차에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아델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요.”
밖에서 본 신전 기사들과 달리 아델이 여유롭게 방긋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숙였던 고개를 든 그는 당연하게 마련 훈련을 위해 내가 먼저 서재로 걸음을 옮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방금 전의 고민을 이어 갔다.
그래, 내가 너무 아델하고만 시간을 보냈지. 그건 훈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다른 신전 기사들과도 따로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겠어.
지금 줄리아의 모습을 보니 그 필요성이 확실해졌다.
“아델 경.”
아델은 결심에 찬 내 부름에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평소처럼 곧바로 서재로 향하지 않는 걸 이상하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우리 오늘 수업 미뤄요.”
“네? 수업을요?”
땡땡이를 부리자고 꽤 당당하게 말을 하자 아델이 한발 늦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가 한 말을 되물었다.
창가와 마주 보고 선 그의 두 눈은 평소보다 더욱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저기 저 신전 기사 둘 보이죠?”
아델은 내 손끝이 향하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한낮의 여름 풍경 속에서 줄리아와 바릴호움을 찾아낸 그는 곧 배를 움켜잡고 몸까지 웅크린 채 키득거렸다.
“으하하! 저게 뭐야, 하하!”
“어때 보여요?”
“곁눈질을 해 대는 게 꼭 못 볼 거라도 본 사람 같습니다. 폐하, 특히 줄리아의 저 걸음걸이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못 볼 거라…….”
“귀신이라도 봤나? 왜 저리 굳어 있어, 큭큭.”
웃다 눈물까지 맺힌 건지 아델이 눈가를 꾹 눌러 닦으며 중얼댔다.
귀신이라니, 아델.
“날 보고 저러는 거예요.”
“에……? 네?!”
“좀 친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누구의 말과는 달리 날 아주 불편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델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물어봤을 때는 분명 어렵지 않다, 너무 좋으신 분이다 이리 말들을 했었는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때 그대가 직접 물어보고 알려 준 거였어요?”
“네!”
아델의 대답은 참 해맑았다. 그 해맑음에 눈이 부실 정도야…….
“직접 물어보면 ‘너무 불편해요.’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잠시만요, 그럼 저에 대한 평도 거짓일 수 있다는 거네요?”
“무슨 평이요?”
“잘생기고 능력 있는 마법사라는 평이요. 제가 신전 기사단 단장으로서도 훌륭하다 하던데요?”
“혹시 그것도 직접 물어봤어요?”
아델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위로하기 위해 장난 섞인 말을 건네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 이 상황을 혼란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아델 경, 그대는 직속 상사나 마찬가지인데 누가 그대의 질문에 사실대로 말을 하겠어. 나는 차마 하지 못한 그 말을 삼키며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잘생기고 능력 있고 훌륭하기까지 한 기사단장이라.’
아델의 질문에 당황하며 저 대답을 다급하게 내놓았을 신전 기사들을 떠올리면 안타깝기도 귀엽기도 했다.
로펌에 있을 땐 나도 저랬던 것 같은데.
잠시 아주 오래전 겪은 일들을 회상하듯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먼지 쌓인 책을 펼치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생이 언제 이렇게나 아렴풋해졌는지.
“실수한 걸까요? 저는 장로님께서 제게 비슷한 질문을 하시면 있는 그대로 말하는 편이라 저들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실수까진 아니고요. 그리고 아델 경을 향한 평은 그들의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근데 도대체 장로에게는 뭐라 하는데요?”
“장로님에게요? 그냥 제가 그간 보고 느낀 그대로 유능한 마법사이시긴 하나 잔소리가 심하시다. 사소한 일로 황후 폐하께 집착하시는 것도 별로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울상을 짓는 장로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아니다. 장로라면 아델과 또 티격태격했겠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나는 아델에게 물었다.
“아무튼 오늘 수업은 미룰 수 있는 거죠?”
“폐하의 명이시라면 당연히요.”
“줄리아 경과 바릴호움 경은 황후궁 근무이니 시간을 내는 건 괜찮을 테고……. 그럼 아델 경, 그대는 남은 신전 기사들을 데려와 줄래요?”
“황후궁 밖으로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후원으로 소풍이라도 갈까 싶어요. 일종의 단합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