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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14)화 (11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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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내용을 빠르게 훑는 눈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물론 어떤 내용인지를 알고 안심했는지 점점 표정이 풀렸지만.

나는 잡고 있던 하드엘의 손을 살짝 당겼다. 그러자 검수하듯 책을 꼼꼼히 살피던 그가 나를 바라봤다.

“보시다시피 흑마법에 관한 책은 아닙니다. 마지막 장에 그건 그냥 재미있으라고 끝에 실어 놓은 이야기예요.”

“그렇군. 다행이오.”

전에 흑마법서를 발견한 아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

그러니 흑마법이라는 단어에 하드엘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흑마법과 흑마법사 그것과 내가 엮이는 게 걱정이 되어 이러는 것일 테니.

그나마 다행인 건 하드엘이 본 책은 흑마법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그러니까 보통의 마법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폐하.”

“왜 그러시오?”

“흑마법에 관한 서적을 읽어 보는 건 오히려 제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배움의 폭도 넓힐 수 있으니까요.”

“아니, 그건 어떤 도움이 돼도 접하지 않는 게 맞다 생각하오. 그리고 다른 마법서도 많으니 굳이 흑마법서를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생각되는데.”

아주 강경한 어조였다. 이 서재에 쌓여 있는 수많은 흑마법서를 발견한다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하드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흑마법서를 안 읽을 수도 없었다.

흑마법에 당해 까맣게 물들어 가던 하드엘의 두 눈을 나는 봤으니까.

“단순히 서적만 보고 지식만 습득하는 것은…….”

“그래도 싫소. 흑마법사들이 얼마나 악랄한 자들인데. 아무리 서적뿐이라 하여도 난 그대가 흑마법과 관련된 것에 손끝 하나 닿는 게 싫어.”

그는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보냈다. 절대 안 된다고,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래도 아델은 흑마법에 관한 서적을 읽는 건 괜찮다 말해 줬는데.

‘역시. 하드엘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나는 하드엘의 등 너머에 있는 책장을 흘긋 바라보다 다시 그를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네, 그리 걱정하신다면 읽지 않겠습니다. 대신.”

“대신?”

“부탁을 들어주세요.”

뻔뻔하게 나와 미안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답을 기다리며 나는 두 눈만 깜빡였다.

곧 하드엘의 입에선 힘 빠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 부탁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소. 무엇이든 말하시오.”

나는 하드엘이 도로 내려놓은 마법서를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면 <흑마법의 방비>를 적은 그 장을 가리킨 것이었다.

“흑마법을 싫어하시죠?”

“싫어하지. 플로리아 당신과 흑마법이 연관된다면 더 싫고.”

“그러니 저랑 해요, 이거.”

하드엘은 어리둥절해하며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이윽고 눈썹을 올리고 비스듬히 날 내려다보았다.

씨익 입꼬리를 당겨 올리는 게 왠지 짓궂어 보였다.

“재미있으라고 끝에 실어 놓은 이야기라 하지 않았던가?”

“네, 물론 저도 이런 주술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행운을 더해 주는 의식 같은…….”

“의식?”

“의식은 조금 거창하니까 부적 같은 것이라 해 두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걸 보면 날 놀리는 게 틀림없다.

이런 걸 믿냐며 그냥 가 버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같이 해 줬으면 좋겠는데.

“검이 필요하다 했던가? 마침 연무장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 가진 것이 있긴 한데.”

“해 주실 건가요?”

“뭐든 해 준다 약속하지 않았소.”

내 손을 살며시 놓고 하드엘은 자신이 차고 있는 검을 순순히 꺼내 들었다.

검은색 칼집 위에 금빛으로 새겨진 제국의 문양이 화려하게 번뜩였다.

하드엘이 나와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꺼낸 검의 칼날도 햇살 아래서 반뜻 빛났다.

얼핏 내게 선물한 단도와 비슷해 보였지만 크기부터가 달랐기에 위압감이 상당했다.

“이제 준비는 끝난 걸로 아는데, 맞소?”

하드엘이 카펫 위에 자신의 검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흑마법의 방비에 관한 내용은 그리 장황하게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훑어본 하드엘은 필요한 것이 검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이 과정이 얼마나 허접하고 단순한 것인지도.

그러니 저렇게 검을 덩그러니 내려놓고 끝이냐 묻지.

그런데 정말 준비는 이게 끝이 맞기는 한데. 내가 잘하는 거겠지? 손해 보는 게 없으니 일단 해 보자 하긴 했지만.

모르겠다. 간절하고 절실한 건 나니까. 설화를 따르는 게 우스워도 뭐라도 하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네, 그럼 시작할게요. 사실 간단해요.”

그래도 칼을 놓고 이러고 있으니까 뭔가 묘했다. 허접하긴 해도 주술을 행하는 기분이랄까. 마치 내가 주술사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럼 어서 시작해 주시지요, 에스타란토. 끝나면 함께 호숫가로 산책이라도 갈까 하니.”

“빨리 끝내겠습니다. 전혀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폐하.”

“긴장은 플로리아 그대가 하는 것 같은데?”

하드엘은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계속해 웃음 짓고 있었다.

아무랄 것도 없다는 듯 말을 하면서도 침을 삼키며 그가 내려놓은 칼을 빤히 보는 나를 발견하고는 더더욱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하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는 게 분명했다. 재미있는 장난. 아마 그쯤 생각하고 있겠지.

흠흠. 헛기침 소리를 내며 나는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는 단도를 빼 들었다.

그리고 칼집에서 칼을 꺼내 책에 나온 그대로 칼끝을 바로 세워 하드엘의 검의 칼날을 찔렀다.

쇠붙이가 서로 부딪쳐 챙 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뿐 이후 사방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이게 끝이야?

뭘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무슨 변화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허무할 정도였다.

이대론 안 되겠다 생각한 나는 단도를 내려놓고 자리에 선 채 눈을 꼭 감았다.

‘제발 하드엘이 흑마법으로부터 무사하길.’

두 번, 세 번. 속으로 같은 문장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첫 번째 생애의 끝이 반복되지 않길.

내가 기억하는 그 비참한 결말이 부디 달라지길.

그렇게 기도하고 있으니 어느새 목덜미 부근에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 하드엘의 손길을 알아채고 뒤를 돌려 하자 그제야 그가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폐하, 기도하는데 이렇게 뒤에서 안으시면 어떡해요.”

“이러면 기도를 안 들어주시나?”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럼 내 차례에는 절대 방해하지 마시오. 난 아주 중요한 기도를 할 참이니.”

“전 방해 안 해요! 어? 그런데 폐하께서도 하시려고요?”

“같이 하자 하지 않았소. 무엇보다 당신의 평안을 가장 염원하는 사람이 나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어.”

하드엘은 성큼 걸어가 자신의 칼로 조그마한 단도의 날을 가볍게 찔렀다.

후에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까지 내가 했던 그대로였다. 사실 기도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지만 아무렴 어때.

꽤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비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디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지라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내리감은 눈과 길게 뻗은 속눈썹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저 작은 단도를 앞에 두고 그는 무엇을 간절히 빌고 있는 걸까.

꽤 오랫동안 기도하던 하드엘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서서히 눈을 떴다.

전보다 맑게 빛나는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궁금하오?”

느른하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름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드엘은 대답 이전에 먼저 허리를 굽혀 단도를 주워 들었다.

그것을 다시 칼집에 넣어 내 손에 쥐여 주고 나서야 그의 입이 열렸다.

“당신과 함께 행복하게 해 달라 빌었소. 영원히.”

* * *

“어제 하넬 신문에 실린 독약 미제 사건 봤어?”

“봤지! 요즘 난리잖아. 갑자기 신문사에서 왜 다 독약 미제 사건을 다루는지 모르겠어. 그것 때문에 신문 읽기가 소름 끼친다니까.”

“그 사건을 처음 특집 기사로 실은 신문이 판매 부수가 그렇게 올랐다지? 그러니까 이젠 여기저기서 다 특집 기사로 독약 사건을 다루려 혈안인 거지. 나도 요즘 괜히 무서워 죽겠어. 어떻게 그런 짓들을 할 수 있는지. 그 범인들은 잡히지도 않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 사람들은 제대로 처벌받아야 하는데.”

두 하녀의 말소리가 공작저의 복도에 울려 퍼졌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에 맞지 않게 목소리가 소란스럽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그녀들은 공녀의 방 앞에 가까워지며 스스로 말소리를 줄였다.

“그나저나 우리 아가씨가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그리 점잖으신 공작님께서 아가씨께 방 안에만 머물라는 벌을 내리신 걸까? 잔느 님 외에는 누구도 올라가지 말라 하시고.”

“공작님도 너무하시지. 설마 요즘 아가씨에 관해 밖에 떠도는 이야기들과 연관이라도…….”

“쉿!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떡해! 가뜩이나 아가씨 기분도 안 좋으실 텐데. 그리고 말이야 솔직히 우리가 아가씨를 몇 해를 봤니, 넌 진짜 아가씨가 그런 짓을 하실 분으로 보여?”

듣고 있던 하녀가 확신에 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가 황후 폐하를 괴롭히기 위해 소문 속의 저열한 짓들을 했을 리가 없다. 모두가 비난 섞인 어조로 숙덕이더라도 공작가의 사용인들만큼은 그렇게 그녀를 믿고 있었다.

“절대 아니지. 우리 아가씨께서 그럴 리가.”

“그래 알겠어.”

“암, 그럴 리가 없지. 없고말고.”

“알겠으니까 고개 좀 그만 저어. 이러다 케이크 망가지겠어!”

둘은 들고 있던 케이크 조각을 동시에 흘긋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망가진 데 없이 그대로였다.

안심한 그들은 레이샤가 있을 방 앞으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아가씨께 드리고 내려가자. 들키면 큰일이야.”

“…근데 저게 뭐야? 자물쇠?”

“아가씨 방에 자물쇠가 왜 걸려 있어?”

레이샤가 갇힌 방에 다다라서 하녀 둘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 커다란 자물쇠를 감히 아가씨의 방에 채워 둘 사람은 하나였다.

그렇기에 둘은 믿을 수 없어 서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공작님께서 왜 저렇게까지 아가씨를 가둬 두었는지를.

“저기 아가씨…….”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들은 조심스레 레이샤를 불렀다.

몇 번의 부름에도 문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런 그들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기서 뭣들 하시는 거죠?”

“잔느 님!”

소스라치게 놀란 그들이 홱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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