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조금 이상했다.
사과를 해야 곁에 머무를 수 있다니?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워 눈을 굴리고 있자니 그사이 아델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참, 급한 일이 있다고 했었지.
“내가 너무 오래 잡아 뒀네요. 가 봐요, 경.”
몸을 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나 또한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지만 아델이 남기고 간 이상한 대답을 되짚느라 사실 정신이 없었다.
사과를 해야 곁에 머무를 수 있다. 사과를 해야…….
고작 마법서 한 권을 혼자 읽게 했다고 해서 사과를 하는 건 좀 말이 안 됐다.
실은 아델이 내게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건가? 그거라면 솔직히 말해 보라 다그쳐야 하나? 나는 계속 고민하며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냥 단순한 사과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순간 본 그의 표정이 설명할 수 없게 조금 묘해서, 그래서 마음에 걸렸다.
아델의 사과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설마 아델, 신전을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사과를 할 정도의 일이라면 그것뿐인데…….”
그러나 나는 곧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 거야. 아델이 신전을 떠난다 했다면 장로가 먼저 와서 내게 아델을 붙잡아 달라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테니까. 더군다나 그런 거라면 곁에 머문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였을까. 뭐가 됐든 아델에게 별일이 없어야 하는데.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여전히 가슴에 품은 채로 나는 알링을 조심스럽게 책상에 내려놓았다.
한 손으로 들기에 꽤 무거웠던 책도 그 옆에 뒀다.
“아델은 어떻게 이걸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거지. 무게가 엄청난데.”
해진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모서리는 거뭇하게 변하거나 까졌고 겉으로 보이는 종잇장은 누르스름했다.
보통 마법서는 마력이 깃들어 책 자체가 말끔한데 이 책엔 마력이 담겨 있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마력이 약해질 정도로 이 마법서가 오래된 걸지도.
나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마법서를 펼쳤다.
첫 장부터 수학 공식의 증명 같은 마법의 원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잠깐만. 아델 경, 이거 너무 어렵잖아……? 이걸 나 혼자 보라고?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굳는 느낌이 들었다.
두꺼운 책장을 대충만 훑아보아도 그와 함께 읽어 가던 기존 마법서보다 훨씬 난해한 내용이 수두룩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혼자 이해하기엔 아주 많이 버거울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난이도가 굉장했다.
그래, 이제야 사과를 한 게 납득이 되었다. 이런 마법서를 독학하라고 해야 한다면 사과를 할 만도 하지.
나는 헛웃음을 짓다 다시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사과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야 제가 계속 황후 폐하의 곁에 머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바쁜 일이 있다는 사람에게 화라도 낼 줄 알았던 건가?
역시 농담 삼아 말한 게 틀림없어. 원래도 아델은 능청스러운 농담을 종종 하니까.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마법서를 우선은 덮어 두려 할 때였다.
돌연 알링이 포로롱 날아올랐다.
알링이 바로 눈앞에서 짧은 날개를 파닥이는 탓에 놀란 나는 넘겨보던 마법서를 밀어 떨어뜨렸다.
툭. 하는 둔탁한 소음 끝에 명랑하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알링, 놀랐잖아.”
-짹!
혼을 낸다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알링은 살짝 열린 창문 사이를 잽싸게 통과해 밖으로 나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꽁무니를 뺀다 이거지. 여간 똑똑한 게 아니라니까.”
알링이 사라진 울창한 숲길을 바라보며 나는 실소를 흘렸다.
“아 참, 마법서!”
그러다 한발 늦게 바닥으로 떨어진 마법서가 떠올라 뒤를 돌았다.
한 줄기 햇살이 아무렇게나 펼쳐진 채 널려 있는 책 한 권을 비추고 있었다.
빛이 지나는 길을 따라 손을 뻗어 나는 그 마법서를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흑마법의 방비……?”
떨어지며 우연히 펼쳐진 책의 마지막 장에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나는 원래의 계획대로 책을 덮는 대신 서둘러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흑마법의 방비라니. 흑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비책이 있다는 거야?
정말 비책이란 게 있다면 하드엘의 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잖아!
나는 들뜬 마음에 빠르게 눈을 좌우로 움직였다.
하지만 문단의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혹시나 했던 기대는 실망감으로 변하였다.
아주 먼 옛날, 흑마법사들이 백마법사들을 견제하며 나름의 기세를 부리고 다니던 시절.
제국민들은 흑마법사의 마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그들의 칼끝으로 자신이 지니고 다니던 칼의 날을 찔러 달라 하는, 그런 부탁을 많이 하고 다녔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 일종의 안전 기원 의식이랄까.
단, 칼끝을 내주는 이는 자신의 평안에 염원을 담아 줄 사람이어야 한다는데 정말이지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야기였다.
저자 또한 독자를 위해 이것이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맨 마지막에 각인시켰다.
이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굵은 글씨로 강조까지 해 놓으며.
…민간 설화 같은 걸 실어 놓은 거였어. 그래,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부록, 말하자면 이건 재미 삼아 적어 낸 옛날이야기 같은 거였다.
어쩐지 그렇게 어려워 보이던 마법서가 술술 읽힌다 했더니.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제목 한 번 혹하게 잘 썼네.
이 시절에도 터무니없는 속설이란 게 존재했던 모양이다.
“이런 걸 따라 하는 사람이 있었나? 없겠지. 해 봤자 헛수고일 텐데.”
나는 기운이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책을 덮었다. 하지만 차마 그 장에 껴 놓은 손가락은 빼지 못했다.
혹시나라는 게 있는데 한 번 해봐서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을까?
그래, 심지어 이건 마법서야. 마법서에 적힌 설화이니 조금은 믿을 만할지도.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치며 괜스레 민망한 기분에 실눈을 뜨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후엔 책상에 앉아 본격적으로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실 두어 장에 정리되는, 그마저도 요약하면 반 장도 채 되지 않을 간략한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기도 했고.
이를 따라 하는 게 시간 낭비라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릴 거고, 그러면 하드엘은 흑마법사를 만나지 않을 거고, 결국 우리는 행복할 테지만 지금 내 안에 있는 이 불안함은 어떤 방법으로도 지울 수가 없으니까.
[플로리아 님, 어긋난 운명은 반복될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플로리아 님, 항상 명심하세요. 언제든 변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뭐든 더욱 질기고 악하게 다가올지도…….]
결국 나를 대신해 루안이 다쳤다. 에스타란토의 수호자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그때 내게 그런 말을 전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설마 하드엘도…….
아니야. 이번은 달라. 내가 그렇게 안 둬.
“황후, 들어가겠소.”
멈춘 시간 속에서 주위를 감돌던 붉은빛과 함께 들려오던, 예전의 꿈결 같은 목소리가 너무나 고통스럽게 마음을 파고들 때였다.
“그리 심각한 얼굴로 무얼 하시오?”
“폐하.”
하드엘이 찾아왔다.
고개를 들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와 마주하고 나니 숨이 막혀오던, 그 막막한 느낌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내가 방해를 한 건가?”
어떻게 당신이 방해가 될 수 있겠어.
그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젓자 내 뜻을 알아들은 하드엘이 대번에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씩 걸어올수록 그의 몸에서 배어나는 향이 짙어졌다.
무슨 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살결에서 나는 그저 달콤한 향기.
그래서였나 보다.
그게 꼭 당신이 내 곁에 있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무사할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항상 당신만 오면 두려움도, 불안함도 사라졌나 봐.
“그리 빤히 보면 내가 종일 머물고 싶어지는데. 괜찮겠소?”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은 단단했다. 하드엘은 책상을 짚고 있지 않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또 느릿했다. 내게만 닿으면 그의 커다란 손은 섬세해지기라도 하는 걸까.
살며시 입매를 올리자 하드엘은 미소는 잃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왜 웃냐는 듯.
하지만 나도 내 웃음의 이유를 몰랐다. 그저 그를 보면 웃음이 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표정으로 묻는 말에는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대신 이전의 질문에 답해 주려 나는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답해도 되나요?”
“무엇을 말이오?”
“방금 제 곁에 종일 머물고 싶다 하셨잖아요.”
“그랬지.”
“저는 좋습니다. 폐하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
잠깐만. 말을 하다 보니 이거 뭔가 조금…….
하드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은 잠시였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후끈한 열감은 목까지 전해졌다.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함께 밤을 보낸다는 그런 의미였어요!”
괜히 민망해진 내가 먼저 나서 해명을 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오히려 해명을 하려 들수록 좀 더 우습게 꼬이는 느낌이었다.
횡설수설하는 게 제 발 저린 사람 같기도 했고.
그런데 부부 사이니 이런 얘기도 이상할 게 없지 않나? 오히려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는 것도 좀 웃기잖아.
아니야……. 근데 아무래도 다른 부부들과는 경우가 다르니까.
아니야! 정략결혼을 했어도 이런 얘기는 눈 깜짝 않고 오고 가던데?
수차례 상반된 감정이 오고 가는 사이 풋, 하는 하드엘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어 왔다. 여름날의 짙푸른 하늘만큼이나 말간 소리였다.
투명한 창에 비쳐드는 햇빛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날 계속해 지켜보던 하드엘은 마법서 위에 올려 있던 내 손을 꼭 잡았다.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긴 손가락을 더욱 단단히 얽고서 그는 그렇게 맞잡은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어떤 뜻이든 상관없소.”
그 한 마디만 남기고 하드엘은 고개를 숙여 손목에 입을 맞췄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고, 어느새 그의 입매는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턱을 든 채 날 내려 보는 눈이 한층 더 나른해 보였다. 정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겼을까.
창문 틈 사이로 불어오는 따뜻한 실바람이 마음까지 간질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당황스럽던 아까의 상황을 뒤로한 채 하드엘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봤다.
나를 담은 두 눈과 반듯한 콧날, 그리고 손목에 닿았던 입술.
그 하나하나에 전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던 찰나, 하드엘이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 덕에 내 시야 안에 그가 가득 들어찼다.
“플로리아.”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의 부름에 답하려는데 눈앞의 하드엘이 돌연 미간을 구겼다.
그의 눈길은 내가 아니라 방금까지 내 손이 올려 있던 마법서에 닿아 있었다.
“흑마법?”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펼쳐 놓은 책 안에서 흑마법이란 단어를 귀신같이 읽어 낸 그는 묵직한 마법서를 한 손으로 집어 들며 다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