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아버지!”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있던 레이샤는 갑작스러운 공작의 등장에 퍼뜩 놀라며 순간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후엔 긴 머리칼로 제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공작은 당장 그녀의 고개를 들게 했다. 마주한 제 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할퀸 상처, 부어오른 뺨, 찢긴 드레스.
시녀를 때린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맞고 온 모양새였다.
“베르체늘 고아원에 다녀온다더니 왜 이 꼴인 것이냐?”
“넘어졌습니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다. 공작은 어색하게 웃음 짓는 레이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다 저리되었을까.
난 분명 너를 황후의 재목으로 귀하게 키워 냈는데 어쩌다가.
“넌 지금 내가 어딜 다녀오는 길인지 아느냐?”
“어딜 다녀오시는데요?”
“황제에게.”
놀란 레이샤가 조용히 두 눈만 끔벅이자 공작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또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황제가 내게 뭐라 했을 것 같으냐?”
“그건…….”
“네가 황후궁 시녀를 때렸다지. 재판정에 널 세우지 않는 대가로 베르토반의 영지를 회수하겠다 하더구나.”
레이샤가 침대에서 내려와 서서히 일어났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선 그녀의 눈에 실핏줄이 불긋하게 돋아 있었다.
“네? 그럴 리 없어요! 황후가 분명 제게 약속을……!”
“그래서 그리 맞고 온 것이었더냐? 황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이런 머저리 같은! 바보는 황후가 아니라 레이샤, 너다!”
“날 속였어? 황후가, 날?”
휘청이던 레이샤는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섰다. 이어서 그녀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폐하께서 이번 일까지 아셨다면 훗날 황후의 자리에 올랐을 때…….”
“황후의 자리? 지금 네 상황에 가당키나 한 것이냐? 황제가 너를 원망해 내 영지까지 회수하려 드는 마당에 가당키나 한 말이냐 이거야! 내가 양녀를 들이면 모를까.”
“양녀라니 아,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물쇠를 가져와라!”
밖에 있던 집사는 재빠르게 커다란 자물쇠를 챙겨왔다.
넋을 잃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레이샤를 뒤로한 채 공작은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곧 철컥 소리와 함께 방 문고리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쾅쾅!
“아버지!”
레이샤는 잠긴 문을 흔들고 두드리며 발악했다.
공작은 한발 물러나 덜컹거리는 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레이샤, 넌 내 아내 헤르안의 모든 것을 앗아 가는구나.”
가문을 위해 자신을 바치던 헤르안을 말렸어야 했다.
목숨이 위태한 걸 알면서도 배 속의 아이를 낳아 가문의 번영을 이뤄 내겠다 고집을 부리던 당신을 어떻게든 설득했어야 했는데.
그래 그때 차라리 레이샤 널 포기했더라면…….
“아버지, 양녀라니요. 그냥 하신 말씀이죠? 아버지의 꿈이셨잖아요. 황후의 자리는 네 것이라고 말씀하며 제게 가문의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 하셨잖아요! 잘할 수 있어요.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고요!”
“내 명이 있을 때까지 저 문을 열지 말거라. 그리고 당분간 위층에 그 누구도 올라오지 못하게 해.”
집사를 향한 공작의 단호한 한 마디에 고막을 찢을 듯한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제 잘못이 아니에요! 모두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 한 일인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 제발 이 문 좀 열어 주세요!”
때마침 물수건을 들고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잔느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어김없이 달려왔다.
들고 있던 둥그런 용기를 내려놓자 그 안에 가득 찬 물이 위태롭게 찰랑였다.
“공작님!”
잔느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공작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가며 애원했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의원을 불러 주세요.”
“무슨 짓을 벌인 건지는 알고 있느냐? 레이샤의 일은 내게 즉각 보고 하라 했을 텐데?”
“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의원을…….”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 보다가 방금 보았던 레이샤를 다시금 떠올렸다.
뺨을 할퀸 상처들과 터진 입가 주위로 굳은 피. 분명 흉이 남을 상처였다.
호사가들이 딱 좋아할 꼴이지.
“입이 무거운 의원을 찾아 들여보내.”
“네, 알겠습니다.”
집사의 대답을 듣고 안심한 잔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이에도 레이샤의 고함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문을 차고, 소리를 지르며 계속해서 공작은 찾는 목소리는 이제 절규에 가까웠다.
-쾅쾅!
“아버지! 아악!”
“멍청한 것.”
그 한마디 말만 남긴 채 공작은 매정히 뒤돌아섰다.
* * *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평온하게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비껴든 햇살이 루안의 눈가를 찔러 댔다.
커튼을 쳐 줘야 하나?
한편에서 읽고 있던 마법서를 덮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바스락거리며 루안이 뒤척였다. 나도 모르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숨을 참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무의미하게 루안은 곧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기지개를 켜고 부스스한 눈을 떴다.
그리고 요 며칠처럼 가장 먼저 주변을 훑었다.
“일어났어요?”
“폐하! 또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나를 발견한 루안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 이제 정말 다 나았어요. 이렇게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하지만 폐하는 바쁘시고…….”
“루안이야말로 걱정 말아요. 나도 이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상처는 어때요?”
“다 나았어요!”
아직 아물지 입가를 크게 벌려 이야기하다가 루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까지도 많이 따끔거리는 모양이었다.
다 나았다면서.
“헤헤, 이건 어제 빵을 한 입에 먹으려고 입을 잔뜩 벌리다가 상처가 더 벌어지는 바람에…….”
나는 어설프게 웃는 루안을 따라 미소 지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았을 리가.
“루안, 아프면 내게 꼭 말해 줘요.”
“네! 물론이죠.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요, 진짜!”
조금이라도 날 원망하면 좋을 텐데.
나 때문에 다친 거라고 조금이라도 나를 탓해 주면…….
나는 다가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루안, 너는 그럴 아이가 아니지. 씩씩하고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
루안의 말간 눈에 죄책감이 어린 내 모습을 담아 주기는 싫었다. 나는 일부로 더욱 활짝 입매를 당겨 올렸다.
* * *
“내가 요즘 황후궁 안에서도 시녀들이 기거하는 숙소를 더 많이 찾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설마 아픈 아이를 상대로 질투를 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렇다면?”
루안을 만나고 나오니 긴 복도에 하드엘이 서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가 황후궁 서재에 있으면 서재로, 침실에 있으면 침실로 그는 그렇게 늘 나를 찾아왔으니까.
“그렇다면……. 음.”
“무엇을 고민하는 것이오? 앞으로는 나를 더 많이 봐 주겠다 말하면 되는걸.”
그와 함께 여름빛을 머금은 산책길을 천천히 걸으며 울적한 기분은 잠시 잊고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에스타란토에 관한 일도, 황실에 관한 일도, 공작가에 관한 일도 아닌 오로지 그와 나의 이야기를.
사소하고 일상적인 대화는 지루할 틈 없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눈 안에 담긴 짙어진 녹음을 보고, 강한 햇빛에 더 밝게 반짝이는 백금발의 머리칼을 보았다.
때때로 풀 내음이 섞여 불어오는 바람을 함께 맞는, 그 지나치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그와 함께여서 특별했다.
하기야. 그와 함께여서 좋지 않은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봄비를 피해 들어온 이러한 숲길에서 그의 손에 풀린 붕대를 감아주던 일이. 그 아주 오래전 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매일 지겹도록 해 온 일인데 어찌나 떨리던지, 닿은 곳은 손뿐인데 귓불까지 열기가 퍼졌었다.
그날 내린 봄비가 아니었다면 아마 금세 붉어진 얼굴을 들켰을 것이다.
그러니 비 맞는 걸 좋아한다는 말도 당시엔 거짓이 아니었지.
“폐하, 생각나십니까?”
“무엇이 말이오?”
“제가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런 숲길에서 폐하의 손에 붕대를 감아 드리지 않았습니까.”
뒷짐을 지고 걷던 하드엘이 멈칫했다. 어느 순간 단정한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그는 제자리에 섰다.
나도 하드엘을 따라 걸음을 늦추며 그보다 두 걸음 앞선 곳에서 멈추어 뒤를 돌았다.
“그때부터, 아니지. 화원의 다리에서 폐하를 처음 뵌 순간부터 저는 폐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래도록.”
당신은 영영 모를,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싱긋 웃자 하염없이 날 바라보던 하드엘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장난기를 담아 그런 하드엘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이제 좀 덜 서운하신가요?”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흙을 밟을 때마다 나는 자박거리는 소리는 그와 나 사이에 더 이상 좁혀질 거리가 없을 때까지 들려왔다.
그렇게 다가온 하드엘이 문득 자신의 한 손을 내 앞에 내밀었다.
“어떡하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나는 눈앞에 내밀어진 하드엘의 커다란 손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엇을 달라는 건 아닌 것 같고.
손을 잡자는 건가? 아니면 붕대를 감았던 손을 보여 주는 건가?
얘기 중에 갑작스럽게 내민 손의 의미를 쓸데없이 진중하게 생각하고 있자니 이를 떨치게 할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이 치료해 준 손이니 잡아 줘야지. 안 그렇소?”
“아, 역시 그쪽이었구나.”
“그쪽?”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그와 손을 맞잡았다. 더운 여름날에도 손 전체를 감싸는 부드러운 그의 온기만큼은 싫지가 않았다.
“그보다 폐하, 오늘 루안에게 가기 전에 정원 나무에 앉아 있는 알링을 보았는데 이전보다 조금 묵직해진 것 같지 뭐예요?”
“먹는 모이의 양을 보면 살이 안 찌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소?”
“네. 그건 그래요. 아! 그리고 또…….”
하드엘과 눈을 맞추고 걸으며 다시 하고팠던 말들을 쏟아 냈다.
정말 아무랄 것도 아닌 소식들.
그걸 듣는 하드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난 그것이 좋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사소한 손짓이, 날 보는 눈빛 전부가, 그저 하드엘 그가 나는 좋았다.
* * *
“폐하, 저 알링에게 모이를 주고 와도 될까요?”
“그래요. 침실 창가에 앉아 있을 거예요. 방금 보고 왔거든요.”
“네! 그럼 다녀올게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바로 돌아와요.”
“네에!”
복귀한 루안은 유독 신이 나 있었다. 다른 황후궁 시녀들이 무슨 일을 하려 하면 먼저 나서서 그 일을 가로챌 정도였다.
좀 더 쉬었으면 좋겠다 했을 때 그렇게나 간곡하게 거절하더니 정말 답답했나 보네.
나는 턱을 괴고 저 멀리 사라지는 루안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밝아 보여 다행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아물었다 해서 다 나은 건 아니겠지.
‘꾸준히 신경 써서 지켜봐야겠어.’
“황후 폐하.”
바람이 들도록 일부로 닫아 놓지 않은 서재 문 너머로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이 찾아온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공작가 때문이겠지.
“부인, 들어와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손한 자세로 내 앞에 섰다.
나는 넘겨 보던 문서를 덮어 두고 그런 그녀를 맞이하며 말문을 열었다.
“공작 쪽에서 다른 귀족들에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