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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10)화 (11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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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하드엘은 공작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넬슨 백작이 그런 하드엘의 뒤를 따랐다.

“폐하.”

텅 빈 복도에서 그의 보조에 맞춰 조용히 걷던 넬슨은 방금 나온 응접실을 흘끗 보더니 할 말이 있는 듯 하드엘을 불렀다.

그에 하드엘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말하거라.”

“공작님께서 베르토반 영지를 반드시 되찾아오려 하실 겁니다.”

“그래. 그러겠지.”

“네? 그럼 황후 폐하께서는 왜…… .”

“황후는 영지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했다. 분명 다른 것을 노리고 내게 이 일을 맡긴 것일 테지.”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애를 쓰는 넬슨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복도의 끝에 다다라서까지 넬슨은 도통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이라니요?”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하드엘은 황제궁 입구의 낮은 계단을 내려갔다.

넬슨의 물음에 대답한 건 그 이후였다.

“공작은 이제 나를 상대로 베르토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불러들일 거야.”

“네,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백작은 황제의 눈에 자신이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거기까지는 그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자들은 황후가 할 일에 곧 방해가 될 자들이지. 이보다 쉽게 공작의 편을 색출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는 공작님의 세력을 구분 짓기 위해……!”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런 전략을 짜낼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넬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후 폐하께서 폐하께 베르토반의 영지를 회수해 달라 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이 상황에 대한 단순한 보복인 줄 알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한순간 모든 흐름이 유리하게 뒤바뀌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지.”

넬슨은 감탄을 금치 않았다. 한편 하드엘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서 달빛만이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밤, 하드엘은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가 가녀리게 들려오는 풀숲을 지나쳐 황후궁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빠르지 않은 걸음에선 이상하게 초조함이 느껴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을 대할 때의 여유로움은 지금 그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넬슨, 황후는?”

아까부터 계속 감격하여 중얼거리던 넬슨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아, 그리고 루안 양은 먼저 도착해 치료를 받는 중이라 합니다. 다친 곳이 많으나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히 큰 흉은 지지 않을 거라 하더라고요. 물론 목숨에도 지장이 없다 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런데 황후는 어디쯤 왔다는 거지? 다친 곳은 없다 하더냐?”

“네. 무사하십니다. 방금 전 황궁 입구를 통과하셨다 들었습니다.”

하드엘은 무거운 숨을 뱉었다. 넬슨의 답에도 불안한 감정은 쉽사리 누그러지지 않았다.

눈앞에 플로리아 그대가 있어야 했다. 당신이 멀쩡하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함께 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이리 불안할 일도 없었겠지.’

하드엘은 방금 전보다 속도를 높여 걸었다.

진회색의 조끼 위에서 달빛을 머금고 빛나던 얇은 시계 줄이 빨라지는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한발 물러나 그 속도에 맞춰 걷는 백작의 발소리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어느덧 황후궁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기사들을 거느린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플로리아가 보였다.

“폐하, 저기 황후 폐하이십니다.”

“안다.”

황제를 발견한 기사들은 즉각 몸을 숙였다. 플로리아는 그들보다 한발 늦게 하드엘의 존재를 알아챘다.

플로리아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이던 그녀의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손부터 소매까지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순간 하드엘의 얼굴은 싸하게 굳었다.

그는 그대로 플로리아 앞으로 달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렸다.

“다친 것이오?”

“폐하, 루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야!”

“이건 제 피가 아닙니다. 루안은요? 루안은 괜찮습니까?”

하, 정말이지.

이 여인을 어쩌면 좋을까.

“치료 중이오. 상처가 깊지 않아 회복이 빠를 것 같더군.”

그 한 마디에 플로리아의 표정이 단번에 화사해졌다.

당장이라도 황후궁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그녀를 하드엘은 잠시 붙잡았다.

그는 플로리아의 손등을 쓸며 살며시 입을 맞추고, 그녀의 손안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두 눈을 감은 하드엘이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기다렸는지, 또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두려웠는지 당신은 알까?

“폐하.”

“이제 되었소. 들어가 보시오.”

아니. 몰라 주어도 상관없다.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난 그거면 돼.

멀어져가는 플로리아의 뒷모습 아래로 하얀 달빛이 쏟아졌다.

* * *

루안의 상태를 확인한 후, 매무새를 정돈하고 다시 그녀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 루안을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안정된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치료가 모두 끝나고 보니 다행히 하드엘의 말처럼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속상하고 분하긴 매한가지였지만.

“루안,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반창고투성이가 된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루안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꿈을 꾸는 걸까?

나는 그녀를 따라 애써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어 주었다.

그렇게 루안의 곁을 떠나 그녀의 방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그녀와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루안, 다신 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들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내가 나서 공작가의 목을 비틀고 숨통을 조일 것이다.

-달칵.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하드엘이 보였다.

“폐하.”

“그 신전 기사는 돌려보냈소.”

궁에 남아서 종일 마음을 졸였겠구나.

나는 황후궁에 다다랐을 때 마주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달려와 내 손 잡던 그의 모습을.

평소 같지 않게 차가운 피부 아래로 고스란히 전해 온 떨림이 아직까지도 선명했다.

난 그의 숨결이 닿았던 손등을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게 다정히 나를 바라봐 주는 지금의 하드엘과 마주 봤다.

회색빛 눈은 언제나처럼 여지없이 날 끌어당겼다.

“당신이 곁에 있어 다행이에요.”

“뭐라 하였소?”

“두 번은 말 안 할래요.”

나는 두 팔을 벌렸다. 피식 웃은 하드엘이 성큼 걸어와 내게 안겼다. 아니 으스러질 듯 껴안았다.

이쯤이면 되겠지 싶어 그를 밀어 내면 하드엘의 팔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숨이 막힙니다.”

“벌이오. 오늘 마음을 졸이게 한 벌.”

그렇게 말해 놓고 힘은 왜 풀어.

그의 허리를 꼭 감싸며 난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만 보면 힘이 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뭐든.

아까의 분노도, 훗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그의 따뜻한 품속에서 아스러졌다.

“루안을 걱정하느라 폐하께 도리어 폐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폐하.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폐하께서 저를 너무 여린 사람으로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닌가요?”

“황제에게 공작가의 베트로반 영지를 회수해달라는 명을 내리고 훌쩍 떠난 여인을 어찌 여리게만 보겠소?”

하긴. 그건 그래.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드엘은 갑자기 내 볼을 잡아 늘였다.

“그래도 앞으로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해 주시죠, 에스타란토.”

“느주시즈.”

놔주시죠. 그 한마디가 우습게 새어 나오자 하드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아 내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게 무슨 굴욕인가. 이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눈가를 찌푸리며 다시 놔 달라 말하자 그는 잡은 볼을 놓아 주는 대신 엉뚱하게 입을 맞춰 왔다.

살짝 닿았다 떨어진 붉은 입술을 빤히 보다가 나는 다시금 눈을 들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마주 본 하드엘의 눈은 어느 겨울날의 눈송이와 비슷했다.

손등에 맞닿으면 푸스스 허물어져 가는 새하얗고 시린, 하지만 더없이 찬연한 그런 눈송이.

아니다. 날 보고 저리 웃을 때면 꼭 봄 같기도.

* * *

“젠장!”

공작은 황제로부터 건네받은 칙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발을 세게 구르니 마차가 큰 돌이라도 밟은 것처럼 덜컹거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는 바닥에 조각난 채 버려진 종이 쪼가리를 노려보았다.

베르토반의 영지를 회수하겠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겠다, 이 말이지.

절대 빼앗길 수 없다. 절대!

차라리 다른 영지라면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르토반, 그곳은 절대 안 돼.

헤르안이 묻혀 있는 곳인 걸 알고 일부로 이곳을 노린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중요한 영지를 두고 이곳을 회수하겠다며 이따위 칙서를 내밀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황제나 황후나 어떻게 이렇게나 지독하게 악랄한지.

히이잉 하는 말의 울음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이내 터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밖에서 예의 바른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도착…….”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작은 제 손으로 직접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무리 황제라도 한 번 하사한 공작가의 영지를 회수하는 게 쉽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방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부들을 그냥 지나쳤다.

항상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은화 몇 닢을 챙겨 주던 그였다.

당연하게 이를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던 마부 둘은 괜스레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도 이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공작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한편 공작저의 입구까지 빠르게 다다른 공작은 뒤따라오던 집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법 없이 곧바로 명했다.

“오늘 안에 명단 하나를 보낼 것이다. 거기 적힌 귀족들에게 내가 찾는다는 연락을 돌리거라. 최대한 빠르게!”

“네, 알겠습니다.”

황제는 나의 처지를 너무 얕본 것이다.

레이샤의 일은 황제의 말대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당장 며칠만 지나면 시녀의 상처가 아물 것이고, 그렇게 상처가 아물면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쯤 자신의 뜻을 따라 줄 귀족 수십이 모두 함께 베르토반 영지의 통치권을 회수하는 칙서에 대한 항의서를 올리면 아무리 강한 황권을 지닌 황제라도 별수 없이 꼬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황후의 자리는?

이번 명령은 황제가 대놓고 공작가를 적대하겠다고 선포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든 황후의 자리를 공석으로 만든다 해도, 또 귀족들이 제 목숨을 걸고 레이샤를 황후로 지지한다 쳐도 어느 제국민이 두 팔 벌려 이를 환영할까.

이전과는 상황이 너무도 달라졌다. 레이샤에 관한 소문을 헛소문이라 여기게끔 만들 수 있는, 그런 때는 지났다.

베르토반의 영지를 회수하겠다는 황제의 명까지 가세한 마당에 제국민은 더 이상 나를 그리고 레이샤를 믿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플로리아, 그 여자를 향한 민심만 커져 가겠지.’

레이샤, 정말 네가 모든 걸 망쳤구나.

“레이샤는 어디에 있지?”

“아가씨께서도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가씨의 상태가 심각하여 의원을 불러야 할 듯싶습니다.”

“의원?”

공작은 레이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집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때린 것은 이쪽이니 의원을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뺨이 많이 부으셨습니다. 얼굴이 긁히고 입술이 터져 피도 많이 나시고요.”

“일단 내가 먼저 레이샤를 봐야겠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공작은 인상을 구겼다.

레이샤와 닮은 선한 눈매가 찌푸려짐과 동시에 주위에 옅게 자리 잡은 주름 또한 깊어졌다.

그는 이를 아드득대며 레이샤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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