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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09)화 (10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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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보람? 지금 보람이라고 했니? 플로리아, 너 같이 천한 몰락 귀족이 분수에 넘치는 야욕을 지니고 이리 무모하게 굴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그 본보기를 보여 줄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멍이 든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레이샤가 또박또박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지나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니. 나야말로 바라는 바지.

“기대해, 내가 너를…….”

“그래. 실컷 떠들어.”

여기 서서 태평하게 악담을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루안을 궁으로 보냈다고 하니 서둘러 돌아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무사하겠지. 무사할 거야. 어느 한 곳도 멀쩡하지 않아선 안 돼, 루안.

난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조그만 움직임이 전부였는데 앞에 선 레이샤는 또다시 크게 움찔했다.

이를 본 나는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부은 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내 손에 느껴지던 열기와 같은 것이 그 뺨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잘 알아 둬. 자신이 벌인 일에는 직접 대가를 치러야 해. 이렇게. 알았지?”

또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뒤늦게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세게 쳐 냈다.

밀려난 손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흘리자 반대로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치심. 레이샤의 얼굴 위로는 그동안 본 적 없는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그녀의 표정을 세세하게 비추어 주었다.

난 그런 레이샤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두 눈에 담고 뒤를 돌아 나갔다.

* * *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낡은 나무문이 닫히자 플로리아를 느리게 뒤따라가던 아델은 자리에 멈춘 채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단숨에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빛 속에 서 있던 레이샤의 옆으로 커다란 아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잠자코 있어야 할 거야. 폐하의 앞에 네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내지 마.”

레이샤를 빤히 응시하는 눈동자는 지나치게 위압적이었다.

한결같이 부드럽게 미소 짓던 입가에는 어쭙잖은 조소조차 띄워져 있지 않았다.

“아델 경이라 했던가요? 무례하게 굴지 말고 제발 황후를 따라 나가 주시죠?”

“폐하께서 너 때문에 다시 또 괴로워하실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널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지금.”

“하! 백마법사가 사람을 죽여?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돼?”

바닥을 보며 헛웃음을 치던 레이샤의 시선이 순식간에 아델에게 붙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고개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아도 무력한 건 그대로였다.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이어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목까지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놔, 놔!”

점점 레이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몸부림쳤다.

“아가씨!”

어느새 그녀 곁으로 달려온 잔느는 제 다리에 난 상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이샤를 마구 흔들었다.

숨을 헐떡이던 레이샤의 팔에 힘이 점점 빠졌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가 되어서야 원인 모를 압박감이 모두 풀렸다. 레이샤는 컥컥거리며 커다란 숨을 한꺼번에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백마법사라 사람을 못 죽인다고? 난 그런 건 상관 안 해.”

불규칙하고도 거친 호흡 사이로 태연한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 목소리는 이 오두막 안에 내려앉은 짙은 어둠을 닮아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델은 레이샤를 내려 봤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그게 뭐든 기꺼이 해, 난.”

무어라 말을 하려는 레이샤를 무시하고 아델은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아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닫힌 문만 바라보던 레이샤는 어느새 제 명을 다한 초 하나를 쳐다보았다.

겨우 주변의 어둠만 간신히 몰아내는 주제에 제 몸 하나를 다 녹여 심지를 태웠다.

마지막까지 검은 그을음을 피워 올리며 희미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것이 어찌나 미련한지.

힘겹게 호흡을 뱉던 그녀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기둥을 부여잡고 서 있어야 할 정도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그 웃음소리만큼은 크고 명랑했다.

‘내가 낸 염문설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구나?’

* * *

“공작.”

“예, 폐하.”

“이리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지?”

하드엘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마주 보고 앉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길었던 여름날의 오후.

그 시간 내내 공작만을 기다린 하드엘은 하늘이 어둑해지고서야 자신의 앞에 다다른 중년의 남자를 형형한 눈빛으로 훑고 있었다.

공작가의 휘장이 새겨진 브로치에서 올라가 답답할 정도로 조여진 흰색 타이를 보던 하드엘의 눈이 마침내 공작의 눈동자에 닿자 하드엘의 입가엔 그와 어울리는 오만한 웃음이 비껴갔다.

칸제로스 공작은 황제의 시선에도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칸제로스가에 걸맞은 고고한 품위를 내보였다.

이를 계속해 지켜보던 하드엘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그래, 내가 아는 공작은 이런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처럼 한없이 올곧고 바른. 그런 사람.”

“폐하, 송구합니다. 제 딸아이가…….”

“그런 사람이 그간 황후의 자리를 노리고 본심을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나도 깜빡 속을 뻔했지 뭔가?”

공작은 당황하는 법도 없이 곧바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를 뉘우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듯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딸아이의 일이라면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 여린 아이가 그런 짓을 벌인 것은 황태자비 내정자에서 파해진 이후 너무 큰 충격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한 번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빌면 용서가 되는 일인가? 황후의 앞에서 죽여 달라 빌어도 모자랄 것인데.”

“죽여 주십시오, 폐하.”

“그럼 그럴까?”

하드엘이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물었다. 한여름 느껴지는 냉기에 공작의 입가 주위로 순간 작은 파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작은 여전히 뻔뻔했다.

“딸아이를 위해 제가 대신 벌을 받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감당치 못하겠습니까.”

레이샤가 저지른 일에 적절히 선을 그으며 자신의 결백을 피력하는 일 역시 잊지 않았다.

하드엘은 그에 기꺼이 장단을 맞추어 주며 답했다.

“그래 그대는 무엇이든 해야지. 난 분명 공녀에게 경고했네. 황후에게 위협이 된다면 공작가 모두가 피를 보게 될 거라고.”

“폐하, 그건…….”

“그간 공녀가 벌인 일에 관여치 않았다 말하며 결백하다 우겨도 어차피 공작 그대는 그대의 딸과 운명을 같이하게 될 거라 이 말이야.”

“전 정말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모를 리가. 하드엘은 시종일관 거짓을 말하는 공작을 보고 조소했다.

제 딸을 버려서라도 가문을 지키고 싶은 건가. 아니면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 싶은 건가.

그도 아니면 둘 다?

플로리아, 그대의 말이 맞았다.

이런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의 위협이 아니라 가문의 몰락.

플로리아 당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이제는 알겠어.

“넬슨, 가져와라.”

“예, 폐하.”

하드엘의 명을 받고 잠시 나갔다 돌아온 넬슨의 손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넬슨은 공손히 그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문서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글씨는 도무지 선명해지지 않았다.

하드엘은 그런 공작을 위해 친히 그 종이 위에 적힌 중요 내용을 읊어 주었다.

“칙서이다. 칸제로스 공작, 남북부의 베르토반 영지를 회수하겠다.”

“지금 뭐, 뭐라 하셨습니까?”

평온하던 물가에 커다란 돌을 던진 듯 공작의 목소리에도 큰 파문이 일었다. 돌격적으로 변한 어조에는 당혹감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하드엘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되묻는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못 들었나? 남북부의 베르토반 영지에 대한 통치권을 회수하겠다고 했네. 이제부터는 황후가 따로 그곳을 다스리게 될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곳은……!”

“왜 말이 안 되지? 아, 공작부인의 무덤 때문인가?”

“정당한 사유가 없으니 부당한 처사라 생각되옵니다.”

“정당한 사유라……. 오늘 공녀가 외출한 황후궁 시녀 하나를 납치하고 폭행했다 하던데. 공작의 여식은 참으로 영악해. 어떻게 매번 이리 법망을 피해 악행을 저지르는 건지. 보고 자란 게 그건가?”

공작을 조롱하는 하드엘은 언제나처럼 지독할 정도로 냉정했다.

마주 본 상대를 하찮게 만드는 그 표정도, 태도도, 하물며 손짓도. 어디 하나 너그러운 기색이라곤 없었다.

숨을 죽이고 옆에 서 있던 넬슨이 심각한 상황 중에도 문득 황후의 곁에 있을 때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차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제 딸아이는 오늘 베르체늘 고아원에서 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공작의 얼굴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공작은 앞에 있는 황제가 거짓을 말할 리도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샤의 말보다 황제의 말이 더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문이 막힌 이유는 그래서였다.

여기서 함부로 말을 뱉었다가 훗날 황제에게 어떻게 약점이 잡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게 진실인지는 공녀에게 물으면 알 수 있겠지.”

‘레이샤!’

흔들리던 공작의 눈빛에 곧 노기가 서렸다. 그는 차마 황제의 앞에서 그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르고 있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공작을 보던 하드엘은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칙서를 집어 들어 공작에게로 다가갔다.

잠시 후, 공작의 어깨 위에서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나풀대며 공작의 구두코 위로 내려앉았다.

하드엘은 방금까지 칙서를 들고 있던 손으로 공작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 묵직함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공작 또한 작은 체격이 아닌데도 옆에 선 황제가 그를 왜소하게 만들었다.

곧이어 방 안에 비웃음 섞인 하드엘의 음성이 번졌다.

“재판정에 세워도 공녀는 벌을 받진 않겠지. 하나 지금 공녀가 재판에 출석까지 하게 되면 공작가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겠어? 다친 시녀가 버젓이 궁에 있는데 말이야. 내가 보기엔 공작이 몹시 곤란해질 듯한데. 안 그런가, 공작?”

“…….”

“이 영지는 이번 일을 조용히 넘기는 대가라 해 두지. 이만 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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