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절대 루안이어서는 안 된다는 내 바람은 그렇게 철저히 짓밟혔다. 나는 무너지는 다리에 힘을 주고 내달렸다.
넘어질 듯 위태롭던 걸음이 드디어 루안에게로 닿았을 때 난 그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루안을 안을수록 손바닥에는 찢긴 드레스 사이로 새어 나온 피가 묻어났다.
“누, 눈 떠 봐요, 루안. 나예요. 제발 루안…….”
루안의 볼을 어루만지며 나는 그녀를 불렀다. 내 손을 적신 피는 다시 그녀의 뺨 위에 묻어났다.
“루안!”
처절하고도 쓰라린 가슴을 쥐며 나는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무겁게 감긴 루안의 눈이 서서히 뜨여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가늘게 뜬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눈으로 날 바라보고 루안은 눈물을 흘렸다.
매번 나를 향해 웃어 주던 것처럼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잠시 후 터진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화, 황. 폐…….”
“말하지 말아요.”
나는 핏빛으로 물든 루안의 하얀 드레스 위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감췄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온몸이 피로 물든 그녀를 보니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잔혹한 이 광경 안에 루안이 있다.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괴로웠다.
내가 견뎌야 할 일이었는데.
“폐하, 저까지 눈물이 나겠어요. 이 애를 죽일 만큼 악하지 않았던 저를 탓해야 하는 건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바로 섰다. 새빨간 혀를 놀려 대는 저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증오보다 더한 살의는 사람을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만들었다.
“아델 경, 마차를 부르세요. 그리고 루안을 먼저 데리고 나가줘요.”
“폐하께서는…….”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나는 새하얀 망토를 벗어 군데군데가 찢긴 루안의 드레스 위에 그것을 덮어 주었다.
레이샤의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유모가 레이샤를 향해 이 상황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옅은 연갈색의 눈은 무구해 보일 정도로 맑았다. 이런 짓을 벌였다고는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공녀.”
레이샤는 코앞에 선 나를 보고 순간 흠칫했지만 역시나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황후 폐하께서 건방지게 굴지 않았다면 저 애가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을. 그러게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하셨어야지요.”
“황후궁 시녀를 폭행한 건 분수에 맞는 행동인가?”
“어머? 말을 바로 하셔야지요. 이곳은 궁이 아닙니다. 고로 저 아이도 황후궁 시녀가 아니지요. 저는 아둔하기 짝이 없는 귀족 영애에게 예를 가르쳤을 뿐입니다. 공녀를 보고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아이에게 매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있었을까요?”
이번에도 뱀처럼 간사하게 법망을 빠져나갔다 여기겠지.
미련하긴.
나를 보고 있던 레이샤는 보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일로 재판정에 세우시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내가 왜?”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내 앞에 서 있는 간악한 여자를 바라봤다.
한없이 여려 보이지만 또 한없이 흉악한 여자였다.
“예?”
“내가 뭣 하러 번거롭게 그런 짓을 해야 하지?”
레이샤는 들은 말을 되뇌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공허한 방 안에 퍼진 웃음소리는 한동안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그녀는 눈가를 휘며 혀를 끌끌 찼다.
“아, 저 영애는 참 불쌍하네요. 끝까지 폐하를 위한답시고 맞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데 이렇게나 쉽게 버림받다니. 아끼는 아이가 아니셨나 봅니다?”
약간은 아쉬워하는 표정까지 곁들이는 그녀를 보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어떻게 더, 무엇을 참으란 말인가.
“번거롭다는 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얼굴을 굳히고 다가가자 레이샤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내가 다시 거리를 좁히면 그녀는 또 그만큼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나는 레이샤의 벽이 등에 닿을 때까지 그녀를 몰고 갔다.
“불쾌하니까 다가오지 마시죠.”
고고한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림조차 없었다. 사람을 저리 만들어놓고도 그녀는 지나치게 평온하고 태연했다.
긴 속눈썹이 돋보이는 눈에서도 죄책감이나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의 존재 자체가 역겨웠다.
“지금 공녀가 나보다 더 불쾌할까?”
“불쾌하셨어요? 그렇담 다행이네요. 저 아이를 데려와 매질을 한 보람이 있으니. 아… 더러워. 버려야겠네.”
내내 싱긋거리던 레이샤가 문득 루안의 피가 튀긴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더니 인상을 확 구겼다.
“더러워?”
온몸이 빳빳하게 굳고 손발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나는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그녀의 드레스를 팽팽히 잡아 펼쳤다.
“꺅! 뭐 하는 거야!”
피가 묻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자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내지르며 드레스를 움켜잡았다.
그사이 잘려나간 드레스의 천 조각은 바닥에 살포시 떨어졌다.
“천박하게!”
씩씩거리면서 그녀는 퍼져 있던 드레스를 한데 모아 잘려나간 부분을 가렸다. 그래 봐야 떨어져 나간 프릴 장식은 볼품없이 덜렁였지만.
다시 품에 단도를 집어넣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껏 네 극악한 만행을 가만히 두고 본 이유가 뭐라 생각해? 재판정에 세워도 넌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 거니까. 이번에도 그럴 테고. 난 그런 헛된 일에 힘 빼는 건 싫거든. 그리고 이 시기에 재판정에 끌려오는 건 너도 손해 아니야?”
“나를 위해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똑바로 말해, 플로리아.”
드레스를 움켜쥔 손에 희미하게 푸른 힘줄이 돋아 있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물어 오는 걸 보면 솔깃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스로 재판정에 세워 달라 당당하게 얘기할 땐 언제고. 양심도 없게.
하긴. 너도 싫겠지. 벌을 받지 않더라도 재판에 가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을 거야.
“공녀, 우리 서로 여기에서 해결하고 끝내자. 루안을 저리 만든 이유가 내 시녀였기 때문이라 했지? 그런 이치라면 나도 너의 시중을 드는 이에게 이 분노를 풀어야 한다는 것인데…….”
아까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이샤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던 그녀의 유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겁먹은 어깨는 작게 떨렸고 안색은 파리했다.
그녀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양의 식은땀을 쏟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레이샤는 한동안 자신의 유모를 빤히 보았다. 내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착각인가 싶을 만큼 순간 어두워진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할래?”
그러나 곧바로 화사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사뿐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는 아까보다 한층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유모.”
“네, 아가씨…….”
“잠깐 이리로 와 볼래?”
“네?”
“어서.”
레이샤의 유모는 쭈뼛쭈뼛 걸음을 옮겨 레이샤와 나란히 섰다. 레이샤와는 달리 그녀의 눈은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파르르 떠는 손을 꼭 쥐며 두 눈을 질끈 감자 그녀의 주름진 눈 사이로 몇 방울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 다 들렸을 테니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레이샤는 옆을 보지도 않고 이제 됐냐는 듯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피차 깔끔히 서두르…….”
-짜악!
레이샤의 고개가 한껏 돌아갔다. 레이샤는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겨우 잡고 서더니 멍하니 뺨을 감싸 쥐었다.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지루한 적막을 먼저 깬 건 나였다.
얼얼한 손으로 나는 그녀의 입가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그리곤 그것들을 귀 뒤로 넘겨 정돈해 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내가 아끼는 아이를 저리 때려놓고 자신은 법으로 다스려 달라니. 너무 하잖아.”
“아가씨! 어쩜 좋아!”
뒤늦게 멀쩡하게 눈을 뜬 레이샤의 유모는 공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터진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어서. 고작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루안은 하얀 드레스 전체가 붉게 물들었는데.
“아픈가? 그러게 공녀. 이리 날뛰고 싶었으면 호위라도 세워 뒀어야지. 그럼 이 정도로 맞진 않았을 거 아니야. 아,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우니 그조차 데려올 수가 없던 건가?”
유모가 레이샤의 고개를 돌려 흐르는 피를 닦아 주려 했으나 레이샤가 그 손길을 쳐 냈다. 그녀는 부은 뺨을 내보이며 그제야 내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게 아니잖아!”
“왜?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냐고? 감히 칸제로스 공녀인 내게 이리 대해?”
“그러니까. 나는 아벨리움의 황후로서 일개 공작가 영애인 그대를 벌한 것인데 어느 누가 감히, 나를 탓할 수 있냐 이 말이야.”
나는 손을 뻗었다. 경악하던 레이샤는 순간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랑곳 않고 입술 근처를 닦아 내자 내 손에 묻어 있던 루안의 피 위로 레이샤의 피가 조금 묻어났다.
나는 분노하는 레이샤를 향해 그 손을 펼쳐 보이며 방금 그녀의 입술을 스치고 간 검지를 까딱였다.
“고작 이 정도로 이 난리라니.”
레이샤는 더 이상 듣고만 있지 못하겠는지 부들거리는 손을 올렸다.
있는 힘껏 내리꽂는 손이 내 뺨에 닿기 전에 난 그녀의 손을 쳐 내며 다시 부은 뺨을 후려쳤다.
연달아 들리는 짜악 소리는 그녀가 등지고 선 썩은 나무 기둥의 그림자만큼이나 또렷했다.
이번에 레이샤는 헉하고 숨을 몰아쉬며 저도 모르게 나온 기침과 함께 타액이 섞인 핏물을 토해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에 이후로도 사정없이 손찌검을 하자 옆에 있던 그녀의 유모가 울먹이며 나를 막아섰다.
“비켜 줄래요?”
손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를 억누르기 위해 다른 한 손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손바닥을 꾹 눌렀지만 오히려 화끈거리는 열기는 더욱 선명해졌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황후 폐하!”
“이러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누가 먼저 시작한 일인데.”
연신 콜록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레이샤는 시간이 흐르자 비틀거리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자신의 유모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더니 홱 밀쳐 버렸다.
“비켜!”
주저앉듯 넘어진 유모를 뒤로하고 레이샤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깜빡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앞으로 나왔다.
그녀의 유모가 간신히 벌려 놓았던 간격이 다시 좁혀지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많아 보이네?”
“악마, 틀림없어 너는 악마야! 에스타란토? 웃기지 마. 그따위 허접한 거짓으로 네 본성을 숨겨? 더러워, 퉤!”
-끼익.
“폐하!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아델이 다급히 달려왔다. 그는 내 어깨를 잡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곳곳을 살폈다.
“난 괜찮아요. 루안은요?”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기사들과 마주쳐 그쪽 편에 먼저 보냈습니다.”
루안의 이야기에도 아델은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이를 보고 앞에서 피식 웃어 대던 레이샤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아델을 쏘아붙였다.
“아까 뭐 하는 짓이냐 물었나요? 지금 내 꼴을 보고 그 말이 나오나?”
나는 어깨 위에 올려 있는 아델의 손을 내리고 얼굴에 튀긴 레이샤의 침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찢겨나간 드레스와 발갛게 부어오른 뺨, 피가 엉겨 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여전히 분노하고 있는 저 눈.
정말이지 볼품없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레이샤. 너는 스스로를 어디까지 끌어내리게 될까.
그리고 나는 너를 어디까지 망가뜨리게 될까.
“뭔 짓을 한 건 저 악마지!”
“일부러 루안을 끌고 온 흔적을 지우지 않고 남겼으면 그걸 보고 찾아온 내가 어찌 나올지 어느 정도 각오는 했을 줄 알았는데. 뭐, 이리 발악하는 걸 보니 공녀의 말마따나 매질을 한 보람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