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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07)화 (10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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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챙그랑!

유리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조각난 유리가 저마다 날카롭게 번쩍였다.

구슬 안에서 찰랑이던 푸른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바닥에 깔린 카펫은 점점 축축하게 젖어들어 갔다.

황후궁의 시녀 한 명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황함과 미안함이 가득 어린 표정으로 그녀가 울먹였다.

나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선물해 준 유리구슬, 아니 이젠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유리 조각에 잠시 닿았던 시선을 떼고 다급히 주저앉은 시녀에게 물었다.

“안 다쳤어요?”

“폐, 폐하. 제가 폐하의 물건을……, 죄송해요.”

“어서 일어나요.”

“하지만…….”

“난 정말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는 거죠?”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심하며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그녀는 기어코 떨어진 유리 조각을 모두 치우고 나서야 내 앞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시녀가 파랗게 물든 카펫까지 걷어 가자 유리구슬이 깨진 흔적으로 지저분했던 바닥이 금세 말끔해졌다.

이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 파편도, 예쁘게 반짝이던 푸른 액체도.

마음에 들었는데. 어쩔 수 없지.

손이 많이 오가는 책상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곳에다 둘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지만 그래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걸로 된 거라 생각하며 애써 위안을 삼기로 하였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에게는 따로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

나는 방금까지 유리구슬이 올려 있던 책상을 보았다.

유난히도 벌건 석양 아래 창밖 커다란 나무가 책상 위에까지 자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쌓인 책들 위로 내려앉은 그림자는 특히나 굴곡져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을 내다보았다. 저무는 해가 어스름 속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덩달아 그 색으로 물든 구름은 느릿한 바람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움직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루안이 올 때가 지났는데 왜 이렇게 늦지?

분명 낮까지 돌아온다고…….

“폐하!”

그때였다.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땀에 흠뻑 젖은 부인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기 없이 바싹 마른 눈을 한 그녀는 어쩐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부인!”

“루, 루안……!”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그녀는 힘겹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루안.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그 목소리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듣고 나니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부인의 입에서 저리도 급하게 루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불쑥 찾아온 이유 없는 공포와 초조함에 나는 들썩거리는 백작 부인의 어깨를 꼭 잡고 물었다.

“부인, 루안이 왜요?”

“루안이 끌려… 끌려간 것 같습니다.”

루안이 끌려가?

잘못 알았을 것이다. 뭔가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어머니를 본다며 기쁘게 웃으며 황후궁을 나섰던 루안이었다.

말도 안 돼.

“끌려가다니요. 루크아트 마을에 간다던 아이가 도대체 누구에게 끌려갔단 말입니까!”

부인은 말을 잇기 위해 잠시 동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거친 숨소리가 섞이지 않은 그녀의 목소리는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욱 떨리고 있었다.

“공녀가 오늘 감시자들의 눈을 따돌리고 외출을 했다 합니다. 첫 번째 행선지는 베르체늘 고아원이고 그곳에서 나온 다음엔 루크아트 마을로 난 길을 찾았다고 해요. 뒤늦게 이를 파악하고 쫓은 감시자들이 그 길에서 혼령의 꽃과 바바루아가 담긴 봉투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행적이 끊겼고요. 이 일을 어쩌면 좋죠, 폐하? 아무래도 루안이…….”

“그러면 루안은요? 루안은 어디로 갔는데요?”

“모르겠습니다. 정황상 공녀가 루안을 데려간 듯하여 제가 루안을 찾아 달라 했으나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합니다. 지금까지도 들려온 소식이 없고요.”

루크아트 마을로 난 길, 혼령의 꽃, 바바루아가 담긴 봉투.

이 세 가지만으로 공녀는 루안과 함께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백작 부인이 다짜고짜 달려와 루안이 끌려갔다 주장한 이유를 알았다.

공녀가 루안을 납치했다.

나 때문에. 레이샤는 나 때문에 루안을 끌고 갔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주변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리기 시작하자 안개가 낀 듯 시야가 부옇게 변했다.

루안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아이가 다친다면 나는…….

“폐하, 황후 폐하!”

“황후!”

연달아 들려오는 백작 부인의 목소리 사이에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하드엘. 날 찾아온 그가 내 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차올랐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울 때가 아닌데.

지금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 건데.

하드엘은 나보다도 절망에 빠진 눈으로 나의 젖은 눈을 담았다.

그사이 짙어진 노을빛은 그의 회색 눈동자까지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더욱 슬프게.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쓸었다. 볼을 타고 흘렀던 두어 방울의 눈물은 그의 손길에 자취를 감추었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보시오.”

“루안이, 제 시녀가 공녀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제 탓이에요, 저 때문이에요.”

그는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내게 차분히 읊조렸다.

“울지 말고 기다리고 계시오. 기사들을 풀어 내가 어떻게든 그 아이를 찾아 주겠소.”

그 단단한 말투에 도리어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남은 슬픔을 삼키며 눈물을 그쳤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내가 루안을 찾아야 한다.

“아니요, 폐하. 제가 지금 당장 루안을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부인, 아델 경을 불러 줘요.”

“네, 알겠습니다.”

“플로리아.”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하드엘은 이런 내가 걱정되는지 마지막까지 내 손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제가 아끼는 아이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어요.”

“플로리아.”

두 번째 부름에 나는 그와 마주 봤다. 그렇게 시선을 맞추고서 방금 전 날 다독이던 그처럼 단단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해나갔다.

“다칠까 염려는 마세요. 일부로 제가 아닌 루안을 끌고 간 공녀입니다. 제게 해를 끼칠 일은 없습니다.”

“내가 가겠소.”

“아니요. 폐하께선 궁에 남아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 * *

“폐하, 황후궁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방금 전 황후 폐하께서 신전 기사와 함께…….”

“넬슨, 조용히 기사들을 풀어라. 루안이라는 시녀를 찾아내야 해.”

황후궁에서 뭔지 모를 소란이 일었다. 급히 궁을 빠져나가는 황후를 발견하고 넬슨은 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 이유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뒤이어 하드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황후궁에서 나왔을 때 넬슨은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으려 했다.

하지만 대답 대신 자신에게 내려진 명에서 그는 소란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루안이면……! 그 아이가 사라졌습니까?”

“한 가지 더.”

하드엘은 이번 역시도 대답 대신 명을 내리려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멀어지는 플로리아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형체가 희미해질수록 귓가에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옅어져 갔다.

“공작을 불러라, 당장.”

* * *

“여깁니다.”

나는 아델을 따라 잡고 있던 말고삐를 당겼다. 길이 잘든 말은 뜻을 알아듣고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조급한 마음을 따라 빠르게 다그닥거리던 말발굽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눈에 보이는 혼령의 꽃을 주워 들었다.

목이 부러진 꽃은 내 손안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침까지 새하얗던 꽃잎도 생기를 잃다 못해 죄다 지저분하게 짓뭉개져 있었다.

“어디로 간 걸까요.”

루안. 제발 무사히 있어 줘.

제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너저분한 꽃만 멍하니 바라보자 아델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지금 내게 위로가 될 순 없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욱더 메말라 가고 있었다.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찾아야 해요. 내가 이쪽을 볼 테니… 어?”

“왜 그러십니까, 황후 폐하?”

루크아트 마을이 아닌, 어두운 숲으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길 위에 풀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었다.

내 눈에 띈 것은 그 길의 가운데에 풀이 눌린 자국이었다. 묵직한 무언가를 바닥에 끌고 간 것처럼 풀숲이 헤집어져 있었다.

“일부러 흔적을 남긴 거야.”

“네? 흔적이라니요?”

“가요, 경.”

나는 서둘러 안장을 갖춘 말에 다시 올라탔다. 말고삐를 단단히 쥔 채 그것을 잡아끌자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음침한 숲속에 있으면서도 빛이라고는 한 점도 새어 보내지 않는 그런 오두막집이었다.

황급히 말에서 내려 오두막의 문고리를 당겼다. 흔한 잠금장치 하나 없는 걸 보면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집 같았다.

역시. 문고리가 쉽게 돌아갔다.

예상대로라면 루안은 이곳에 있을 것이다. 레이샤가 내게 남긴 흔적대로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끼이익. 낡은 오두막집의 나무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었다.

“이제 오셨어요?”

어둠 속에서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치게 환한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와 닿았다.

나는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자 날 이곳으로 데려온 그녀의 이름을.

“레이샤.”

뒤따라 들어온 아델에 의해 오두막의 문이 쾅 닫히자 간신히 방 안을 밝히고 있는, 몇 안 되는 초가 바람에 일렁였다.

“직접 보여 드리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시자들을 붙이셨다기에 좀 더 빨리 찾아오실 줄 알았는데.”

희미한 빛에 기대어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레이샤는 촛대 옆에 서서 마치 이 상황을 즐기듯 여유롭게 빈정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레이샤의 뒤로 끔찍한 몰골을 한 여자가 팔을 늘어뜨린 채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폐하,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루안일 리 없어.

아니야.

저 사람이 루안일 리가 없어.

“참 충직한 사람을 곁에 두셨습니다. 어찌나 미련한지 아무리 매를 들어도 폐하를 욕보이는 말은 일절 하질 않더군요? 덕분에 재미를 보진 못했습니다.”

“…….”

떨리는 손을 꽉 쥐고 한 발짝 다가갔다. 여자의 팔을 타고 흐른 핏물이 손끝에 맺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얼마나 그리 있었는지 이미 바닥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다.

목에서부터 울컥 치솟는 슬픔을 억누르며 두 발짝 다가갔다. 감은 눈 주위로 자줏빛 멍이 든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붓고 할퀸 자국이 선명했다.

피로 엉킨 머리카락 사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머리핀이 반짝였다.

점점 거리를 좁혀갈수록 여자의 행색이 뚜렷해졌다.

루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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