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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06)화 (10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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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저 애지?”

“네, 맞습니다.”

“이렇게 보니 알겠네. 항상 황후 옆에 딱 붙어 있던 애야.”

레이샤는 턱 끝을 살짝 들어 제과점 앞에 있는 루안을 보았다.

제과점의 주인이 바바루아를 갈색 봉투에 담아 건네주니 그녀는 환한 미소를 띠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값을 치르기 위해 주섬주섬 돈을 꺼내는 그녀를 보며 레이샤는 혀를 찼다.

“황후가 아끼는 시녀라. 하필 자기와 같은 처지의 아이를 가장 아낄 게 뭐람. 가여워라. 몰락 귀족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나?”

그녀는 루안을 계속해서 훑었다. 위아래를 느릿하게 오가는 눈길에는 측은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딱한 처지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황후궁 시녀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될 텐데. 저 애도 참 안 됐어.”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루안은 제과점을 벗어나 루크아트 마을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유독 사람이 없는 곳을 알아서 찾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를 보던 레이샤는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유모 알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아가씨…….”

“나도 안타까워. 그런데 어쩌겠어? 유모는 차라리 내가 말라 죽길 바라는 거야?”

“그런 무서운 말씀 마세요!”

“그러니까 내 뜻을 따라 줘. 그럼 아버지께 그동안 내 소식을 일러바친 일 모두 용서해 줄게.”

어느새 루안은 인적이 없는 외진 길가에 들어섰다.

레이샤는 답이 없는 잔느를 보고 조용히 입매를 올리더니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긴 드레스가 좁은 길 양옆에 높게 자란 풀을 스쳤다. 그녀의 걸음은 평소와 달리 재빨랐고 조금은 과격했다.

점점 루안의 옆으로 다가가면서도 레이샤는 걸음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앗!”

레이샤가 제 몸으로 루안의 어깨를 세게 쳐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루안은 넘어졌고 바바루아가 담긴 갈색 봉투와 꽃다발은 흙바닥에 떨어졌다.

과일 퓌레 크림이 묻은 종이봉투는 금세 색이 변해 갔다. 봉투의 군데군데가 어두운 갈색으로 젖어 들고 있었다.

바바루아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건 저 멀리 날아간, 에클리오 제과점의 상표가 새겨진 덮개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루안은 부딪친 어깨를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리다가 흙이 묻은 꽃다발이 한 여자의 구두 아래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 황급히 손을 뻗었다.

“폐하께서 주신 혼령의 꽃이…….”

“어머, 미안해요.”

머리 위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그 아래에 비웃음이 짙게 깔려 있는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루안의 눈에 점차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공녀님? 어떻게 여기에…….”

“안 다쳤어요? 어떡해, 아프겠다. 미안해요.”

“설마 지금 일부로 치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레이샤는 루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루안은 그 손을 잡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민 손을 절대 잡지 않으리라 예상한 레이샤는 여유롭게 뻗은 손을 내려 그녀의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당황해 눈만 끔뻑이던 루안은 그사이 잽싸게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손이 허공을 떠돌자 레이샤는 뻗었던 손을 거두며 숙인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루안의 미련하고도 가여운 행동에 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거렸다.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황후를 위해 저리 나오는 꼴이 한심했다.

“내가 미운가 봐요? 소중한 황후 폐하를 괴롭혀서 그런가?”

“공녀님은 정말 나쁜 분이세요.”

경멸하는 듯한 어투. 황후와 어쩜 저리 똑같은지. 그 말도 안 되는 건방에 레이샤의 얼굴은 단숨에 굳어졌다.

한여름 쏟아지는 태양 빛을 머금은 연갈색의 눈동자엔 더 이상의 동정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레이샤는 루안의 등 뒤로 고갯짓을 해 보였다.

무슨 뜻인지 알 리 없는 루안은 그저 레이샤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꽃다발을 줍기 위해 몸을 낮췄다.

“이런.”

루안의 손이 꽃다발을 엮은 리본 끈에 막 닿으려던 찰나 레이샤의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새하얀 꽃잎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짓이겨진 혼령의 꽃은 본래의 형태를 잃고 자신의 꽃잎 색과 닮은 새하얀 구두 아래에서 망그러져 갔다.

“어, 어떻게 이런 짓을…….”

루안은 너덜너덜해진 혼령의 꽃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읊조렸다. 두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폐하께서 주신 꽃이었다. 어머니에게 바쳐야 할 꽃이었고. 공녀가 망가뜨릴 만큼 하찮은 꽃이 아니었다.

루안은 분노했고 흐르는 눈물이 의미하는 것 또한 그것이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자 손 전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루안은 공녀에게 따지기 위해 고개를 바짝 들었다. 왜 저 꽃을 망가뜨린 건지 그 이유라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들끓는 분노는 불쑥 검은 천이 얼굴 전체를 덮어 왔을 때 온몸에 소름이 좍 돋을 정도의 공포로 변하였다.

“황후가 이상한 짓거리를 해 대지 않았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악!”

깜깜해진 시야 속에서 루안은 발버둥 쳤다.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쓰며 살려 달라고도 외쳐 보았다.

하지만 주변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도움을 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루안을 제외하면 이 길에 있는 사람은 레이샤와 잔느 그 둘이 전부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려 할수록 매캐하고 쌉쌀한 냄새만 목구멍 안에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루안의 행동은 점차 둔해져 갔다.

레이샤는 팔짱을 끼고 서서 힘이 빠져 쓰러져 가는 루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안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니 그제야 레이샤의 시선이 떨어졌다.

“가여워해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레이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자 쓰러진 루안을 잡고 있던 잔느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잔느는 자신의 품에 기대어 있는 루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맥없이 늘어진 루안의 팔이 좌우로 흔들렸다.

“아, 아가씨…….”

자신의 발아래서 망가진 새하얀 꽃을 내려 보던 레이샤가 한 걸음 물러났다.

꽃 목이 꺾인 채 널브러진 모양새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누구처럼.

미간은 일그러졌지만 레이샤의 입가에는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는 기대감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앞으로 망가질 황후에 대한 기대감을.

레이샤는 저 꽃처럼 짓이겨질 플로리아의 얼굴을 기대하고 있었다.

드레스를 살짝 드는 우아한 몸짓과 함께 그녀는 몸을 돌렸다.

“유모, 데려가자.”

* * *

심지가 타들어 가고 초에서는 촛농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녹아 흐른 기름은 촛농 접시에 떨어져 금세 하얗게 응고되었다.

창 하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저를 태워 가며 빛을 뿜고 있는 그 초를 레이샤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약을 너무 과하게 썼나?”

굳은 촛농이 쌓이고 또 쌓였다. 레이샤는 루안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으윽! 읍!”

마침내 루안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루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레이샤는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을 빼주었다.

“일어났어요?”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당장 풀어 줘요!”

떨리는 목소리로 루안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계속해서 들리는 불쾌한 소음에 인상을 구긴 레이샤가 루안의 앞에 다가가 멈춰 섰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루안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건 잘못된 행동이에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헝클어진 머리카락 끝에 간신히 매달린 머리핀이 대롱거렸다.

그걸 발견한 레이샤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황후에게 날 벌해 달라 할 건가요? 나는 공녀를 함부로 노려보는 불손한 귀족 영애에게 바른 예의를 가르쳐주려는 것뿐인데.”

“제게 도대체 왜 이러세요?”

“질문이 틀렸어요. 누구 때문에 이곳에 이렇게 붙잡혀 있는지 그걸 궁금해해야지.”

타오르는 촛불이 연갈색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고요함을 즐기는 건지 그게 아니면 루안의 답을 기다리는 건지 레이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적막 속에서 레이샤의 눈동자 위에 비친 촛불만이 요란스럽게 일렁였다.

루안은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도 의자에 묶여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덜커덩 소리가 연이어 들리자 레이샤의 입꼬리가 다시금 올라갔다.

“황후의 시녀니까. 황후 때문이에요. 내가 당신을 끌고 온 이유.”

황당한 답에 루안의 말문이 막혔다. 공녀의 모든 행동에 이제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 제 볼에 닿는 손길조차 불쾌했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요. 황후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마주할 일은 없었겠죠.”

루안은 묶여 있는 손을 대신해 고개를 홱 돌려 볼에 닿은 레이샤의 손을 쳐 냈다. 그리고 이를 바득 갈며 눈물이 마른 눈을 번득였다.

“도대체 황후 폐하께서 무엇을 그리도 잘못하셨나요? 왜 공녀님 같은 분 때문에 폐하께서 상처를 받으셔야 하는 거죠?”

“상처라……. 플로리아가 아주 충직한 시녀를 두었네.”

“아벨리움의 황후 폐하이십니다. 함부로 말을 낮추어선 안 될 분이세요!”

숨이 넘어갈 듯 킥킥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레이샤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그렇게 우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쉴 새 없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살아서 여길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나 봐요?”

고개를 든 레이샤의 눈가 주위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선한 눈매에는 간특한 미소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루안을 보는 동시에 레이샤의 얼굴은 한순간 완전히 일그러졌다.

레이샤는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그녀는 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루안의 뺨을 후려쳤다.

헐렁한 팔찌에 엮인 보랏빛 수정의 날카로운 면이 루안의 얼굴을 긁고 지나갔다.

“많이 아프겠다.”

고개가 돌아간 루안은 멍하니 나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비릿한 핏물이 입 안에 고였다. 터진 입술에서 새어 나온 붉은 피가 새하얀 드레스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부어오른 뺨의 얼얼함을 느낄 새도 없이 레이샤가 루안의 턱을 잡아챘다.

그녀는 노랫말을 속살거리듯 루안의 귓가에 다가가 기분 좋은 어투로 말을 건넸다.

“그 입으로 황후를 욕보인다면 내가 오늘 널 살려 보내 줄게.”

알겠다고 답하든, 끝까지 싫다고 답하든 이 흥미로운 제안은 황후가 이 아이를 찾는 시간 동안 자신을 충분히 기쁘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샤의 입가에 핏물보다도 비릿한 미소가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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