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잽싸게 균형을 잡은 아델 덕에 의자가 넘어가진 않았지만 우리 둘은 당황하여 의자 다리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서로 눈을 마주 봤다.
뒤로 넘어가지 않은 것에 안심하는 한편,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있는 그를 보니 몹시 웃겼다.
처음엔 헛웃음으로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웃음소리가 커졌다.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알죠? 이렇게 웃을 상황이 아니에요.”
“웃고 계신 건 폐하십니다.”
아델이 다칠 뻔한 상황인데 이렇게 웃으면 안 되지 안 돼.
나는 진정하려 고개를 젖히고 눈가를 꾹 눌렀다. 조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니 다칠 뻔한 주제에 싱글벙글 신이 나 있는 아델이 보였다.
“괜찮은 거 맞죠?”
“네, 보시는 것처럼 멀쩡합니다. 그보다 폐하께서 공녀를 만나고 온 그날보다 기분이 한결 좋아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내 편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덕분이죠.”
“폐하의 편에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포함되어 있냐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델을 보았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할 답은 아닌 것 같은데. 편은 드는 사람 마음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왜요? 아델 경, 그대는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 그대만큼은 내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의 대답은 눈에 보이듯 훤했지만 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아델은 농담 섞인 어투를 알아채고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저는 폐하의 적이 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어떤 일을 하셔도 전 폐하의 편일 수밖에 없어요. 신전 기사단이니까.”
“내 친구 아델은 어디 가고요?”
“물론 그게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날 가만히 날 바라보던 아델은 소리 없이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까요?”
* * *
“확인하러 왔습니다.”
마력 훈련이 끝나고, 신전 근무를 하러 아델이 돌아갔다.
그 사이 하늘은 노을빛으로 영롱하게 물들어 갔고, 그런 수국색의 하늘을 보며 길을 걷던 나는 금세 하드엘의 침실 문 앞에 도착해 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나를 보러 온 게 아니고?”
꽃을 확인하러 왔다는 말에 내 앞에 서 있던 하드엘이 나와 시선을 맞추며 물어왔다.
“물론 그것도 맞지요.”
자연스레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하드엘은 그 유리 화병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유리 화병은 침대 바로 옆 원목 탁자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만발한 데르카바가 방 안을 장식하니 딱딱하고 삭막했던 분위기가 한결 산뜻해졌다.
저녁노을을 품은 데르카바 꽃잎은 느낌이 꽤 색달랐다. 햇빛 아래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예쁘네요. 노을빛을 머금으면 이런 느낌이구나. 근데 왜 화병을 여기로 옮기셨어요?”
화병 옆에는 내가 보낸 카드도 놓여 있었다. 하드엘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짓더니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 꽃을 보면 당신이 생각날 테니까. 가까이 두는 게 내겐 득이지.”
낮게 퍼지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향내가 묻어나는 듯한 저 달콤한 한 마디도.
“역시 꽃을 선물하길 잘했네요.”
우린 침대 위에 앉아 데르카바를 구경하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르카바의 금빛 꽃잎이 언제까지 저렇게 싱싱하게 유지될 수 있냐 묻기에 정원사에게 들은 대로 답을 해 주었고, 물을 언제 갈아야 하는지 묻기에 직접 물을 갈아 주실 생각이냐 반문했다.
내가 적은 카드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내 앞에서 그가 카드의 내용을 읊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단순한 말이 오고 갔다.
호숫가 주위로 짙푸르게 우거진 녹음이 참 아름답다는 이야기, 올해 겨울 아벨리움에는 눈이 많이 내릴 거라는 이야기, 서랠 왕국과의 무역 체제 구축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
화젯거리도 참 다양했다.
근데 이상하지. 그와 나누는 이야기는 분명 즐거운데 어느 순간부터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손에 닿는 침구가 참 부드럽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단둘이 침실에, 게다가 한 침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아 버렸다.
하필 이 순간 가운만 걸친 그의 모습이 떠오를 건 또 뭐야.
“황후?”
“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한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챈 하드엘은 내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리게 했다.
허리를 감싸지 않은 왼손으로 내 턱을 잡고서 그렇게 그는 나의 시선을 잡아두었다.
혼란하던 마음을 뒤로하자 시야가 또렷해졌다. 눈을 끔뻑이며 쳐다보자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다정하게 물었다.
“나와 있을 때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노을의 선연한 붉은빛이 스민 이 방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독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원목 협탁 아래로 드리워진 데르카바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다른 생각은 아닙니다.”
“다른 생각이 아니다?”
귓가가 간질거려 몸을 떼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가까이 다가오는 그 때문에 한 치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입을 열 때마다 하드엘의 숨결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숨결이.
“그럼?”
“놓아 주시면 말씀해 드릴게요.”
“말해 주면 놓아 주겠소.”
“폐하 생각이요. 폐하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턱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 내기 위해 그의 팔을 스스로 잡아 내렸다.
딱히 힘을 주고 있지는 않았던지라 단단한 팔은 아주 손쉽게 움직였다.
하드엘은 뭐든 꿰뚫을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의뭉스럽게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건대 내가 말한 그의 생각이라는 게 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궁금하십니까?”
정곡이 찔렸는지 내 물음에 픽 웃은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귓가를 간질이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시간을 끌며 장난을 쳐 볼까 생각했지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하드엘을 보고선 그 생각을 그만뒀다.
나는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그의 팔목을 잡았다. 그렇게 그와 거리를 좁히고 아주 잠시 동안 그의 입술을 훔쳤다.
“이런 생각이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깜짝 놀랐는지 하드엘은 한동안 고요했다.
난 싱긋 웃으며 그의 뺨을 쓸었다. 노을빛이 어린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방 안을 장식하고 있는 데르카바보다도 더.
“플로리아.”
하드엘은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한 이곳에선 창가 너머의 소리가 세밀하게 들려왔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름 모를 풀벌레 울음소리까지. 그 사이에 하드엘의 말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자 그는 부드럽게 뒷머리를 감싸며 방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좁혀 왔다.
“방금 전 입맞춤을 되돌려 주려 하오.”
그 한 마디만 남기고서 그는 내 입술 위에서 자신의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마지막인 듯 애절한 움직임은 집요했다. 그렇게 부드러운 입맞춤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졌다.
잠시 그의 입술이 떨어지면 그 사이 나는 달뜬 숨만 토해 냈다.
그럴 때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하드엘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숨 쉴 틈만 주며 입 안을 탐하던 그가 어느새 위에서 날 내려 보고 있었다.
내 뒤를 받쳐주던 건 그의 손과 팔이 전부였던 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침대에 등을 대고 눕게 된 것이었다.
“폐하!”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다시 입을 맞추려 다가오던 하드엘이 멈칫했다.
냉한 눈을 노곤하게 뜨니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드엘이 이유를 묻듯 눈썹을 치켜떴다.
“배가 고파서요.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요, 저.”
“배가 고프다고?”
내 말에 웃음을 터뜨린 그는 자신의 손으로 등을 받쳐 조심스레 나를 일으켜 줬다.
내 입술에서부터 번진 붉은 자국을 지워 주는 손길은 한없이 느릿했다.
“여기에서 먹고 가시오.”
“아니요! 괜찮습니다. 더 이상 하다가는…….”
“?”
한다니 뭔 소리야!
풋. 또다시 하드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청량한 웃음소리에 불에 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신의 입술에 번져 있는 붉은 자국 또한 닦아 내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데려다주겠소. 그 정도는 괜찮겠지?”
최대한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일어나 조끼를 가지러 갔다.
하드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드레스를 꼭 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나는 황제궁을 빠져나와 그와 나란히 밤길을 걸었다. 오늘 밤 유독 더위가 심해진 건지 돌아가는 길 내내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네!”
“진짜 가 보겠소.”
“네!”
황후궁에 도착하고 하드엘은 아쉬운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 흔들며 그를 보내려 부단히도 애썼다.
그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 깊은숨을 토해냈다.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뱉는 것처럼 그렇게 긴 숨을 한꺼번에 뱉었다.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쿵쿵거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하드엘에게도 들리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가빠지던 숨소리와 섞여 들리던 입맞춤 소리. 게다가 익숙지 않은 묘한 분위기.
하드엘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나만 숨도 못 쉴 정도로 경직된 거야?
그새 붉은 기가 걷힌 하늘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올려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 깊은 밤이 아닌데도 별은 온 하늘에 가득했다.
후. 조그맣게 숨을 내쉬고서 나는 또렷하게 빛나는 별빛을 보며 한참 동안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 * *
어둑한 밤하늘을 보며 하드엘은 걸었다.
플로리아가 바라보는 하늘과 똑같은 밤하늘이었지만 그가 보는 하늘에는 그득히 빛나는 별이 아닌 플로리아가 있었다.
자신을 보며 웃던 그녀의 모습이 칠흑 같은 밤하늘에 그려지자 하드엘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띠어졌다.
플로리아. 언제나 자신에겐 봄꽃 같은 사람이었다. 한시도 변함없이.
그는 그녀의 고운 입술이 닿았던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달달한 향기가 여전히 입 안에 감도는 듯했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니, 실은 종일 함께하고 싶었다.
자신의 볼을 쓸어 주며 온화하게 바라봐 주던 모습도,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당황해하던 모습도 그게 뭐든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먼저 떠나는 건 그녀였고 붙잡는 건 자신이었다.
이번만큼은 귀찮게 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보내 주긴 했지만 뒤돌아서 곧바로 후회하는 것 역시도 자신의 몫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쉽게 보내 주는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하드엘이 돌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침대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플로리아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부터 달뜬 숨소리 하나까지 정교히 아로새겨진지라 몹시도 난처했다.
그녀의 손은 마력이라도 깃든 건지 닿은 곳마다 그를 뜨겁게 자극했다.
오늘같이 먼저 입을 맞춰 오는 날이면 자신도 그 입술을 물고 놓아 주고 싶지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고서 하드엘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저 멀리, 자신을 몹시 곤란하게 만든 여인이 달빛 아래에서 가늘고 하얀 목을 뻗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이라도 세는 건지 태연한 모습이었다.
먼 거리였지만 그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주변은 어둑했지만 이상하게 그녀만큼은 또렷했다.
하드엘은 그렇게 한참 플로리아를 지켜보다 다시 눈을 휘었다. 들끓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그는 미소를 띠고서 조용히 읊조렸다.
“예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