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정원사가 두고 간 카탈로그에는 다양한 품종의 꽃과 색의 종류, 꽃을 키우는 방법, 꽃말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상점에서 사용하는 상품의 안내서였지만 황실 정원에선 뭐든 구할 수 있으니 정원사는 이것을 보고 자신에게 필요한 꽃을 말해 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 적힌 글과 꽃의 실물을 그려낸 그림을 꼼꼼히 훑었다.
뭐가 좋을까. 하드엘에게 어울리는 꽃이라…….
모두 예쁘긴 했지만 확 끌리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며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긴 것도 수십 번, 이젠 읽은 페이지 보다 읽지 않은 페이지가 더 적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꼭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려 종잇장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었을 때였다.
열어 둔 창문으로 흘러온 바람에 제멋대로 책장이 팔락 넘어갔다.
그에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도 바람결을 따라 물결쳤다.
도래한 여름을 알리듯 피부에 닿은 바람에는 이전보다 훈훈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제 창을 열어 두면 꽃의 향기가 아닌 산뜻한 풀 내음이 진하게 실려 왔다.
나는 시야에 걸리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고 보니 봄이 끝났구나. 계절이 바뀌었어. 이곳의 봄은 길어서 참 좋았는데.
마침 듣기 좋은 새소리가 나른한 미풍에 함께 실려 왔다.
꽤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아 몸을 돌려 뒤를 확인하니 창가에 알링이 있었다.
“알링!”
손에 카탈로그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알링에게로 다가갔다.
보송보송한 붉은 깃털이 오늘따라 더욱 윤기 있어 보였다.
알링은 깃털을 쓰다듬자 이전보다 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넌 어떻게 매번 날 찾아오니? 게다가 하루 못 본 사이에 이렇게 더 귀여워졌어?”
그러고 보니 알링은 안 크는 건가? 작고 동글동글한 게 처음과 똑같다.
아, 어쩌면 이게 다 큰 걸지도.
-짹. 째액.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지저귀는 그 소리가 맑고 명랑했다.
난 알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항상 손안에 들어와 몸을 비비던 알링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링은 내 손에 들어오는 대신 포로롱 날아 창가 바로 앞에 심어진 나무의 잔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펼쳤던 손바닥을 거두며 자연스레 창가에 기대어 그런 알링을 지켜봤다.
알링은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여유롭게 제 날개에 얼굴을 비볐다.
때때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부리를 열면 노랫소리 같은 지저귐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언제든지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생각해 새장 안에서 키우지 않았지만, 정말 알링이 멀리 떠나 버린다면 어떨까. 그렇게 가 버리고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 손에 앉지 않고 날아간 알링을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제 하늘을 찾아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게 기쁜 일이기는 해도 나한텐 슬픈 일이 될 것 같았다.
“어떡하지, 알링? 갑자기 슬퍼졌어. 훗날 떠나더라도 가끔씩은 찾아와 줄 거지? 넌 길을 아주 잘 찾는 새니까.”
-짹!
그렇게 하겠다고 말해 주는 건가? 아니면 참견 말라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걸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실없이 픽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아진 하늘에 하얀 구름이 피어올랐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구름을 따라 햇빛은 그 농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찬란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짹, 짹.
알링의 소리를 듣고 시선을 낮추니 저 멀리, 하드엘과 함께 걸었던 산책길이 보였다.
그곳에 늘어선 나무들은 몇 달 사이 잎이 더 푸르고 무성해졌다. 산책길엔 그렇게 녹색 터널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계 중 가장 푸른 날이 왔구나.’
에스트라의 꽃도 곧 지겠지. 여름의 끝에 다다라서까지 피어 있는 것들도 있긴 하겠지만.
풀잎이 사르르 흔들렸다.
나는 손등 위로 비친 햇빛을 보다 괜히 한 번 손을 펴 보았다. 손가락 사이를 통과한 빛이 바닥에 퍼졌다.
다시 고개를 들자 짙어져 가는 여름빛이 고요히 두 눈에 담겼다.
세 번째 생에서의 첫봄은 갔다.
바야흐로 완연한 여름이었다.
“아!”
하드엘에게 어떤 꽃을 주고 싶은지가 번뜩 떠올랐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펼쳐 손가락으로 조그만 글씨를 짚어 가며 꽃 아래에 적힌 꽃말을 살폈다.
얼마 안 가 내 입가엔 환한 웃음이 번졌다.
‘찾았다.’
데르카바, 금빛 꽃잎, 나의 첫사랑.
마침 책 정리를 한다며 서재에 가 있던 루안이 돌아왔다.
“폐하, 서재 정리 끝났어요! 어라? 그런데 왜 창가에서 카탈로그를 보고 계세요?”
“알링이 찾아왔었거든요.”
나는 알링이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알링이 없었다.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간 모양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폐하가 계신 곳을 매번 이렇게 잘 찾아오는 걸까요? 너무 신기해요.”
“그러게요. 궁 주변에서 날아다니다가도 내가 있는 황후궁을 찾아오는 걸 보면 이곳을 제집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난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 말에 동의하던 루안이 손에 들린 카탈로그를 다시 보더니 알링의 이야기는 뒤로하고 물었다.
“원하시는 꽃은 찾으셨나요?”
“딱 마음에 드는 꽃을 찾았어요.”
“정말요? 어떤 꽃이요?”
“데르카바.”
루안은 가까이에 와 그림을 확인했다. 그리고 데르카바, 데르카바. 하고 머릿속에 외워 두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제가 지금 정원사에게 다녀올게요!”
“잠깐만, 꽃과 함께 적어 보내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는 도로 책상으로 가 카탈로그를 내려놓고 카드와 펜을 꺼내 들었다.
펜이 종이 위에서 서걱거리는 소리와 루안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짧은 말이었기에 글을 적는 데는 시간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뒤, 난 완성된 카드를 루안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그리고 루안.”
루안은 카드를 받아 들며 뒷말을 기다렸다. 나는 펼쳐진 카탈로그에서 또 한 종류의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도 부탁해요.”
루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가리킨 꽃을 확인하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울먹였다.
“폐하, 이 꽃은…….”
“맞아요. 혼령의 꽃이에요. 곧 어머니의 기일이라 루크아트 마을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잖아요. 루안, 그때 어머니께 가면 이 꽃을 전해 줘요.”
“폐하…….”
나는 손을 뻗어 루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빙긋 웃으며 그녀를 보았는데 오히려 이런 내 행동이 눈물샘을 더 자극한 모양이다. 루안의 눈에는 다시금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곧 그녀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폐하를 모실 수 있어 전 정말 행복해요. 아니,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
* * *
“폐하!”
황제의 집무실을 찾은 넬슨은 들뜬 목소리로 하드엘을 불렀다.
꽃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팔에 한가득 품고 있는 금빛 꽃다발은 움직일 때마다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그게 무엇이지?”
하드엘은 힘겹게 시야를 확보하며 다가오는 넬슨을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폐하께 드리는 것입니다.”
“뭐?”
백작이 내게 꽃을? 이번에 하드엘은 질색하며 백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너무하다며 이어진 넬슨의 뒷마디에 하드엘의 표정은 데르카바의 꽃처럼 만개했다.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황후가?”
그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흐뭇한 미소와 함께 풍성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금색 데르카바는 그의 머리색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꽃과 하드엘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렸다.
하드엘은 꽃 가까이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풋풋한 풀 향과 함께 플로리아의 고운 숨결에서 묻어나는 듯한 달달한 향내가 은은하게 퍼졌다.
져 버린 봄이 이곳에서 만개했다. 플로리아 당신 덕분에.
“침실 화병에 꽂을 꽃이라 하셨습니다.”
“침실 화병이라면 그 빈 화병을 말하는 건가?”
“네. 그 유리 화병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하드엘은 데르카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녀가 고른 것이 뭔들 아름답지 않겠느냐마는.
이건 뭐지?
뒤늦게 꽃 사이에 꽂혀 있는 조그마한 카드를 발견한 하드엘이 그것을 펼쳤다.
당신과 함께한 봄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데르카바, 나의 첫사랑에게.
하드엘은 손에 쥔 카드를 한참 동안 읽었다. 그저 읽고 또 읽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입가에는 점점 행복에 겨운 미소가 피어났다.
“넬슨.”
금빛 꽃잎이 비친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넬슨이 보기에도 더 이상 차갑지가 않았다.
닿으면 시릴 것 같은 저 피부도, 냉랭한 저 목소리도 여전했지만 눈빛만큼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넬슨은 기분 좋게 답했다.
“예, 폐하.”
“앞으로 침실 화병엔 계속 데르카바를 꽂아 두도록 해라.”
“계속이면 언제까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원히.”
하드엘은 꽃잎 끝을 조심스레 긴 손가락으로 쓸었다. 얇은 꽃잎은 바람에 흔들리듯 한들거렸다.
첫사랑. 하드엘은 낮게 읊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에스트라의 화원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플로리아.
나의 세상을 뒤흔든 여자.
당신의 존재가 나의 세상을 변하게 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당신은 나의 전부가 되었고, 어느새 나의 세상은 곧 당신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첫사랑. 그 한 단어로 부족한 나의 여인. 나의 황후.
* * *
하드엘은 꽃을 잘 받았겠지? 마음에 들었을까?
‘마력 훈련이 끝나면 직접 가서 물어봐야지.’
“폐하?”
“아! 미안해요. 뭐라고 했어요?”
아델이 날 몇 번이나 부른 모양이다. 저 멀리에 있던 사람이 어느새 가까이 와 내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고 있었다.
날 열심히 가르치는 아델 앞에서 딴생각을 한 게 미안해 어색하게 웃자 아델도 날 따라 싱긋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그냥 이것저것. 요즘 일이 많아서요.”
하드엘 생각을 하느라 멍해 있었다고 말하기는 창피해 말을 돌렸다.
아델은 내가 업무에 시달리느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여겼는지 잠시 쉬자는 말과 함께 마법서를 덮었다.
“아깐 장로님을 달래느라 혼이 났습니다.”
내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아델이 일부러 가벼운 이야기를 던졌다. 아까부터 내 기분을 살피고 있던 그가 신경 써 고른 주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델에게 괜히 더 미안해졌다.
하드엘! 왜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는!
“장로에겐 내가 언젠가 따로 가 봐야겠어요.”
“그 계단을 또 오르시려고요?”
“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신전 계단은 절대 다시 못 오를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장로와 황후궁에서 다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겠네요.”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쪽 뺨에 보조개가 옴폭하게 들어갔다.
“솔직히 저도 그 계단을 오를 때마다 죽을 맛입니다.”
방 안에는 아델과 나뿐이라 이야기를 엿들을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굳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소소한 하루를 보내니 기분이 좋았다.
평온한 일상,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주 보며 나누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
내가 바라던 나의 하루.
“장로에게 계단을 바꿔 달라 하지 그래요?”
“절대 제 말은 안 들으실 분입니다.”
“왜요? 둘이 아주 사이좋아 보이던데.”
“네?! 장로님과 제가요?”
아델은 믿을 수 없는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내 말을 부정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움직임에 나무 의자 다리는 작게 삐거덕 소리를 냈다. 의자가 기울어진 건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