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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01)화 (10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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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황후의 짓이었다. 황후가 제 입으로 추문을 퍼뜨렸다고 직접 말했으니까.

잠시나마 애써 잊고 있던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니 속이 울렁거렸다.

소문의 내용은 그녀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저런 내용의 소문을 들었으니 아버지께서 이리 나오는 건 당연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황제 폐하의 목소리와 공작가의 마차를 보며 수군거리던 제국민들의 목소리가 이제 동시에 머릿속에 울려댔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시선을 떨구자 피가 흘렀던 손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손이 자신의 처지만큼이나 처량해 보였다.

그녀는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아버지의 앞에서 떨리는 손을 감출 방법은 그뿐이었다.

“신전과 황실을 욕보인 두 얼굴의 공녀라며 제국민들이 떠들고 다니더구나. 황후가 받아야 하는 손가락질을 왜 내 딸이 받고 있는 거지?”

“실망시켜 드려 죄송해요. 하, 하지만 아버지. 그건 전부 황후가 절 깎아내리려 낸 소문이에요.”

레이샤의 대답에도 공작은 특별히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한 레이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간 네가 한 짓을 다 알고도 황후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역시.

‘그래. 아버지가 모르는 게 이상하지.’

이곳은 칸제로스 공작저. 아버지의 세상. 공작가의 사용인 모두가 아버지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유모조차도…….

“제가 가문에 누를 끼쳤어요. 아버지께서 벌을 내리시면 따를게요. 하나 황후의 앞에서 잘못을 빌라 하시면… 저 그것만큼은 못 할 것 같아요.”

공작은 노기를 억누르고 실소하며 레이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옷깃을 장식하고 있던 브로치의 은빛 테두리가 번뜩였다.

“아직 어리구나. 잘못이라 했느냐? 네 잘못이 있다면 그리 무모하게 굴다 황후에게 들킨 거. 그거 하나다. 황후의 앞에서 용서를 빈다면 그거야말로 가문의 치욕이지. 소문은 소문일 뿐. 황가라 해도 겨우 이런 일로 아벨리움의 공작가를 무너뜨리진 못한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공작의 입에서 나올 말만 초조하게 기다리던 레이샤가 그제야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저리 나와 주시니 다행이었다. 적당히 조그마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 답한 그녀는 거슬리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갈하고 일정한 구둣발 소리는 연달아 울렸다. 공작의 걸음이 멈춘 곳에 그가 던진 책 한 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 들며 그는 돌연 굳은 얼굴로 한 가지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재판을 열지 않고 소문만 퍼뜨린다? 뭔가 이상해.”

공작의 작은 말소리에도 하나하나 집중하고 있던 레이샤는 곧바로 답했다.

“재판정에 가도 처벌을 피할 테니 황후도 어쩔 수 없이 이리 나오는 걸 거예요.”

“아니, 널 자극하려는 게 틀림없다.”

“네? 자극이요?”

“당분간 조심하거라. 황제든, 황후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조심…….”

그 말이 어쩐지 아렴풋하고 먹먹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두 번 세 번 되짚었다.

“네 어리석음으로 우리 가문의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으니 일부러라도 자선 무도회에도 얼굴을 자주 비추도록 해라. 그렇게라도 네 책임을 다해.”

레이샤는 창가 앞에 놓인 책상으로 걸어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어쩐지 아버지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분노가 가신 듯 했다.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조심이라…….’

처음 듣는 그 말이 마치 위로처럼 여겨졌다. 아버지께서도 혹시 그런 뜻으로 내게 말씀하신 게 아닐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안다.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리 믿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견디지 못하면 정말 죽고 싶을 것 같으니까.

“네, 알겠어요.”

공작은 지친 듯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이만 나가라 손을 휘저었다.

“저, 아버지 그리고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늘 있던 일.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모두 아시게 된 이상 말해야겠지. 마른 침을 삼킨 레이샤가 시선을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황후의 자리가 저의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뭐?”

레이샤의 뜻밖의 물음에 공작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나야 했다.

무슨 해괴한 소리라도 들은 표정으로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서 다시 언성을 높였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 이만 나가 보거라. 벌어진 일들을 수습할 걸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니까.”

“황제 폐하께서 절 버리고 황후를 택했습니다.”

“그건 이미…….”

“저는 지금껏 황후의 자리와 황제 폐하 둘 다 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되찾아 올 수 있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를 마음에 품었다 하십니다. 앞으로 제가 황후의 자리를 위해 노력한다 한들 폐하의 마음이 없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레이샤는 비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까진 손등, 밟힌 드레스, 심장을 후벼 파는 말들. 오늘같이 처참한 날은 없었다.

내정자에서 파해진 그날도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고작 그것 때문에 그딴 질문을 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오늘 있던 일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분노를 삭이듯 한숨을 쉰 공작이 메마른 입술을 뗐다.

“이 일이 잠잠해지고 제국민들이 다시 너를 원할 때 네가 황후의 자리에 앉기만 한다면 그땐 황제 폐하도 널 봐주실 게다. 남자이기 전에 황제이니 제국민들이 원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역시 그렇겠죠?”

연갈색 눈동자가 방 안을 환히 밝히는 빛을 품고 순간 반짝였다.

맞아, 그 비천한 애와 나는 태생부터가 다르니까. 나의 지위가, 귀족으로서의 특권이 나를 지켜 줄 거야.

어차피 황후는 무너진다.

자신이 에스타란토라며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뻔뻔히 거짓을 말했으니까.

그때가 되면 난 딱 한 마디만 하면 된다.

나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후에게 매도당할 뻔했던 것이라고.

그날이 오면 황제 폐하께서도 내가 아닌 그 여자를 택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시게 될 거야.

‘하지만 거짓말이 언제 밝혀질지 모르는 일이니 모든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공작은 시시각각 바뀌는 그녀의 표정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붉게 부어오른 제 딸의 눈을 이제야 보고선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꿈쩍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황제는 내가 잘 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그 무엇도 서슴지 않는 자야.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쥔 걸 절대로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지.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잠시 눈이 먼 황제에게 황후는 독이야.”

독?

독이라…….

레이샤는 곰곰이 공작의 말을 되새겼다.

황후가 독이라면 황후를 이용해 황제 폐하의 마음을 내게로 돌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황후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으면 폐하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뜻을 따라 줘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때를 노려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는 장면을 스스로 그려보았다. 하지만 상상해 보니 이건 이거대로 비참했다.

레이샤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진심 어린 사랑을 줄 황제였다. 그게 안 된다면 레이샤는 차라리 황제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일뿐이구나. 그냥 황후가 죽어 주면 일이 쉬우련만.

“아버지.”

“또 뭐냐.”

“혹시… 황후를 죽이실 건가요?”

이전보다 다소 차분해진 목소리로 레이샤가 물었다.

공작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제 딸을 담은 눈동자가 굳어 있었다.

“아버지?”

레이샤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은 붉어졌으나, 언제나처럼 말간 눈을 깜빡이며.

“입조심하거라.”

공작은 주변을 살피다가 싸늘한 한마디를 던지고 등을 돌렸다.

그가 앉은 회전의자는 삐거덕거리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듣고픈 답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아버지께 재차 되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자리에 서서 공작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레이샤는 마른 입술만 뜯적였다.

그때, 공작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레이샤를 보며 공작은 무엇을 말하려는 듯 입을 들썩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결국엔 그는 다시 레이샤를 등졌다.

“아버지,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하려던 말이 궁금했지만 레이샤는 사뿐히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바로 앞에 유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초조한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던 잔느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그녀는 눈으로 레이샤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다행히도 몸에 상처가 남아 있진 않았다.

하지만 안심하려던 찰나, 더럽혀진 드레스와 손등의 상처 위에 굳어 있는 핏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잔느는 다급히 하얀 손수건을 꺼내 레이샤의 손등을 감싸 주었다.

“어쩌다 그러신 겁니까?”

지나가는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며 잔느는 계단을 올랐다.

자신의 방으로 향해 가던 레이샤가 그런 잔느를 보고 한마디 말을 던졌다.

“아버지가 그런 거 아니야.”

부산하게 움직이던 잔느의 눈동자가 레이샤에게로 고정되었다. 잔느는 더 이상 무엇도 묻지 않고 인상을 찡그리며 안타깝다는 듯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아프셨겠습니다.”

“이제 괜찮아. 그보다 유모.”

“네?”

“황후가 아끼는 게 뭘까?”

뜬금없는 질문에 잔느는 난처한 표정으로 레이샤를 바라보았다. 공작가의 유모 일을 하는 그녀는 알 리 없는 내용이었다.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안 레이샤가 다시 물었다.

“사람은 무슨 일을 당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울까?”

“아무래도 아끼는 게 망가지면 그렇겠지요?”

아끼는 거?

황후가 아끼는 거라면… 폐하?

안 돼. 그 사람은 절대 건들 수 없어. 황후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아!”

“왜 그러세요, 아가씨?”

“황후궁 시녀들!”

그녀는 대단한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줄곧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기쁘게 손뼉을 쳤다.

그리고 곧이어 유모를 바라보며 고혹하고도 우아하게 방긋 웃음을 지었다.

“내 앞에 데려와 줘.”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금 말했잖아. 황후궁 시녀라고. 아,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안 돼. 에츠먼가의 영애도 안 되고. 그냥 그들 중 가문의 세력이 가장 미약한, 그런 아이로 골라 데려와 줄래?”

황후궁에 있을 때는 황후의 시녀일지 몰라도 궁 밖을 벗어나면 그저 그런 가문의 영애일 뿐인 아이.

그런 귀족 아이를 처벌하는 것은 공녀인 자신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자잘한 훈계에 불과한 일이라 치부될 테니까.

고로 이 또한 처벌이 불가하다.

누군가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다.

레이샤는 공작의 앞에서 보인 적 없던 섬뜩한 미소를 띄웠다. 비뚤어진 입꼬리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아가씨! 안 됩니다. 공작님께서도 당분간 조심하라고…….”

잔느는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레이샤는 잔느보다 한 계단 높은 곳에 올라서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모는 아버지와 나 사이의 대화를 다 엿들었구나?”

“죄송합니다, 아가씨.”

“괜찮아. 들리는데 어떻게 안 들을 수가 있겠어. 그런데 유모,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해. 내가 황후를 건드리는 대신 그 시녀를 불러오라는 이유가 뭐겠어? 나도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싶어 이러는 거야.”

상냥했지만 상당히 고압적인 어투였다. 잔느는 걱정이 되어 무슨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보다도 레이샤는 더 위태로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지만 누구보다 잔느는 그녀의 상태를 잘 알았다.

폭풍우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 지금 그녀의 상태가 딱 그래 보였다.

여기서 레이샤를 더 말렸다간 무슨 큰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아가씨.”

“내가 한 일들을 모두 황후가 알게 되었다는 거, 혹시 아버지께 유모가 말했어?”

“네, 제게 물으시기에 공작님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야 아가씨께서 도움을 받을 수…….”

레이샤는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던 하얀 손수건을 풀었다.

얇은 손수건은 가볍게 너풀거리다가 계단에 깔린 푸른 카펫 위에 살포시 떨어졌다.

“그랬구나. 설마 내가 이번에 시킨 일까지 아버지께 찾아가 불진 않겠지?”

“아가씨.”

레이샤를 부르는 잔느의 목소리는 한없이 미약했다. 그런 잔느를 빤히 보던 레이샤는 이내 몸을 돌렸다.

“주워 가. 저런 손수건 필요 없어.”

계단의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잔느를 뒤로하고 그녀는 태연히 계단을 올랐다.

적막 속에서 구두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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