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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00)화 (10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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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그러고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돌아왔다. 셔츠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 모습마저도 나른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아까보단 훨씬 단정했다.

“이쯤 여미면 되었소?”

짓궂게 물어오는 그가 얄밉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더 사랑스러웠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체취를 들이마실 듯 그렇게.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그는 팔을 풀었다.

“내가 황후궁에 가려 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어느 정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침착하게 그의 두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까 가운을 입은 그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제가 왔으니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폐하를 뵈었으니까요. 그런 차림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도 황후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소. 그렇게 내 몸을 싫어할 줄도 몰랐고.”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실망감이 어려 있었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맞받아치지 못하고 진심을 다해 소리쳤다.

“아니, 싫은 건 아닙니다!”

“싫은 건 아니다? 그럼?”

“그럼……?”

그의 말을 곱씹다가 멈칫했다. 어떻게 된 게 하드엘에게 휘말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답도 하지 않자 그가 잔잔히 미소를 띠며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당연하게 옆자리에 앉은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답을 듣고 싶지만 이쯤 하겠소.”

엄지로 손등을 쓸며 날 빤히 보다 하드엘은 대뜸 아까와는 다른 주제로 말을 걸어왔다.

“그 여자와 이야기는 잘 마친 것이오? 뻔해. 당신 앞에서 용서를 빌지도 않았겠지.”

내내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마침 제자리를 찾았다.

“우선 얘기는 끝냈습니다. 잘 끝낸 건 아닌 것 같지만요.”

의도치 않게 다시금 아까 본 레이샤가 떠올랐다.

불그스름해진 눈가, 발악하던 모습, 신경을 긁어 대던 말들. 모조리 거슬렸다.

“플로리아.”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는지 하드엘의 표정 또한 심각하게 변하였다

앙상한 겨울 가지 사이로 보이는 잿빛 하늘, 지금 하드엘의 눈동자는 마치 그것 같았다.

“너무 염려 마세요.”

“어떻게 염려하지 않는단 말이오. 플로리아 당신의 일인데. 난 공작가에 두 번의 아량을 베풀지는 않아.”

“저도 바보 같은 생을 두 번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드엘은 의아한지 눈가를 찌푸렸다. 덩달아 머리색과 닮은 눈썹도 찡그려졌다.

“그게 무슨 뜻이오?”

“있습니다. 그런 게.”

두리뭉실한 답에 그는 속뜻을 알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다행히 나를 보는 눈동자는 원래의 빛을 되찾은 채였다.

레이샤에 대한 생각을 털어 내고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나는 그의 볼을 쿡 찔렀다.

“어쨌든 폐하께서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제가 지킵니다. 잊으셨습니까? 괴한에게서 폐하도 구해 드렸는데 이 몸 하나 지키는 것쯤이야 거뜬하죠.”

어깨를 펴고 당돌히 말하자 그가 내 볼을 잡아 늘였다. 미간을 쓰고 놓아 달라며 웅얼거리자 그가 단호히 말했다.

“다신 그러지 마시오.”

“네?”

“같은 일이 생겨도 다음엔 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지 말란 말이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드엘은 피식 웃고서 그제야 내 볼을 놓아주었다.

“참. 목숨을 구해 드린 대가로 제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건 잊지 않으셨죠?”

“물론. 뭐든 말하시오. 어떻게든 갚아 줄 테니.”

손으로 두 볼을 감싸고서 그를 흘겨보다가 문득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어떻게 갚아 달라 하지? 뭐가 좋을까?

“정말 뭐든 괜찮은 건가요?”

“생각해 둔 게 있소?”

“음, 아무래도 좀 더 고민을 해 봐야겠습니다. 어마어마한 걸 요구할 거거든요.”

단단히 각오하라는 말까지 덧붙이자 그는 각오는커녕 나른하게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정돈해 넘기지 않은 머리는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의 움직임은 느릿했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며 하드엘은 두 팔을 벌렸다. 이끌리듯 안기니 아까 배어나던 그의 향기가 또다시 짙어졌다.

참 묘하지. 가슴은 뛰는데 마음은 편해진다. 언제까지고 이 품 안에 머무르고 싶을 만큼.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데 다른 이들은 왜 차갑다고만 하는 걸까.

나는 하드엘의 품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플로리아,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은 당신뿐이야.”

간질거리는 속삭임이 평온한 분위기에 설렘을 더해 주었다.

그가 나를 위해 웃고, 나를 위해 화를 내고, 나를 위해 슬퍼해 준다는 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일이었다.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니까.

그의 존재는 어느 날이라도 날 빛나게 했다.

“폐하, 저는 이제 이 세계의 모든 신이 저의 편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하드엘은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그 이유를 물었다.

답을 궁금해한다기보다 기대하고 있다는 게 말투에서부터 여실히 티가 났다.

난 기꺼이 그가 듣고픈 답을 내어 주었다.

“당신만 내 편이면 되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을 알아 가고, 어느새 두 눈 가득 그를 담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렇게 사랑에 빠지기까지는 백 가지의 우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수많은 이유로 그런 감정이 설명이 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당신을 처음 본 그날부터 시작된 마음은 운명처럼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건 하드엘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플로리아.”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시선을 낮춰 나를 보고 있던 하드엘은 고개를 숙여 나의 붉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유리창을 통과한 밝은 봄볕이 다시 본 그의 얼굴 위로 번져 있었다.

내게 속살거리는 목소리도 그 빛을 가득 머금은 듯 맑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다른 신은 필요 없소. 처음부터 나의 신은 그대였으니까.”

* * *

레이샤는 넋이 나간 채 마차에 실려 갔다.

먼저 돌아가 제국민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떠도는지 알아보고 있을 유모를 대신해 공작가의 어린 하녀 하나가 지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가씨, 마차 속도는 괜찮으신가요?”

레이샤는 짤막한 대답도 없이 창밖을 내다봤다.

올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곧게 늘어선 나무는 바람에 불어올 때마다 가지를 떨었고, 마차의 바퀴 소리보다 말발굽 소리에 놀란 작은 새들이 짧은 날개를 퍼덕이며 높이 날아올랐다.

광장 거리로 들어섰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공작가의 마차를 보며 수군대는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똑같았다.

올 때와 달라진 건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동요도 없이 그 풍경을 멍하니 내다봤다.

아까 같으면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창을 닫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차라리 저 사람들의 말소리로 귓가에 맴도는 폐하의 목소리를 지워 버리고픈 심정이었다.

내 목을 친다 했다.

날 오래 기다렸어야 할, 자신이 생각한 황후궁의 주인은 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그분이.

그까짓 천한 계집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막말을 한 게 믿기지 않을뿐더러 용서가 안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누구의 연극에 놀아난 것인가. 황후? 아니면 폐하?

그럼 황제 폐하의 옆자리를 얻기 위해 내가 기다려 온 시간은? 내 마음은? 누가 보상해 주는 거야?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더 이상 짜낼 눈물도 없었다. 대신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추지가 않았다.

‘황후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니 너무 말이 안 되잖아. 나를 버리고 택한 게 고작 그 여자라고?’

레이샤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끅끅거렸다.

하녀는 처음 듣는 레이샤의 기괴한 웃음소리에 놀라 걱정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우는소리 같기도, 웃는 소리 같기도 한 웃음소리는 공포스러웠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샤는 조용해졌고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망설이는 투로 하녀도 그녀를 불렀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더 이상 시끄러운 거리가 아닌 연한 회색 지붕이 덮어진 대저택이었다.

하녀는 먼저 내려 자신의 주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샤는 그 손을 잡고 눈앞에 보이는 연둣빛 잔디를 사뿐히 밟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두 발이 모두 땅에 닿자 마부는 레이샤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저 멀리에서 유모가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레이샤 앞에 다가온 유모는 턱 끝까지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데도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나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그게 아니라, 공작님께서……!”

“아버지께서 왜?”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 *

두꺼운 책 한 권이 날아왔다.

레이샤가 비명을 내지른 동시에 벽에 부딪친 책은 쿵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샤가 손끝을 떨며 힘겹게 입을 뗐다.

“아,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하는 거냐고?”

공작은 쿵쿵 걸으며 단숨에 레이샤 앞에 섰다.

씩씩대는 숨소리와 발개진 얼굴, 이를 으득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저 눈.

그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그녀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공작은 레이샤의 팔뚝을 세게 잡아 눌렀다.

멍이 들 것 같이 아파 레이샤가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럼에도 공작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대신 분노를 가득 실어 고함쳤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움츠러든 어깨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불안한 호흡을 삼키려 애썼지만 책의 모서리가 바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던 아까의 장면이 떠올라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이 지옥 같은 상황이 서둘러 끝이 났으면 좋겠다. 그 생각뿐이었지만 아버지의 화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란 걸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 더 때리시겠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녀는 바들거리는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손찌검에 고개가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분노가 서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샤는 아주 조심스레 눈을 떴다.

잡고 있던 팔목을 내팽개치듯 놓아 준 아버지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치미는 격분을 삼키지 못해 이리 온전히 드러낸 모습은 처음이었다.

레이샤는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연갈색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우두커니 선 공작의 발등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가 용기를 내어 그를 부른 건 그로부터 몇십 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버지…….”

“너 지금 밖에 어떤 소문이 도는 줄 아느냐?”

공작은 노기 어린 음성을 뱉었다. 몸을 움찔 떤 레이샤가 주춤거리자 구겨진 드레스가 바닥에 스쳐 사락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구두의 밑창 자국이 선명히 새겨진 드레스의 밑단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전 모르겠어요.”

“어떤 소문? 네가 기자를 만나 협박을 했다지? 가십지에 황후를 욕보이는 기사를 실은 것도 네 짓이라는구나? 그간 황후를 괴롭힌 게 다 너! 너! 칸제로스가의 레이샤! 더 얘기해 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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