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넌 나한테 미안해해야지. 내정자에서 파해진 그날 이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네까짓 게 아냐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느냐고?”
그 질문을 받고 나니 기억이 되짚어졌다. 벨리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밑도 끝도 없는 추잡한 소문들에 시달리던 그때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질타를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기며 살아오던 그때가…….
울다 부은 눈으로 또다시 울고, 그 무엇도 저주하지 못해 결국 나 자신을 미워했다.
그때의 난 그렇게 살아갔다.
레이샤, 너 때문에.
“네 처지를 비관하고 싶은 거면 혼자 해. 같이 동정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플로리아, 넌 악마야. 그보다 더해.”
“악마?”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홱 움켜줬다. 악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모습은 비에 젖은 생쥐처럼 추레했다.
“전부 내 탓이라고 우기는 지금 네 꼴, 네가 생각해도 우습지 않아? 피해자인 척 구는 거 그만둬.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데 본인이 모른다니까 정말 큰일이네.”
레이샤는 불안정한 음성으로 계속해서 소리치고 발악했다. 죄다 듣기 거북한 말들뿐이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잠시 내려 보다가 손에 한가득 움켜잡은 검은 머리카락을 놓고 뒤돌아섰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레이샤가 내지르는 괴성이 겹쳐 들렸다.
“거기 서! 거기 서라고!”
아 참, 잊어버릴 뻔했네.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었지.
나는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막상 자신의 말대로 내가 자리에 서자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난 그런 레이샤를 보고 환히 웃으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공녀, 어쩌지? 걱정하는 추문 말이야. 이미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을 거야. 하찮은 제국민들이 주고받는 말에 흔들릴 공작가가 아니라 했으니 공녀에겐 상관없는 일이려나?”
* * *
-쾅!
응접실 문이 부서질 듯 세게 닫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던 레이샤가 한참이 지나서야 팔걸이를 짚으며 제 몸을 일으켰다.
황궁에 들어올 때와는 달리 분노보단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에 더 크게 자리 잡았다.
그 원인은 황후의 마지막 말에 있었다.
“안 돼. 이게 아니야.”
그녀는 어느 한 곳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저를 보며 다급히 눈을 피하던 것도.
“이미 추문이 퍼졌다고……?”
그녀가 불안함에 다시 손등을 북북 긁자 이미 부어오른 살갗에선 피가 흘렀다.
하지만 느껴지는 고통에도 그녀의 손톱은 계속해서 제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황후가 나가고 자신만 남은 응접실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가 멈칫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항상 그리는 그 남자의 목소리.
‘나를 살피러 와 주신 거구나!’
번쩍 고개를 들자 레이샤의 예상대로 눈앞엔 하드엘이 서 있었다.
냉담하다 못해 살의가 서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 보고 있는 하드엘이.
그 눈빛은 싸늘했으나 레이샤만큼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런 무서운 감정이 자신을 향한 것일 리 없으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레이샤가 다급히 드레스를 정돈했다. 이미 구겨진 드레스는 아무리 손으로 털어 내도 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황후가 밟고 간 흔적이 드레스에 선명히 남았다.
자신의 모습은 하필 오늘 너무나도 추레했다.
가장 값비싼 드레스를 차려입은 보람이 없었다.
‘폐하 앞에서 이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비참하여 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드엘을 올려다보았다.
연민이라도 들 법한 가련한 모습이었으나 하드엘은 오히려 이를 보고 웃음을 흘렸다.
“왜 울지?”
“황후 폐하께서 절 밀치고 제 드레스를 밟으시는 바람에…….”
그녀의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드레스 위로 툭 떨어져 번졌다.
“우는 이유가 고작 그것 때문인가?”
“고작이라니요, 저는…….”
내게 저렇게 차가우실 리가 없는데.
자신의 상상과는 다른 하드엘의 모습을 마주하고 당황한 그녀는 조급한 마음에 그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매몰차게 구는 게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저 입에서 흘러나올 말은 다정한 위로의 말이어야만 했다.
“치워라.”
“네?”
“그 더러운 손 치우라고.”
하드엘은 오물이라도 묻은 듯 인상을 쓰며 그녀의 손을 털어 냈다.
무언가를 잘못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만 깜빡이던 레이샤에게 뒤이어 더 믿을 수 없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플로리아가 그리 나온 걸 보니 공녀가 그따위 추악한 짓거리를 해 대고도 용서를 빌지 않은 모양이지?”
플로리아?
그녀의 심장이 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폐하께서 다정히 불러야 하는 건 황후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이어야 했다.
지금 저렇게 황후의 편을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혹시 플로리아가 착한 척 굴며 나를 모함이라도 해댄 걸까? 그래, 나에 대한 오해가 쌓여 저리 구시는 걸지도 모르지.
“폐하께서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시는 겁니다. 추악한 짓이라니요. 황후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나요? 황후 폐하께서는 오늘 절 죽이겠다는 협박을 농담처럼 뱉으신 분이십니다.”
하드엘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한 발짝 다가갔다.
바로 앞에서 마주한 회색 눈동자를 보고 레이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애정이라고는 깃들어 있지 않은 상황인 줄 알면서도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그와 가까이에 있다는 걸 의식하자 바닥까지 떨어진 심장이 웃기게도 세차게 뛰어 댔다.
“황후가 말을 안 했나 보지? 그대의 목을 치겠다고 한 건 나야. 그걸 말린 건 플로리아고.”
“지금 뭐, 뭐라 하셨습니까……?”
하지만 수줍음에 발그레 붉어졌던 뺨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었다.
그녀는 손끝에 닿는 소파를 긁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일 리가 없다.
폐하께서 왜? 내게 왜?
폐하의 짝은 나인데 왜 황후를 위해 날 죽이겠다고 말하는 거야?
“말씀해 주세요! 방금 제게 뭐라 하셨는지!”
잘못 들은 거야.
분명히.
“공녀, 그대의 목숨은 황후의 손에 있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그 입으로 또다시 황후를 욕보인다면 그땐 아무리 플로리아가 부탁한다 해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아. 스스로 목을 벨 각오를 해야 할 거야.”
하드엘은 이채가 도는 눈을 번득였다. 그리곤 더 이상 그녀와는 마주하기도 싫다는 듯 돌아서 버렸다.
그런 하드엘을 뒤에서 와락 껴안은 건 레이샤였다.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레이샤의 두 팔을 떨쳐 내며 그녀가 닿은 곳을 불쾌하게 쳐다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오한이 돋는 음성에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레이샤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배신감.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샤는 흔치 않게 말까지 더듬어 가며 숨이 넘어갈 듯 읊조렸다.
“어떻게… 어떻게 폐하께서 절 버리십니까?”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무얼 보며 살아왔는데. 어찌 살아왔는데!
“적어도 폐하께선 제게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떨쳐진 손을 비참하게 바라보던 레이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드엘은 그런 레이샤를 보고 황당해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공녀에게 이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기억이 안 나십니까? 폐하의 짝은 원래 저였습니다! 제가 황태자비 내정자였다고요!”
“그래서?”
“설마 정말 황후 폐하를 마음에 품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죠? 그건 아닌 거죠?”
나는 오래도록 당신을 보아왔는데, 당신은 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슬픈 일이지만 그래. 가십지를 폐간한 일도, 지금처럼 황후를 편드는 것도 차라리 황실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그리 말하면 용서할 생각이었다.
그거면 된다. 자신을 싫다 해도 괜찮다며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차피 당신의 옆자리는 결국 내 것이니까.
“이제 보니 단단히 미쳤군.”
하드엘은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훑었다. 그런 시선에도 레이샤는 아랑곳 않고 답을 기다렸다.
“대답해 주세요.”
“황후를 마음에 품었냐고 물었나?”
“그렇습니다.”
“황후를 위한 일이라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좋다. 이거면 답이 되겠지?”
“…진심이신가요? 아니잖아요. 진심을 말씀해 주세요.”
하드엘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부 부정하던 레이샤가 무너져 갔다.
다리에도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끝없이 추락시켰다.
머릿속에 까만 잉크를 부어 놓은 듯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처참하고 비참하다. 그저 그러한 감정만 울컥 치솟았다.
“다신 그 위선적인 얼굴을 황후의 앞에 들이밀지 말거라. 불결하니까. 네 아비에게도 그리 전해. 황후에게 위협이 된다면 공작가 모두가 피를 보게 될 거라고.”
“…….”
사시나무처럼 떠는 그녀를 부축해 줄 이는 지금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손을 뻗어 봐도 잡아 주는 이 또한 없었다.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아.
떨리는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는 하드엘은 비소를 머금고 있었다. 올라간 입술 꼬리에는 경멸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단단히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공녀가 내 황후가 되었다 한들 그대에게 눈길을 주는 일은 없었을 거야. 단 한 번도.”
* * *
“가자.”
하드엘은 응접실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넬슨을 향해 말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엔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넬슨을 이런 하드엘을 힐끔 쳐다보다 뒤를 돌아보았다.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응접실 안을 확인하니 저 멀리 허망하게 주저앉아 있는 공녀가 보였다.
“저대로 둬도 될까요?”
“아니, 당연히 저대로 두어선 안 되지. 당장 치워라. 황후가 보기 전에.”
“네, 알겠습니다.”
하드엘은 앞을 응시하며 지체 없이 걸었다. 그 걸음은 평소보다 꽤 무거워 보였다.
넬슨은 잠시 서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앞서가는 하드엘의 뒤를 급히 따랐다.
공녀를 만난 후에 곧바로 황후궁을 찾겠다고 했던 계획과는 다르게 그는 지금 황제궁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당연히 황후 폐하를 뵈러 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넬슨도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황후 폐하를 뵙지 않으시고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 전에 몸을 씻어야겠다.”
“예?”
공녀의 팔이 닿았던 부근에 하드엘의 냉랭한 시선이 머물렀다.
누군가 자신을 껴안는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 일일 줄이야. 선명히 상기되는 방금 전의 장면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하드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불결한 것이 닿았는데 그대로 플로리아에게 갈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