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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97)화 (9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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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응접실 앞에 도착해서 나는 아델을 멈춰 세웠다.

“밖에서 기다려 줄래요?”

그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여전히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레이샤를 만나면 둘이서 할 얘기가 아주 많을 테니 여기서부턴 혼자인 게 나았다.

“둘이 들어가면 치사하잖아요. 다녀올게요.”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아델을 위해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넸다.

결국 그가 마지못해 한 걸음 물러났고 나는 직접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햇빛이 가득 드는 방 안.

오늘따라 유달리 화려한 차림의 레이샤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응접실의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배치된 가구들을 제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일부로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정말 인기척을 듣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레이샤가 한발 늦게 내 쪽을 쳐다봤다.

“오셨습니까? 앉으시지요.”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놀라는 척도 하지 않고 마치 제집에 초대한 사람을 다루듯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뭐 하자는 거지?

그저 우스웠다. 평소 입지도 않는 과한 드레스를 챙겨 입은 것도. 그런 짓을 저지르고 황후궁에 찾아와 저런 여유를 부리는 것도.

황후가 되고 싶다고, 그러니 네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어리숙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저렇게나 티를 내면 어쩌자는 건지.’

내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녀 역시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이젠 숨길 필요가 없다 이거겠지.

“공작가의 영애가 황후를 보았으면 응당 예의를 차려야지요. 안 그런가요, 공녀?”

“맞습니다. 제가 실수했네요.”

그녀는 순순히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드레스의 양 끝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채.

그 두 눈에는 나에 대한 멸시가 가득했다.

나는 인사를 받지 않고 그런 레이샤를 스쳐 지나갔다. 레이샤는 제자리에 서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나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가 좀 아파서. 괜찮죠?”

“…….”

시선을 내리니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알아챘는지 재빠르게 손을 감추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다마다요.”

“이리 와 앉아요. 편하게.”

나는 소파를 가리켰고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와 그곳에 앉았다. 멀쩡하게 나를 쳐다보는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애초에 반성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사과 따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용서하고, 자애를 베풀고, 화해하고. 그런 것들을 하기엔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나저나 안색이 창백하네요. 내게 안 좋은 소식이라도 전하러 온 건가요?”

안 좋은 소식이겠지. 레이샤 네겐.

나긋하게 던진 한마디에 레이샤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안 좋은 소식… 맞습니다. 안 좋은 소식이지요. 어떤 거만한 몰락 귀족이 고귀한 공작가를 농락했다지 뭡니까. 폐하께서도 들어 보셨나요?”

고귀한 공작가? 참 양심도 없지.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건가요?”

“예?”

나는 반문하는 그녀를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 냈다.

돌려 말한 정성을 생각해 면박이라도 당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나?

이런 내 반응에 곧 레이샤가 조소 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염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태도였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더 거북했다. 난 크게 숨을 내뱉고서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발 저려서 온 거잖아요. 내가 그대의 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공녀도 알게 되었으니까. 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 야욕은 넘치는데 그리 눈치가 없어서야.”

금이 간 유리를 내려치면 조각조각 부서지듯, 그렇게 금이 간 레이샤의 가면도 완전히 부서졌다.

적어도 내 앞에선.

기가 막히게도 나를 보는 눈빛에는 원망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제 할 말을 했다.

“영특하신 폐하께서 꾀를 부리시니 제 머리로 따라갈 수가 있어야지요. 막 굴러먹은 것들은 잔꾀가 많다. 아버지께서 항상 그러셨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지 뭐예요. 그간 벨리타 영애의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계셨다니.”

차라리 착한 척을 하게 두는 쪽이 나았나 싶다. 앞으로 저 입을 얼마나 피곤하게 놀려 댈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비난 말아요. 그러면 그 잔꾀에 당한 공녀는 뭐가 되나요.”

“지금 제게 이리 무례하게 나올 처지가 못 되실 텐데요?”

이렇게 뻔뻔하게 나온다고? 제정신인가? 나는 느릿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무리 값비싼 드레스를 차려입어도 그대는 일개 공녀인데. 누가 누구에게 무례를 운운하는 겁니까? 더군다나 내 발밑에서 빌어도 모자랄 죄를 지은 공녀가.”

“죄를 뉘우치셔야 할 건 황후 폐하시죠.”

“뭐?”

“에스타란토라며 거짓된 망발을 일삼고 온 제국민을 우롱한 황후 폐하께서 저의 죄를 꾸짖으시다니요. 스스로 창피하지 않으세요?”

이리도 당당하게 나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왜 답이 없으세요? 또 황제 폐하를 앞에 세워 두고 거짓이 아니라 우기실 작정이십니까? 폐하, 요즘 여론에 휩쓸려 단단히 착각하시나 본데 고귀한 건 폐하가 아니라 그 힘입니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지녔다는 주장이 죄다 거짓이었다는 걸 모든 이들이 알게 되면 폐하는 버림받겠지요. 아주 처참하게.”

저번 생에서 내가 왜 너 같은 것 때문에 괴로워해야 했을까. 난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도대체 왜.

“공녀는 겁이란 게 없나 봐?”

“무슨…….”

“지금 잘못된 패를 쥐고 와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잖아? 멍청하게.”

“뭐, 뭐라고요? 멍청?”

“내가 가짜 에스타란토라는, 그 확실하지 않은 추측 하나 믿고 무모하게 구는 게 멍청한 게 아니면 뭐지?”

“지금 누가 누구에게!”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위협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추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정말이지 볼만했다.

“황후인 내가 공녀에게 말하고 있잖아요. 난 공녀가 어떤 게 진실이라 믿든지 신경 안 씁니다. 다만 당장을 걱정하지 않는 그대가 안타까울 뿐이에요. 내가 앞으로 어찌 나올 줄 알고.”

“하! 설마 이 일로 제 덜미를 잡았다 생각하십니까? 재판정에라도 세우시려고요?”

그녀는 자신이 처벌받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리 빈정거리는 것이다.

언제까지 저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면 격 떨어지게 소문이라도 내실 생각이신가요? 한 번 내보세요. 저도 입 다물고 있진 않을 겁니다. 폐하께서 가짜 에스타란토라는 것과 제가 벌였다 주장될 일들. 제국민들은 과연 둘 중 어떤 소문을 믿을까요?”

믿음? 그래 중요하지. 하지만 소문은 진실을 따지기 위해 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흥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소문일수록 생명력이 질기다.

설사 그 소문이 거짓일지라도.

그건 내가 경험해 봐서 아주 잘 알았다.

“영악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그동안 공녀가 낸 내 소문들을 생각해 봐요. 제국민들이 어떤 말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더 오래, 더 널리 퍼지는 소문은 미문이 아닌 추문이다. 특히나 영웅이나 성자의 추문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즉, 공녀가 그토록 자랑하던 공작가의 고귀함은 추문을 더 널리 확산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는 역할을 할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의 추문에 열광할까, 아니면 공녀의 추문에 더 열광할까. 혹시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녀의 낯빛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방금 내 말을 듣고 보니 큰일이라도 났다 싶은 건가.

이 정도는 짚어 주기 전에 깨달았어야지.

“열광이라니, 경박하게. 제가 가짜 에스타란토인 걸 말하고 다닐까 봐 걱정이 되니 이젠 협박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그리 말씀하시면 겁을 먹을 줄 아셨습니까?”

당돌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난 소문인데 내가 뭐가 두렵겠어요. 진실은 후에 밝혀질 테고. 그런데 공녀는? 아니잖아?”

레이샤가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지금 많이 불안하구나.’

역시 레이샤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신의 정체가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 그게 맞았다.

어쩐지 유독 여론에 집착한다 싶었지.

그동안 소문이나 가십지 같은, 사람들의 여론을 이용해서 날 괴롭힌 것도 그것이 자신이 당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울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찮은 제국민들이 주고받는 말에 흔들릴 공작가가 아닙니다.”

“공녀, 본인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대가 천하다고 하는 나의 귀한 제국민들이 없다면 그 고귀한 공작가의 권위도 유지될 수가 없다는 걸. 권력이란 것은 무릇 민심에서 나오는 법인데 공녀씩이나 되어서 그걸 모를 리가.”

“…아.”

한동안 초점이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레이샤는 돌연 고개를 젖혀 허탈하게 웃었다.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그 웃음소리는 섬뜩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대신 분통이 서린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귀한 제국민? 플로리아, 네가 잊었나 본데 본래 이 황궁의 주인은 나야. 네가 아니라.”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나는 가죽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늘어뜨린 그녀의 긴 드레스를 지그시 밟으며 두 발로 똑바로 섰다.

“그래서, 날 치워 버리고 황후의 자리에 앉겠다 이 말인가?”

“뭐 하는 거야!”

레이샤가 내 구두에 밟힌 드레스 자락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딱히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진 않았다. 이 와중에도 드레스 밑단이 찢어질 걸 염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장 치워.”

“왜?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건 못 견디겠어? 더럽고 치사한 짓을 많이도 해 대기에 난 공녀가 더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

“당장 치우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짝 발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드레스는 구두 밑창으로 인해 새까만 자국이 남아 이미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그것을 본 레이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모욕감에 이맛살을 찡그리며 날 노려보았다.

고작 이 정도로 수치스러워하다니. 고귀한 공녀답네.

“날 죽이고 싶다는 눈빛이네? 아! 이 자리에서 날 죽이면 원하는 대로 당장 황후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겠다. 그렇지?”

“빼앗아? 원래 내 자리인 것을 빼앗는다 하는 사람도 있나?”

“그래, 그건 공녀가 알아서 생각하고.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내기?”

“오늘 이 황궁 안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누구일지. 어때?”

“뭐, 뭐?”

“반응이 왜 그러지? 먼저 시작한 건 공녀야. 원하던 일 아니었나?”

한 걸음씩 다가가자 그녀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얼마 못 가 레이샤는 소파 다리에 발이 걸려 그만 그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턱을 움켜잡아 내 두 눈을 마주 보게 했다.

레이샤의 눈가 주위가 갈수록 붉어졌다. 그녀는 지금 분노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눈치채고서 실소를 흘렸다.

“우리 공녀께서는 이게 문제야. 농담도 구분치 못하고.”

“농담?”

작게 한숨을 쉰 레이샤가 뻣뻣해진 몸에 힘을 풀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턱을 잡고 있는 손에도 목 넘김의 느낌이 생생히 전해졌다.

“당연히 농담이지. 난 공녀처럼 감정에 미쳐 날뛰는 사람이 아닌데.”

난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바짝 긴장하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나는 귓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물론 누구처럼 천박하게 앞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턱을 놓아 주고서 떨어지자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가련한 레이샤가 보였다.

착한 척 방긋 웃고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망가진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지.

바라던 모습이긴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지쳐 더 이상 분노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만큼 그녀는 더 망가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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