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96)화 (96/164)

16609264503419.jpg 

#096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가면을 벗기고 죄를 밝히는 것. 그리고 저지른 죄에 맞는 처벌을 받게 하는 것.

과정이 어찌 되든 마지막은 그렇게 끝나야 했다.

일말의 오점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고 정확하게.

벌을 내리되 내겐 그들의 오물이 튀어선 안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일러.’

겨우 근신 처분이나 받게 하자고 지금껏 기다려온 게 아니었다. 공녀가 지금까지 벌였던 일과 함께 터트릴 만한 큰 사건이 필요했다.

감형의 여지조차 없는, 평생을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 감옥 안에서 썩게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사건이.

공녀가 제 발로 옥에 걸어 들어가도록 난 앞으로 공녀가 벌일 무도한 짓들 앞에 큰 덫을 놓을 생각이었다.

죄책감도 없이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니 곧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저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 방식대로 고통스럽게, 그들이 그간 쌓아 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 거예요. 그것이 부든, 명예든.”

나의 죽음의 대가. 그에 마땅한 복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지금 하드엘의 인내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이건 그에게 기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야.

나는 그의 손을 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폐하, 하드엘.”

매번 따뜻했던 손이 오늘따라 유독 찼다.

“도대체 어떻게 버틴 것이오.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 혼자…….”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울분을 삼키듯 그렇게 하려던 말을 삼킬 뿐이었다.

여기서 울기엔 난 그간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래서 나는 하드엘을 바라보며 더욱 환히 웃을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폐하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제가 그리 너그럽지 못합니다.”

* * *

“유모, 나 어때?”

레이샤는 거울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십지의 대표를 만나고 온 그녀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 보였다.

때때로는 한껏 신이 난 사람처럼 빙그르르 돌며 드레스 이곳저곳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닥친 일을 잊은 듯,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잔느만 그런 레이샤를 보며 애를 태울 뿐이었다.

“아가씨,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황후가 앉아 있는 그 자리의 주인이 누군지 보여 준다 했잖아.”

우선 옷차림부터 고아해야지. 더군다나 폐하를 뵐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만족하며 하늘거리는 물빛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옷감의 소재와 밑단에 박힌 보석 장식, 모든 것이 황후가 입는 그 어떤 드레스보다도 값져 보였다.

“난 내 자리를 되찾을 거야. 생각했던 것보단 시기가 이르지만 황후가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해야지.”

“아가씨…….”

“아마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시겠지. 그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실 거야.”

모든 일이 끝나고. 바라던 대로 폐하의 옆자리에 앉으면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기뻐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지.

이제야 모든 것을 되찾았다면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며 태어난 내가, 드디어 제값을 해냈다면서.

내내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고개를 숙이고 드레스에 가려진 복부 부근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녀는 생소한 눈빛으로 유모를 바라보았다.

슬픔. 그보다 더한 비애 그리고 원망이 그 연갈색 눈동자에 잔뜩 서려 있었다.

레이샤에게 있어 이러한 감정들 하나하나는 늘어진 거미줄에 감겨 버둥거리는 날벌레 같은, 그런 존재들이었다.

“유모도 기억하지? 여기 있는 흉터.”

그녀가 자신의 복부를 가리켰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어떤 상처가 났었는지 잔느는 알고 있었다.

고운 살결이 찢기고 아물어 손바닥만 한 길이의 흉이 여전히 제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도.

몇 달간을 직접 치료해 주었으니 잊었을 리가 없었다.

“이날 아버지께서 얼마나 슬퍼하셨다고. 황후가 되어야 할 몸에 흠집이 났다면서. 황태자비 내정자에서 파해졌단 소식을 듣고 자기가 날 때려 만든 상처면서 말이야.”

항상 웃고 계시던 아버지였다. 처음으로 내게 원망 어린 말을 쏟아 내던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네가 네 엄마의 죽음을 욕보인 것이야!’

가문을 드높여야 한다. 항상 다정히 속삭이던 말이 아닌, 처음 보는 분노를 쏟아 내며 분노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날 아버지의 말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그 여자가 나의 모든 것을 망쳤다. 아버지의 모든 것도 망쳤다.

“아가씨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죠.”

그녀는 마음 아파하는 유모를 보고 피식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려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를 쓸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누가 봐도 아름답고 우아한 명문 귀족가의 영애였다.

누구 하나 그녀의 고귀함에 반기 들지 못할 것이었다.

“맞아. 힘들었어. 아버지가 날 때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잖아. 게다가 매일 같이 다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변하여 그리 나오시니 많이 놀랐었지. 유모의 품에 안겨 울기도 참 많이 울었는데. 근데 말이야, 아버지의 손찌검보다 더 수치스러웠던 게 뭔 줄 알아?”

“네?”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내 얘기들.”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미간을 확 찌푸렸다. 지나가면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대화 하나하나가 아직도 생생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오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미웠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밤새 생각했지. 근데 제국민들의 천한 주둥이에서 내 얘기가 함부로 들리니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아버지를 원망할 게 아니었어. 내가 너무 물렀던 거야. 그게 내 잘못이었어.”

그때 다짐했다. 아버지처럼 나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그 여자에게서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오고야 말겠다고.

폐하도, 황후의 자리도.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게 항상 다정하기만 했던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플로리아는 나의 모든 것을 짓밟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 거짓된 에스타란토의 힘 하나로.

“아닙니다. 그때의 아가씨는 잘못하신 게 없으세요.”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유모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레이샤는 빤히 그를 보다 차갑게 돌아서서 잔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잔느는 황급히 망사로 된 장갑을 찾아내어 그녀의 손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다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모의 눈빛은 방금 전과 같았다. 거슬리게.

“유모.”

“예, 아가씨.”

“유모는 내가 불쌍해?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 공작저에서 나를 그렇게 보는 건 유모밖에 없어. 아니면 멍청하던 예전의 내가 그립기라도 한 건가? 이전 유모 말처럼 하녀들 손에 난 상처에나 마음을 쓰던 내가?”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유모를 보고 레이샤는 그냥 문 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어차피 되돌아갈 길은 없다. 이제 그녀에게 옳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황궁으로 가자.”

* * *

“왜 이렇게 어수선하지?”

레이샤는 마차에 난 작은 창을 열어 바깥을 살폈다.

길가에 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공작가의 마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그들의 시선이 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레이샤는 단번에 눈치챘다.

부러움과 존경, 선망이 아닌 의아함과 경멸, 조롱 따위의 시선.

“공녀님이야.”

“쉿.”

사람들은 지나가는 공작가의 마차를 보며 저들끼리 서로 수군대다가 레이샤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부모들은 킥킥거리는 제 아이들을 단속시키기 바빴다.

무슨 일이지?

왜들 저러는 거야.

“아가씨, 왜 그러세요?”

“…….”

‘공녀님을 내정자에서 파하겠다니…….’

‘다 네가 부족한 탓이다! 겨우 몰락 귀족 출신 여자애에게 밀리다니 가문의 수치야!’

‘어쩜. 불쌍해라.’

‘공녀님이 아니면 누가 황태자비야?’

‘황태자비 내정자 자리에서 파해졌으면 이제 누가 데려가려나. 아무리 콧대 높은 칸제로스가라 해도 황실에게 버려졌으니. 쯧.’

‘혹시 공녀님께 무슨 흠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몰락 귀족 출신 영애를 데려다가 황후에 자리에 앉히겠어? 굳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