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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95)화 (9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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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황후를 곤경에 빠뜨린 게 백작 가의 영애라고?”

염문설이 터진 후, 함께하던 산책길에서 슬픔에 잠긴 표정을 숨기던 플로리아가 떠올랐다.

혼자 앓았을 걸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찢어지는데.

‘플로리아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게 그 여자란 말이지.’

주먹을 꽉 쥐자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죽여라. 그대로 두면 황후에게 해가 될 자다.”

“하오나… 이번 일은 정당한 재판으로 처벌을 내린다 해도 사형을 판결받진 못합니다.”

“재판 따위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처리하지.”

잘못된 방법임을 알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만큼 그자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데.

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죗값을 치르게 하는 수밖에.

“감정이 격해지셨습니다. 조금만 진정을 하시고…….”

“넬슨, 지금 내가 홧김에 이런 명을 내린 것 같나?”

분노에 찬 사람답지 않게 목소리는 침착하다 못해 한없이 냉정했다.

“달라지는 건 없다.”

“폐하.”

“황후에겐 우선 이 사실을 알리지 말거라.”

어떻게 소식을 알려야 당신이 상처받지 않을까. 그의 걱정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평생 묻어 두는 게 낫다면 차라리 그럴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드엘의 마지막 말을 들은 넬슨의 반응이 묘했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우물쭈물했다.

“말해라.”

“네?”

넬슨은 화들짝 놀라 눈앞의 황제를 쳐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남았지 않느냐.”

“그게 실은…….”

그는 하드엘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끌었다. 이야기를 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늦었다. 하드엘은 그의 답을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넬슨은 주저 끝에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털어놓으려 입을 떼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듯합니다.”

“황후가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는 단번에 미간을 좁히고서 넬슨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폐간된 가십지 『델리스』에서 지난번 황후 폐하에 관한 악의적 기사를 실은 것이 생각나 이번 염문설을 조사하기 위해 그와 연관된 자들의 그간 행적을 함께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대표라는 자가 얼마 전 황후궁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사를 싣고도 플로리아 앞에서 그 뻔뻔한 낯을 드러내다니. 무슨 이유이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드엘은 뒷말을 들어야만 했기에 당장은 제 불쾌한 감정을 억눌렀다.

“계속하거라.”

“『델리스』의 대표에게 직접 물으면 황후 폐하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 대표를 대신해 당시 황후 폐하에 대한 비방 기사를 썼던 기자를 찾아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넬슨은 마른침을 삼키고 잠시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데보니안가의 사용인이 찾아와 황후 폐하에 대한 기사를 써 달라 자신을 회유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대표가 가십지 폐간을 재고해 달라 청하기 위해 회유 사실과 범인을 황후 폐하께 밝힐 거라 했다 하고요.”

“그러니까 네 말은. 가십지의 일도 그 여자의 짓이다?”

“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시고요. 이번 염문설 역시 황후 폐하 쪽에서 범인을 먼저 찾지 않으신 걸로 보아 적어도 누구의 짓인지 짐작은 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플로리아는 알고 있다. 자신을 괴롭힌 자가 누구인지.

엘리움이란 기자가 찾아왔을 때 뭔가를 아는 듯 말을 하던 황후의 의문스러운 태도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하드엘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재킷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폐하…….”

넬슨이 자신을 불렀을 때 그는 대답 없이 큰 보폭으로 걸어가 집무실의 문을 직접 열었다.

그리고 하드엘은 그대로 황제궁을 나섰다.

* * *

“폐, 폐하! 황후 폐하께 알려야…….”

“비켜라.”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과 나는 눈을 마주 보았다가 동시에 문 쪽을 쳐다보았다.

부인과 레이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라 안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해 놓은 상태였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백작 부인이 움직이기도 전에 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놀라 쳐다보니 그곳에는 하드엘이 서 있었다.

“폐하?”

내 부름에도 그는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 이상했다.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날이 서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우울에 젖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걱정이 되어 다가가려 하자 하드엘이 성큼 걸어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마주친 눈은 그저 슬퍼 보였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품에서 벗어나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지만 안간힘을 써도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벗어나려 할수록 하드엘은 더욱 힘을 주어 나를 안았다.

“어떻게 혼자 감당하고 있었소.”

“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혼자 감당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플로리아, 당신은 정말…….”

그의 목소리의 떨림이 생생히 전해졌다. 하드엘은 두려워하고 있었고 슬퍼하고 있었으며 자책하고 있었다.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에 관한 일이 아니라 나에 관한 일이.

어느새 백작 부인은 나가고 없었다.

나는 하드엘을 천천히 달래며 먼저 어떤 상황인지를 물었다.

가십지와 염문설 그리고 벨리타. 하드엘은 그렇게 딱 세 마디 답을 해 주고 허리를 감쌌던 팔을 풀고 대신 나의 양어깨를 잡았다.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한 그가 물었다.

“아직도 그 일의 범인은 모른다고 할 것이오?”

“…….”

지금까지 나를 곤란하게 했던 일들을 벌인 게 누구인지 그가 다 알게 된 거였다.

하지만 아직 레이샤가 연관되어 있는 것까진 모를 것이다.

내가 지닌 증거에 더 자세한 정황이 더해져야만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레이샤에 관한 소문이 제국에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고 해도 넬슨 백작이 거리에 도는 소문을 알고 그것을 조사해 하드엘에게 전하는 건 꽤 한참 후의 일이 될 것이었다.

‘그 전에 레이샤의 문제를 처리하고 싶었는데.’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길 수도 없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일이라면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니 언젠가 이런 때가 오리라 생각하긴 했다.

다만 늦게, 아주 늦게.

내가 공작가의 일을 해결한 후에야 진실을 알기를 바랐을 뿐이다. 위험에 빠지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까.

“내게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것이오.”

그는 내 고개를 들게 했다. 눈가를 매만지고 부드럽게 뺨을 쓸어 주는 그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나보다도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선에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폐하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플로리아, 당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 혼자 견디려 하지 마시오. 당신이 이렇듯 앓으면 내가 못 견뎌.”

그는 아까보다 단단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나보다 더 날 걱정할 사람, 하드엘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처벌은 내게 맡겨 주시오. 당신에게 위협이 되는 자라면 없어지는 게 맞아.”

“벨리타 영애를 죽이겠다는 뜻인가요?”

벨리타의 목숨까지 앗아갈 생각은 없었으며 이는 앞으로의 계획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안 됩니다, 폐하.”

“아무리 백작가의 영애라 해도 당신을 그리 만든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소.”

하드엘의 눈빛이 너무나도 단호했다. 이대로 그냥 두면 벨리타는 정말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레이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드엘에 의해서.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벨리타 영애를 그냥 두세요. 지은 죄에 맞는 처벌은 후에 제가 내리겠습니다.”

“당신에게 칼날을 겨눈 자요.”

“그렇다고는 하나 벨리타 영애가 목숨까지 잃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 이유라면 이미 충분하지. 그대를 괴롭게 한 게 벨리타, 그 여자인데.”

“…아닙니다.”

“아니라니?”

“벨리타 영애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오?”

벨리타가 그간 어떤 짓을 벌였는지 모두 알게 된 이상 이제는 말해야 했다.

누가 이 사건들의 주동자인지.

어설픈 거짓으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예상치 못한 화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공녀입니다.”

“뭐?”

“지금까지의 모든 짓. 레이샤 공녀가 꾸민 일입니다. 칸제로스 공작도 모두 알고 이를 묵인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나서서 부추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

하드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깨 위에 올려 있던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루안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난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루안, 미안하지만 조금 있다가 다시 와줄래요?”

“황후 폐하, 그게…….”

“급한 일인가요?”

“공녀님이 황후궁을 찾으시겠다고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하필 지금.

나는 하드엘을 흘긋 보았다. 공녀라는 말에도 반응 없이 우뚝 서 있던 그는 잠시 뒤, 직접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지금 공녀라고 했나?”

분노에 찬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루안은 숨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 해라.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루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라 하세요. 그리고 폐하가 아닌 내 앞으로 데려와요.”

결국 루안은 하드엘의 눈치를 보며 내 명을 따르겠다고 조심스레 답했다.

그는 루안을 붙들고 다시 무언가를 명하려 했지만 이를 내가 말렸다.

“루안, 이만 가 봐요.”

“황후.”

“폐하, 공녀의 목을 베기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문을 닫고 돌아서서 그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하드엘은 당장이라도 루안을 따라 나갈 것처럼 굴었지만 내가 문을 막고 서 있었기에 결국은 제자리에 서서 내 물음에 답을 했다.

“그런 자들을 살려 둘 이유가 있소? 웃는 낯으로 당신에게 그런 추악한 짓들을 했소. 난 지금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소름이 끼쳐.”

회색빛 눈동자는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반득였다.

그가 왜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지 알았지만 난 그를 말려야만 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아직 그들에게 그 정도의 처벌을 내릴 만한 명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이라면 나도 이렇게 나오진 않았어. 플로리아 당신을 괴롭힌 자들이야. 그러니 명분 같은 건 필요 없소.”

그래. 지금 죽여 버리면 편하겠지. 나도 불안에 떨 일이 없을 거야.

그러나 그다음은?

그렇게 권력을 이용해 허무하게 죽여 버리면 내겐 뭐가 남지?

고통, 괴로움, 견디지 못할 만큼의 치욕. 내가 느낀 그 모든 감정을 그들도 똑같이 느껴 봐야 하는데.

기필코 산 채로, 산 채로 말려 죽일 것이다.

“폐하께서 필요 없으시다 한들 제겐 그자들을 벌할 명분이란 게 필요합니다. 제가 그들을 재판정에 세울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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