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뭐가요?”
“폐하께서는 깨어나지 않은 신성과 마력의 흐름을 이미 다스리고 계십니다.”
“네?!”
이번엔 아델과 내가 동시에 되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느끼지도 못한 걸 다스리고 있다니?
“그래서 힘이 안정화되어 있던 것이었어요. 이렇게 아무 탈 없이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 내실 준비를 마치셨다니!”
장로는 무척이나 신이 나 보였다. 곧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나는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폐하, 저와 훈련하실 때는 마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하셨잖아요. 언제부터 그런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되신 겁니까?”
“나도 모르는 일이에요.”
아델은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임이 분명했다.
마력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에스타란토의 신성을 다스린다? 그건 내가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마법서에서 이르길 힘을 다루려면 그것을 먼저 느끼는 게 순서였다.
에스타란토의 힘. 도대체 내가 언제부터…….
“아!”
있다.
힘을 느낀 적이 있어.
하드엘이 흑마법에 조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그러니까 에스타란토의 수호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분명 내 주위에 감도는 은은한 붉은빛을 봤다.
그 빛에 손을 대자 봄바람이 손끝을 스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고.
“왜 그러세요?”
“생각해 보니 에스타란토의 힘을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언제쯤이었는지 기억하세요?”
내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으니 또렷했다.
“기억나요.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그때 분명 붉은빛도 봤고요.”
“그렇다면 폐하의 말씀대로 에스타란토의 힘을 느낀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저희는 몇 달을 수련하여야 마력을 조금씩 느낄 수 있는데 황후 폐하께서는 벌써 잠들어 있는 힘을 다루기까지 하시잖아요.”
“아델, 보고도 모르겠느냐. 폐하께서 천재이신 게야! 우리 신전 마법사들에게 널리 널리 알려야겠구나!”
진작 알았다면 장로를 찾았을 텐데 그때는 그게 힘을 느끼는 거라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소식을 지금에서라도 듣게 됐으니 다행이야.
“내가 드문 경우였군요.”
“드물다 못해 아예 처음 보는 경우입니다! 아델과는 어떤 훈련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폐하의 잠재력을 깨운 듯싶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보통의 마법사가 자신의 마력을 주체하지 못할 때 쓰는 방법을 위주로 훈련했어요. 틈틈이 마력을 느끼는 연습도 했고요. 후에는 아델이 더 강한 마력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해서 훈련 방법을 바꿨죠. 아, 훈련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고요.”
장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아델을 흘겨봤다. 그 시선이 난 왜인지 음흉하게 느껴졌다.
아델도 나와 똑같은 느낌을 받은 걸까? 그는 장로의 눈을 마주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장로님, 왜 절 그렇게 이상한 눈빛으로 보십니까?”
“알려 줄 거지?”
“무엇을요?”
“강한 마력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며. 어쩐지 매일 같이 책에 파묻혀 살더라니. 여하튼 잘했다, 잘했어. 넌 우리 에스타란토 신전의 보배야.”
“예? 안 알려 드릴 건데요? 장로님은 돈 내세요. 만 벨입니다.”
“이런 몹쓸. 얘가 이럽니다, 폐하.”
장로는 울상을 지으며 내게 하소연했다. 지금 나한테 이르는 건가? 내가 뭐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나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한 마디를 뱉었다.
“둘 다 싸우지 마요.”
* * *
“그렇게 웃겨요?”
아델은 황후궁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배를 잡았다. 뜬금없이 내가 싸우지 말라 다그치는 게 웃겼다나.
아델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네. 폐하께서 그리 곧은 표정으로 장로님께 말씀하시니 더 웃겼습니다.”
“그렇게 웃길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폐하께서 평소 장로님의 모습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근엄하신데요. 그런데 폐하께서 그런 장로님을 혼내셨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조금 상처받으신 것 같던데.”
“정말 상처받았을까요?”
“아마도요?”
아델의 말을 듣고 보니 내내 신나서 들떠 있던 장로가 마지막엔 조금 힘이 없어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난 아까부터 둘이 자꾸 아옹다옹하기에. 장로가 와 하소연을 하는데 내가 딱히 해 줄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근엄? 장로가 근엄한 사람이었나요? 그대와는 허물없이 지내는 것 같이 보이던데.”
“저와는 그렇죠. 저는 장로님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거든요.”
“그랬군요. 아, 맞아. 손수건. 잊어버릴 뻔했네요.”
나는 아까 아델이 준 손수건을 품에서 꺼냈다. 하지만 그걸 아델에게 바로 주진 않았다. 사용했던 걸 그대로 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에 세탁해서 돌려줄게요.”
아델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선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계속 사용하셔도 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은실 자수가 놓인 연한 보랏빛 손수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귀해 보이는데.”
“혹시 남이 쓰던 건 다시 잘 안 쓰나요? 그럼 내가 미안한데.”
“네? 그럴 리가요.”
“아닌가요?”
그는 내 질문의 뜻을 뒤늦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처음엔 눈만 깜빡거리더니 당황해하면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며 횡설수설했다.
여기서 그런 의미라는 건 다른 사람이 쓴 건 좀 찝찝하다 뭐 이런 게 아니라는 거겠지.
“그럼 왜 안 받겠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쓰던 거라 안 받겠다는 게 아니라 폐하께서 쓰시던 거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내겐 그게 더 상처인데요?”
나는 미안해하는 그를 위해 일부러 소리 내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아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아니, 근데 내가 쓴 거라 안 받겠다니 생각해 보니까 이거 진짜 좀 상처인데?
“손수건, 그냥 제가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다급히 내 손에 있던 손수건을 도로 가져갔다. 아델의 품속으로 들어간 손수건은 내 시야에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절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폐하의 향기가 남아 있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향기요?”
내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그를 바라보는데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허락하자 그녀가 내 앞에 서서 아델의 눈치를 보았다.
레이샤에 관해 할 말이 있는 것이란 걸 난 직감했다.
“뭔가 나누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잠시 나가 달라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를 눈치챈 아델이 먼저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그가 허리를 굽히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돌아서는 아델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그에게 중요한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델 경.”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는 아델의 입가엔 언제나처럼 잔잔한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고마워요. 에스타란토의 힘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건 그대 덕입니다. 아델 경, 그대가 나를 살렸어요.”
정말 아델이 내 목숨을 구해 준 게 맞았다. 만약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잠들어 있는 힘은 여전히 위태로웠을 테고 이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아델에게서 순간 예전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 목숨을 나누어서라도 구해 드릴 겁니다.’
힘을 견디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지 않냐는 내 물음에 저리 답을 하던 아델의 모습이.
목숨을 나눈다는 게 진짜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이제 둘 다 목숨이 멀쩡할 테니 다행이네.
난 멀뚱히 서 있는 그를 보며 입매를 휘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떠오른 목소리와 같은, 낮은 목소리가 지금 이 방 안에서 또다시 울렸다.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델이 멀어지고, 주변은 고요해졌다.
“공녀에 관해 할 얘기가 있는 거죠?”
난 곧바로 마샤티아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부인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썹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공녀 쪽에 붙인 감시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던가요?”
“행선지가 수상하여 따라가 지켜보니 공녀가 도착한 빈집에 가십지 『델리스』의 대표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델리스』의 대표라…….”
가십지까지 폐간된 마당에 레이샤가 그자를 만날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딱 하나.
‘폐간을 재고해 달라며 나를 찾아왔던 그날에 관해 물으려는 거겠지.’
당시 나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궁금해한다는 건 레이샤가 뭔가 이상함을 직감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만날 리가 없다.
봄의 무도회 날 쪽지를 주운 직후가 아닌, 『델리스』의 대표를 만난 후에야 내가 벨리타를 불러 그녀의 잘못을 추궁을 했으니 이 점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면 레이샤가 가장 먼저 찾아갈 사람이 바로 『델리스』의 대표였다.
“공녀가 이제야 눈치를 챈 모양이에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소문이 온 거리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을 텐데, 의외로 반응이 늦었다.
‘좀 더 일찍 알아챌 줄 알았는데.’
밖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공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던 걸지도.
“폐하,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한 가지 더?
“공녀가 자신에게 감시가 붙은 걸 알아챈 것 같다고 합니다.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더라고요. 감시는 그만 거두는 게 좋을까요?”
그래. 바보가 아닌 이상 가장 먼저 그걸 경계해야 맞지.
당분간은 감시자들을 붙여도 별 소득이 없겠지만 언젠가 시간이 가고 나면 당연하게 이에 대한 경계도 느슨해질 터.
어차피 흑마법 때문이라도 감시를 거둘 순 없었다.
“아니요. 그냥 두세요. 그나저나 곧 공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네요.”
* * *
빈집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운 곳이었다. 뿌연 먼지가 곳곳에 쌓여 있었고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 있었다.
편지가 일러 준 장소에 도착한 가십지 델리스의 대표는 연신 콜록거리다가 사람을 발견하고는 쭈뼛쭈뼛 들어와 가림막 너머의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십지 『델리스』의 대표였던 닐 하우드 미넬입니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가림막은 사람의 형체를 비추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닐은 가녀린 목소리 덕분에 적어도 가림막 너머의 사람이 여자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리 무례해.’
인사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윗사람인양 구는 것이 기분 나빴다.
하지만 불려온 입장에서, 그리고 그 부름에 응한 입장에서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원하는 것은 주고, 자신은 원하는 것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닐은 여자의 옆에 놓인 가방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가방 안에 든 돈다발이 두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괜히 다급해져 먼저 말을 꺼냈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황후 폐하를 뵈러 갔었죠?”
“황후 폐하요? 아, 네. 그렇습니다.”
“그날 그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상세히 얘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