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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91)화 (9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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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달콤한 기억이 떠오르자 마음이 간지러웠다. 호숫가에서 불어온 실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처럼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노래 듣기 좋았어요, 폐하.”

난 몸을 숙여 속삭이고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가 듣지 못해도 좋았다. 당장 전하고픈 마음을 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하드엘의 손이 따스해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난 다시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두 눈을 감았지만 방금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잠이 오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울렁거리던 느낌. 그건 뭐였을까.’

나는 배 위에서 휘청거리던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어지럽긴 했지만 멀미는 아니었다. 순간적이었지만 굉장히 뜨겁고 아린 느낌. 분명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혹시 에스타란토의 힘과 연관되어 있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시스만 장로를 찾아가 봐야…….

그때, 무언가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익숙한 호흡. 익숙한 향기. 하드엘이었다. 갈증을 축이기라도 하는 듯 입술을 핥는 감촉이 선명했다.

내 손을 쥔 하드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깐 떼어졌다가 다시 닿은 입술은 꽤 오랜 시간 머무르다 떨어졌다.

나는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놀라 눈을 떴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하드엘은 어느새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며 태연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짓궂음에 나는 그를 흘겨봤다.

“방금 뭐예요?”

“먼저 입술이 닿은 건 황후 그대요.”

“저는 이마에…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께서는 방금 주무시고 계셨잖아요.”

“그랬었지. 아깐.”

아까? 그럼 이미 깨어난 지 오래란 뜻인데.

“제 앞에선 매번 잠든 척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번엔 진짜 잠들었었소. 당신이 내게 귓속말했을 때 깼을 뿐이지.”

은근히 되바라져 가지고!

여전히 노려보자 그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내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인데 그의 눈빛이 닿은 곳은 화끈거리기만 했다. 입술이 닿았던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도 복수할 거예요.”

“복수? 어떤 복수?”

막상 말을 던졌지만 생각해 둔 게 없었다. 뭐라고 하지?

“황후?”

“저도 폐하께 입을 맞출 겁니다. 복수로는 그게 좋겠네요.”

원수에게 원한을 갚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에게 애정을 갚는 복수이니 그게 합당하겠다. 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드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차오른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복수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 * *

“아가씨,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벌써 며칠째 굶고 계시잖아요.”

-쿵!

온갖 물건이 벽에 부딪치고 바닥에 팽개쳐졌다.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원래 화병이었던 깨진 유리 조각이 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옆으로는 갓 피어난 생생한 꽃잎이 짓이겨져 버려져 있었다.

“됐어! 다 됐으니까 나가, 나가라고!”

귀가 아릴 정도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식사를 챙겨온 잔느는 고막을 얼얼하게 하는 괴성에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어 물러날 수가 없으니 발만 동동 굴렀다.

“공작님께서 직할지의 대리인을 만나러 가신 지 벌써 수일이 지났습니다. 마님의 무덤까지도 다 들리셨다 하시니 이제 곧 저택에 돌아오실 거예요. 아가씨께서 식사도 안 하시고 며칠 내내 방 안에만 머무셨단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공작님께서 많이 걱정하실 겁니다.”

“걱정? 누가, 아버지가 날? 진짜 그렇게 생각해?”

“아가씨, 제발 한 술이라도 드세요.”

“…가.”

“아가씨!”

“유모, 내가 말로 하는 건 마지막이야. 내 몸에 상처라도 나야 정신을 차리겠어?”

레이샤는 제 손에 쥔 신문을 구기며 절절매는 유모를 노려보았다. 길고 하얀 손이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상처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악! 나가라고!”

레이샤는 신문을 갈기갈기 찢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놀란 유모가 식사를 탁자에 내려놓고 황급히 다가왔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죄다 황후, 황후 찬양을 하는데!”

“금방 사라질 여론입니다.”

레이샤는 제 등을 다독이는 유모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유모는 도무지 생각이라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사라질 여론? 황후는 염문설만 해명하려 한 게 아니라 작정하고 불화설까지 일축시키려는 거야. 일부로 이때를 노려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작정한 거라고!”

번외 기사까지 나가 폐하와 황후 그 여자의 이야기에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데 여론이 사라져? 일만 잘 처리했어도 이딴 여론은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 기자만 잘 막았어도!

‘잠깐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거… 유모 탓이잖아?’

레이샤는 섬뜩하게 눈을 뜨고 잔느를 노려봤다. 붉어진 자신의 손등은 신경 쓰지도 않고 레이샤의 등을 계속해 쓸어 주던 잔느는 흠칫하여 스르르 손을 내렸다.

“유모.”

“네, 아가씨.”

“유모가 양심이 있으면 책임지고 내 뒤통수를 친 그 기자를 죽여.”

“네, 네?”

“전부 유모가 잘못해서 일을 그르친 거잖아. 잘 처리했다며? 잘 처리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어?”

“하지만 저는…….”

잔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레이샤는 그런 유모의 턱을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방금까지 울분을 토하며 고함을 치던 것도 잊고 레이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왜? 못 하겠어?”

“아가씨, 그건 자, 잘못된 행동입니다.”

“내가 아니라 유모가 죽일 거라니까.”

두려움인지, 염려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북받친 잔느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잔느는 레이샤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이건 아닙니다. 이건 정말……. 아가씨께선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여린 분이셨습니다. 하녀의 손등에 난 상처 하나까지도 신경 써 주시는 고운 분이셨어요. 아가씨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제발 예전 제가 알던 아가씨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세요……. 흐윽, 흑.”

잔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레이샤는 웃음기를 지우고 그런 유모를 빤히 바라봤다. 푸석한 뺨을 타고 굵은 눈물 줄기가 흘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울지?

울고 싶은 건 난데. 저렇게 눈물을 쏟고픈 건 정작 나인데.

한참 멍하니 있던 레이샤는 악에 받친 생각과는 별개로 팔을 뻗어 옷소매로 유모의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됐어. 유모가 못 하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돼. 그러니까 울지 마.”

레이샤가 무심하게 몸을 일으켜 일어나자 유모는 주저앉은 채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붙들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아가씨!”

“내가 알아서 해. 신경 꺼.”

“폐하께서 엘리움, 그 기자의 호위로 황실 기사를 붙였습니다!”

“뭐? 황실 기사?”

레이샤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간 방 안에만 박혀 지냈으니 외부의 소식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신문에 실리지 않은 지금 저 이야기는 그녀에게 있어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내가 이렇게 있을 게 아니었는데.

호위를 붙였다면 이미 늦었다. 안 그래도 협박자가 누구인지에 관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지금 호위까지 뚫어 가며 기자를 죽였다간 일이 커질 수 있었다.

‘자칫하면 내가 한 일이라는 게 밝혀질지 몰라.’

그 괘씸한 도둑년이 보석을 받아놓고 기사에 협박이니 뭐니 그딴 말을 적어 놓는 바람에!

“되는 일이 없어!”

“아가씨, 며칠간 안정을 취하세요. 잘 먹고 잘 쉬고 그렇게요! 상황이 나아질 거예요. 거슬리는 여론 또한 잠잠해질 겁니다.”

레이샤는 주먹을 쥐고선 이를 바득 갈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그럼 내가 황후에게 당한 꼴이 되는 거잖아. 말도 안 돼.

“기자를 죽일 수 없다면 황후를 괴롭게 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우선 벨리타 영애를 불러야겠어.”

그녀는 유모를 일으켜 세우고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모도 더 이상 레이샤를 말리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한 눈으로 그녀의 행동만 바라봤다.

레이샤는 벨리타에게 편지를 적어 보낼 만한 적당한 종이를 고르기 위해 서랍의 맨 위 칸을 열어젖혔다.

그 손길은 다급하고 또 신경질적이었다.

“주제를 알고 설쳐야지. 두고 봐. 내가 어떻게든…….”

그런데 서랍의 구석에서 구겨진 무언가를 발견한 레이샤가 제자리에서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

“아가씨!”

가까이 다가가서 본 레이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왜 잊고 있었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레이샤의 시선이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황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

레이샤가 얼빠진 눈으로 내려 보고 있는 것은 바로 황후의 편지였다.

그 편지는 서랠 왕국의 왕자가 참여했던 다과회 날 벌어진 일을 사과한 자신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기도 했다.

“황후에게 편지를 보냈었어. 내가…….”

벨리타 영애가 떨어뜨린 쪽지를 황후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만에 하나. 황후가 쪽지와 내가 보낸 편지의 필적을 대조해 봤다면? 그래서 만약 무언가라도 알아챘다면?

황후는 너무 느긋했다. 초조한 건 자신뿐이다. 그래, 그것부터가 뭔가 이상했어.

벨리타 영애가 자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낸 여자다.

그 뒤에 배후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쪽지를 주운 봄의 무도회 날, 그때라도 당장 벨리타 영애를 불러 끈질기게 전말을 캐물어야 정상 아닌가?

뒤에 있는 배후를 잡지 못할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싶은 거라면, 가십지의 기자를 매수한 게 벨리타 영애인 걸 알아챈 그날도 영애를 궁으로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쪽지를 지닌 사실도 숨겼어야 했고.

근데 황후는 벨리타 영애에게 모든 사실을 밝혔다. 제 발로 널 조종하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라는 듯이.

마치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결국에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설마 진짜 황후가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른 척했던 거라면?”

등줄기에 바람이 스친 듯 서늘했다.

“유모.”

레이샤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잔느를 불렀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황후의 간사함에 치가 떨린 것이지.

당장이라도 분노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아스러지도록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벨리타 영애에게 가서 궁으로 불려간 날, 황후와 나눴던 대화를 빠짐없이 다 적어 보내라 해. 생각나는 건 모조리.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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