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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90)화 (9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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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그만 돌아가자고?”

“네. 노를 젓는 이의 팔도 생각을 해 주셔야지요.”

그는 정말 나와 함께 호수 위에 하루 종일 떠 있을 작정이었던 건지 뱃놀이를 시작한 지 이미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돌아가자 말하니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멀리에서 힘겹게 노를 젓는 남자를 보았다.

저렇게 팔이 흐늘거리는데……. 내가 도와주고 싶을 정도였다.

“팔이 아픈가?”

“네? 아닙니다. 머, 멀쩡합니다!”

황제가 저리 묻는데 팔이 아프니 돌아가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배를 돌리게 할 방법은 하나였다.

“제가 조금 멀미가 날 것 같아서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속이 약간 울렁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다지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뭐?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아니, 멀미가 난다는 게 아니라 날 것 같다는…….”

“당장 배를 돌려라.”

“예!”

노를 젓는 이는 하드엘의 다그침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재빠르게 뱃머리를 돌린 남자는 시녀들과 기사단이 있는 곳을 향해 신나게 노를 저어 갔다.

“괜찮은 것이오?”

“더 울렁거리지는 않고?”

“흔들림 없게 배를 몰아라!”

단, 남자의 팔을 지켜 주는 대신 나는 가는 내내 하드엘의 유난스러운 보호를 받아야 했다.

배는 호수 중심을 벗어나 빠르게 땅에 가까워졌다. 기사단과 시녀들, 넬슨 백작까지. 언제 봐도 반가운 얼굴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잡으시오.”

하드엘은 내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먼저 내려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그런 하드엘의 손을 잡으려 걸음을 뗐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걸음 내딛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배에서부터 묘하게 울렁거리던 그 느낌이 한층 강렬해졌다.

아주 잠시 불덩이가 들끓는 듯 몸속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은 배 밖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어찌 손써 볼 틈도 없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호수에 빠질 걸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

나를 향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하드엘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빠지면 하드엘이 걱정할 텐데. 감기라도 들면 괜히 뱃놀이를 하자 했다면서 자기 탓을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방금 전에 그 느낌은 뭘까? 멀미?

‘아니야, 그거랑은 좀 달라.’

아무튼 이쪽은 물이 깊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빠져도 안전할 테니. 그렇게 호수의 푸른 물에 풍덩 빠지는 상상까지 마쳤을 때였다.

문득 내가 생각을 너무 오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빠졌다면 진작 빠졌어야 했다. 아직까지 멀쩡할 리가 없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우선 물에 빠지지 않은 건 확실했다. 누군가 나의 양 팔목을 붙잡아 준 덕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폐하? 아델 경?”

제일 먼저 보인 건 사색이 된 하드엘이었다. 뒤이어 안도하는 아델의 모습이 보였고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녀들의 모습도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내 상태는 좀 웃겼다. 나는 하드엘과 아델, 그 둘에게 각각 팔목을 잡힌 채로 떨어질 듯 말 듯 선미에 간신히 발끝을 붙이고 서 있었다.

아니, 차라리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하는 편이 맞을까.

“저기 아델 경… 조심스레 놔 줄래요? 이제 내가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폐하께서도요.”

하드엘은 내가 멀쩡히 말하자 그때야 커다란 숨을 토해 냈다. 그는 놓아 달라는 내 말은 듣지 않고 옆에 있는 아델과 함께 나를 끌어당겼다.

결국 나는 조금 우스운 꼴로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왜 그리 굳어 있어요?”

괜히 민망해 멋쩍게 웃자 하드엘이 마른세수를 하듯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가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동시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드엘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들렸다.

“전 멀쩡해요, 폐하. 순간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그는 대꾸도 않고 나를 놓아 주고선 백작 부인을 향해 명했다.

“당장 의원을 대기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심각한 게 아닌데. 게다가 지금은 멀쩡해요. 정말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입니다. 의원은 필요 없어요.”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심지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나를 부축하기까지 하며 억지로 내 걸음을 옮기게 했다.

“당신이 필요 없다 해도 내가 필요해.”

하드엘의 단호함에 난 결국 황후궁에 돌아가 즉시 의원을 들여야 했다.

“그간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 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 가 보거라.”

의원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하드엘의 고집에 못 이겨 억지로 침대에 누워 있던 난 그 상태 그대로 의기양양하게 눈을 번쩍 뜨며 하드엘을 바라봤다.

“보세요. 문제없죠?”

하드엘은 이불을 끌어당겨 목끝까지 덮어 주며 부드럽게 내 뺨을 쓸었다.

“플로리아, 당신이 이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해도 나는 오늘 당신을 의자에 앉힐 생각이 없어. 못 들었소?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말.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일어날 생각 마시오.”

“…….”

“내가 나가고 몰래 일어나 서재에 갈 생각도 말고. 당신이 아끼는 시녀들도 오늘 하루는 내 뜻을 따르기로 했소.”

내 말수가 줄자 그가 대번에 내 마음을 읽었다. 나는 뜨끔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런 생각은 한 적 없다며 뻔뻔하게 거짓을 말했다.

그리고 하드엘이 괜한 자책을 할까 봐 뱃놀이는 아주아주 즐거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그렇게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낸 건 오랜만이었으니까.

하드엘은 어두웠던 표정을 풀고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와중에 내 걱정까지 하는 것이오?”

“단지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폐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당신은 매번 내가 할 말을 가로채는군.”

“제가 그랬나요?”

“그랬지 항상.”

내가 픽 웃자 그도 날 따라서 좀 더 환히 웃었다. 뒤이어서는 아기라도 재우듯 나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편히 푹 자시오.”

“누가 자장가라도 불러주면 딱이겠네요.”

“듣고 싶소?”

“네?”

* * *

“잠이 오지 않는다더니.”

하드엘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잠들어 버린 플로리아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려 보았다.

재우려 했던 건 맞지만 고요한 정적이 아쉽기도 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편안히 잠든 것을 바라보는 게 좋기도 했다. 그조차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하드엘은 괜히 플로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실크같이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웃는 모습도, 화를 내는 모습도, 찡그린 모습도 전부.

이 예쁜 눈으로는 나만 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황후 폐하.”

그때. 침실 문밖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드엘에게도 조금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는 혹시나 플로리아가 깰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문 쪽을 향해 걸었다.

“무슨 일이지?”

문 너머의 남자는 예상했던 대로 신전 기사 아델이었다. 그는 아델의 등장을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아까 황후를 구한 그의 공을 떠올리며 애써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아델은 자신을 앞에 두고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황후를 찾았다. 저 걱정스러운 눈길이 못 견디게 거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드엘은 무심하고 침착한, 상당히 그다운 어조로 최대한 친절히 답해 주려 노력했다. 이것이 플로리아가 원하는 것일 테니. 이유는 그뿐이었다.

“황후는 이제 막 잠들었으니 넌 그만 돌아가거라.”

더군다나 저자는 황후에게 도움이 되는 자였다.

그래, 신전 기사로서 걱정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되뇌자 이 상황에까지 질투하는 자신이 미친놈 같기도 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신 건가요?”

하지만 아델의 조급함이 그의 참을성 잃게 했다.

황후를 향한 저자의 태도가 자신과 은근히 닮아 있는 게 불쾌했다. 다른 신전 기사들과는 묘하게 다른 저 눈빛도.

하드엘의 찌푸려진 눈가에 언짢은 기색이 깃들었다. 무례한 첫 만남도, 황후의 옆에 붙어 지나치게 알랑거리는 것도 그에 관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드엘은 날이 선 눈으로 그를 마주하며 잠시 찾아든 침묵을 깼다.

“왜 자꾸 선을 넘지? 그때도 말했을 텐데. 충성심이 과하다고.”

무거운 공기가 숨 막히게 그들을 억눌렀다.

아델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공허하게 빛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저는 오로지 신전 기사로서 황후 폐하를 걱정하여 여쭈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알지. 그대는 아주 충직한 신전 기사니까.”

대화가 길어지자 하드엘은 잠든 플로리아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에게 잠시 닿았던 따스한 눈길은 허상인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아델을 마주 보는 그 눈빛에는 차갑다 못해 싸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가끔 정도가 지나쳐. 알고 있나?”

“…….”

하드엘은 말이 없는 아델을 보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내리뜬 눈으로 자신과 아델 사이의 틈을 내려다본 그가 천천히 눈을 들고 말을 이었다.

“신전 기사로서 황후에게 다가올 수 있는 거리는 딱 거기까지야. 그 이상 황후와 가까워지려 하지 말거라.”

자신을 거치지 않고선 절대 플로리아에게 닿을 수 없는 선. 그가 바라본 틈은 그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 * *

“지금이 몇 시… 폐하?”

눈을 뜨자 하드엘이 보였다.

그는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내 손을 잡은 채 침대의 가장자리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어 있었다.

결국 안 돌아갔구나.

나는 살짝 몸을 틀어 자유로운 왼손을 뻗어 그의 볼을 찔러 보았다. 미동도 없이 잠든 그의 모습을 보는데 절로 흐뭇해졌다.

이 사람만 보면 자꾸 웃음이 나온다. 그냥 자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러니 참 이상했다.

하드엘도 그럴까?

포근해진 마음으로 얼굴을 바로 하니 문득 천장 위로 보랏빛 어스름이 번진 게 보였다.

창가 밖을 살피니 하늘이 어둠에 조금씩 젖어 들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진짜 피곤하긴 했나 봐.”

하드엘의 낮고 조용한 노랫소리를 기분 좋게 들었던 것, 딱 거기까진 기억이 났다. 내 등을 토닥여 주던 그의 손길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잠들었던 기억도 없는 걸 보면 정말 곤히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드엘의 노래 덕분인가? 잠이 잘 오는 목소리이긴 했지. 서투르게 가사를 읊던 그가 어렴풋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자장가는 그냥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별 뜻 없이 장난삼아 한 말이었는데 정말 노래를 불러 줄 줄은 몰랐다.

난 잠시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예쁜 노랫말을 어색하게 소리 내던 입술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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