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집착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니.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의 심중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하드엘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같더니 내가 말이 없자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집착한다는 그 황제는 하루 종일 황후의 곁에 붙어 다닌다지? 하지만 실상은…….”
그는 마치 소설책 속 인물을 설명하듯 소문 속 자신의 이야기를 읊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엉뚱하게 내 책상 위의 마법서를 노려봤다.
“제 소중한 마법서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왜인지 모르겠소?”
“네,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이 바쁜 게 저것 때문인 듯싶어서. 저 책만 없어지면 나도 그 황제처럼 밤새도록 당신 곁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툭.
뭔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 하드엘의 뒤를 보니 시녀 한 명이 넋을 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죄, 죄송해요!”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서둘러 떨어뜨린 책을 주웠다.
저건 침대에 두고 읽었던 책인데. 서재에 도로 꽂으러 온 거구나.
“저기 그거…….”
“황후 폐하,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녀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닫고 홀연히 사라졌다.
“방금 뭐죠?”
“글쎄?”
나는 닫힌 문과 눈앞의 하드엘을 번갈아 보다가 방금 그가 한 말을 되짚었다.
‘밤새도록 곁에…….’
하, 아무래도 그 말 때문에 나간 게 맞는 것 같아.
저렇게 부끄러워하며 나가니 오히려 내 쪽이 더 당황스러웠다. 누가 보면 야릇한 말이라도 주고받은 줄 알겠어. 번외 기사에 관한, 아주 건전한 대화 중이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폐하의 말씀을 듣고 놀라서 나간 것 같습니다.”
“놀랄 말을 했던가?”
“폐하께서 밤새…….”
왠지 나도 말이 안 나온다. 밤새 곁에 머문다는 그 말이 괜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탓에. 설마 나도 얼굴이 붉어지진 않았겠지.
“흠, 그나저나 폐하. 번외 기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제게 하실 부탁이라는 건 뭔가요?”
“들어줄 것이오?”
그가 일어나 책상을 짚고 섰다. 그러더니 다른 곳은 볼 수도 없게 넓은 어깨로 내 시야를 가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방금 들어온 시녀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질투를 하는 게 내 눈엔 빤히 보였다.
귀여워.
하드엘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다들 놀라 쓰러지겠지. 특히 넬슨 백작.
음, 하드엘은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들어 본 뒤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말을 끝내자 그가 허리를 굽혀 다가왔다. 거리가 너무나 가까운지라 그의 눈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드엘은 이렇게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서야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뱃놀이 갑시다.”
“네? 언제요?”
“지금.”
순간 눈웃음을 짓는 그를 보고 무턱대고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뱃놀이라면 준비만 해도 며칠인데 당장 가자니. 배를 만들어 적당한 물가에 옮기는 것만 따져도 최소 일주일이었다.
“준비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황궁 안 호수에 이미 배를 띄워 두었소.”
“황궁 호수엔 배가 없었지 않나요?”
“만들라 했지.”
“아하…….”
이 남자 작정하고 준비를 끝낸 후에 묻는 거였다. 거기다 배까지 띄웠으면 어떻게든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였고.
자신의 소원이란 말까지 덧붙이며 하드엘은 내 답을 기다렸다.
사실 황궁 안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긴 했다. 게다가 소원이라는데.
“좋습니다. 안 그래도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어요.”
읽고 있던 마법서를 덮자 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하드엘은 곧바로 잡은 손을 당겨 나를 일으켰다.
“가시죠, 에스타란토.”
* * *
“황후.”
“예, 폐하.”
“저자는 왜 따라온 것이오.”
하드엘은 앞을 보고 걸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낮의 태양 빛을 가득 머금은 눈빛은 유독 날카로워 보였다.
그것이 내 뒤를 따르고 있을 아델을 향한 것임을 난 모르지 않았다.
“신전 기사잖아요. 그리고 아델 경 말고 다른 신전 기사도 함께 왔는걸요?”
지금 나를 따르는 신전 기사는 아델을 제외하고도 바릴호움과 릴리. 이렇게 두 명이 더 있었다.
그런데 하드엘은 그들 중 아델만을 경계했다.
왜 유독 아델에게만 쌀쌀맞게 구는 건지. 첫 만남이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어서 그런가.
“아델 경은 좋은 사람이에요. 폐하께서도 겪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기에 그냥 둔 것이오. 아니었다면 당신 곁에 둘 이유가 없지.”
“아델 경을 미워하시나요?”
“미워하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난 그냥 저자가 싫어.”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놓고 가시를 박았다. 기필코 싫어하겠다는 저 의지. 어떻게 보면 참 대단했다.
나는 뒤를 돌아 아델을 살폈다.
그나마 아델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 대화가 들리지 않을 테니.
“어디 보시오?”
하드엘은 내 한쪽 뺨을 부드럽게 감싸 시선을 끌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방금과는 다르게 아주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델을 향해 싸한 눈길을 보낸 걸 이미 다 본 후였다.
“폐하, 누군가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에요.”
“그렇지. 그대가 그렇다면 잘못된 행동이지.”
그는 다정한 눈으로 내 얼굴을 훑으며 온화하게 답을 했다.
“그러면 아델 경과 사이좋게…….”
“그건 별개이고.”
이럴 줄 알았어.
“폐하, 도착했습니다.”
결국 그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들려온 시녀의 말에 주변을 살폈다.
푸르른 빛깔의 호수가 눈앞에 넓게 펼쳐졌다. 맑은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호수 위엔 탐스러운 꽃으로 장식된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놀잇배치고는 꽤 커다란 배였지만 호수가 넓은지라 이질감이 없었다. 오히려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것들은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상쾌한 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물이 흐르니 수목의 향기가 한층 짙었다.
좋은 날에 좋은 사람과 이런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평온했다.
“마음에 드시오?”
“네, 너무.”
이 기쁨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벅차올라 난 어린아이처럼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드엘은 쉬지 않고 감탄하고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놀잇배 가까이로 날 이끈 것은 그 후였다.
“조심하시오.”
“그 말씀 지금 다섯 번은 넘게 하고 계십니다.”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인지 배에 오르는 내내 그는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맞잡은 하드엘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그가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큰 움직임에도 배는 흔들리기는커녕 잠잠하기만 했으니 그의 이런 걱정은 확실히 헛된 것이었다.
내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앉자 그제야 하드엘은 노를 젓는 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은은한 꽃향기를 품은 배가 서서히 움직이자 잔잔한 호수 위에 파문이 일고 뱃전 주위로 물결이 퍼져 나갔다.
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꼭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너무 아름답지.”
그는 내가 가리킨 호수의 물결은 쳐다보지도 않고 턱을 괴고 나를 보며 말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렇듯 풍경을 즐기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뱃놀이는 나 혼자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왜 저만 보고 계세요?”
“이쪽을 보는 게 더 즐거우니까?”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내뱉는 말은 뻔뻔했다. 사랑스러웠고.
그의 농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바른말을 이었다.
“주변 풍경을 즐기셔야지요. 이러면 열심히 준비하신 뱃놀이가 의미가 없게 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소. 같이 있고 싶었고. 둘 다 성공했으니 애초에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봐야지.”
“방금 전 말씀, 농담이 아니었나요?”
“농담?”
그가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나를 보는 게 즐겁다는 그 말. 그냥 진심으로 한 말이었구나.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노를 젓는 이를 슬쩍 보았다. 남자는 오로지 노를 젓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워낙 배가 큰지라 우리 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우리 대화가 들리진 않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나는 하드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풍경이 지루하시면 절 계속 보세요. 특별히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허락해 줘서.”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바람에 흐트러지는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쏟아지는 햇살, 여유로운 공기. 그 안에서 그와 이렇게 애정 어린 눈빛을 나누고 달콤한 이야기를 속닥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여느 평범한 연인이 된 것만 같아서.
나는 넓은 호수를 등지고 앉은 하드엘을 눈에 담았다.
레이샤든, 흑마법이든 그와 나를 괴롭게 할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조리 잊고 싶었다.
그 대신 하드엘의 연한 금빛 머리칼과 내가 담겨 있는 저 눈동자만을 기억하고 싶었다.
“폐하, 앞으로도 오늘같이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겠지요?”
“당연하지. 더 좋은 날들만 가득할 것이오. 내 장담하지.”
맞아.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니까. 적어도 이번 생만큼은.
하드엘은 머리를 넘겨 주던 손으로 내 눈가 주위를 쓸었다. 나른한 기분에 눈을 감자 그는 다가와 내 눈에, 볼에,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다 되었습니까?”
“아직.”
마지막으로 그는 이마에까지 입을 맞추었다. 그 후에야 나는 스르르 눈을 뜨고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만 게을러지겠습니다.”
“매일 게으르면 안 되는 것이오?”
난 픽 웃으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하드엘은 넓은 품을 내주며 나를 감싸 안았다.
뒤이어,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는 어떻게 당신에 대한 마음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되돌아보면 난 당신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는데.”
“혼자 단단히 착각하신 거죠.”
고개만 살짝 들어 장난 섞인 목소리로 그를 나무라자 하드엘은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내 말에 진지하게 수긍하고 나섰다.
“맞소. 내 오만이었지. 가끔은 끔찍한 상상을 해. 내가 만약 아직까지도 그 오만 속에서 당신을 놓치고 있었더라면, 그러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의 눈엔 순간 두려운 기색이 들어찼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하드엘은 나를 안은 두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마치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런데 조금 숨이 막히는데…….
“폐, 폐하?”
허덕이며 하드엘을 부르자 그가 놀라 다급히 팔을 떼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나를 샅샅이 살폈다.
“괜찮소?”
“힘 조절을 하셔야겠습니다.”
“미안하오. 아프게 하려던 건 아닌데.”
하드엘은 흔치 않게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러니 귀엽다는 거야.
“폐하, 혹시 그 얘기 들어 보셨어요?”
“무슨 얘기?”
“귀엽다는 얘기요.”
한참 눈만 깜빡거리던 하드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슨 얘기?’라고 내게 재차 물었다. 나는 똑같은 답을 해 주었고.
“처음 들어 보세요?”
“난생처음이오.”
“이상하네.”
당황해하던 하드엘이 꼭 이 호수 같은, 그런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찰랑이는 물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어깨너머 은빛 햇살이 내려앉은 초록 풍경과 어우러진 그의 웃는 모습은 말도 안 되게 청량했다.
“막상 들으니 나쁘지는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