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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87)화 (8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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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그림 속의 이 여자를 보았다고?”

“그, 그렇습니다.”

벨리타의 용모가 그려진 화지를 가리키자 나이 지긋한 여인이 잔뜩 긴장하여 답했다.

큰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수도까지 따라오긴 했으나 궁에 불려오는 것까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사는 곳이 리베른 영지, 그럼 그곳에서 이 사람을 봤다는 것인가?”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 보이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는 듯 보였다.

리베른 영지라면 수도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다. 리베른 영지에 데보니안가의 별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백작 영애씩이나 되는 벨리타가 그곳엔 무슨 일로 머물렀던 거지?

“그림 속 이 여자가 리베른에서 무엇을 했고, 또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그리 오래 머물렀던 건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그게… 딱히 목적이랄 것은 없었습니다. 피사트 그 살인자 녀석이랑 사랑에 빠져서 리베른 영지에 살림을 차렸던 것뿐이었으니까요.”

“살림을 차려? 그것도 살인자와?”

아벨리움의 형법에서 살인죄는 엄히 다스려진다. 그러니 살인을 저지른 자의 석방은 드물다 못해 거의 없는 일이라 보는 게 맞았다.

“살인을 저질렀다면 옥에 있어야 할 텐데.”

“피사트 얘기를 하자면 사연이 좀 깁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를 우발적으로 죽인 거였어요. 당시엔 나이도 어렸고요. 그래서 복역 기간이 짧았죠. 아무리 그래도 제 부모를 죽이다니…….”

그녀는 뒷말을 중얼대다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요리조리 굴리더니 또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여자는 피사트가 살인자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그 후에 그 집에서 난리가 났었지요. 물건 부수는 소리 하며 고함 소리 하며, 한동안 엄청 요란했습니다.”

“그랬군.”

비록 학대하는 부모를 죽인 것이라고는 하나 살인은 살인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사연이 안타까워 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재판정에서 살인죄라 판결이 난 이상 그는 스스로 저지른 죄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 귀족 영애인 벨리타에겐 충분히 약점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사교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피사트가 살인자인 걸 몰랐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끝나는 거 아닌가. 물론 신분의 차이로 인한 잡음은 있겠지만 솔직히 이 일로 레이샤에게 끌려다니는 건…….

“애만 들어서지 않았어도 여자는 벌써 도망갔을 거예요.”

“애라니? 임신을 했었다는 건가?”

한동안 충격에 정신이 멍했다. 벨리타에게 아이가 있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예, 마을에 정착하고 배가 부르기 시작했으니 아이는 훨씬 전에 들어섰을 거예요.”

“그럼 그 아이는 지금 피사트라는 자가 키우나?”

데보니안가에 아이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벨리타가 키우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아니요.”

여인이 자못 심각하게 표정을 바꿨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엔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잡혔다.

“산파를 부르는 것 같기는 했는데 집에서 애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모양이더라고요. 피사트도 여자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고요.”

나는 짤막한 탄식을 흘렸다. 벨리타 엔느 데보니안. 처음으로 그 여자가 안타까웠다.

태어나 빛도 보지 못한 아이, 레이샤가 잡은 벨리타의 약점이라는 게 바로 그 아이인 듯싶었다.

벨리타가 무릎까지 꿇어 가며 레이샤를 보호하려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나 절실해 보이던 이유도.

살인자의 아이까지 낳았다면 벨리타가 아무리 피사트가 살인자임을 몰랐다 해도 모든 사실을 해명할 수가 없게 된다. 아니, 어떠한 해명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벨리타는 사실상 아무 죄가 없다 해도 데보니안가 전체에 치명상을 입힐 것이 확실했다.

그렇기에 벨리타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라도 죽은 아이의 존재를 밝힐 수 없었을 테고, 이 비밀을 아는 레이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벨리타가 죽을힘을 다해 감췄을 이 사실을 레이샤는 어떻게 알게 된 걸까? 난 그 부분이 궁금했다.

“혹시 그즈음에 마을에 다른 외부인이 찾아온 적이 있는가?”

내가 알기로 리베른 영지에는 영지민이 많이 없다.

땅이 척박하고 풍광도 좋지 않아 어떠한 목적을 위해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도 적은 걸로 알고 있다.

리베른 영지에 살면 이웃의 집에 있는 숟가락 개수까지 알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니, 당시 누가 찾아오기만 했다면 외부인인지 아닌지는 구별하기 쉬웠을 것이다.

만약 레이샤가 벨리타의 비밀을 캐기 위해 리베른에 간 적이 있다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확률이 컸다.

“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 걸로 봐선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따로 알아봐야 하는 건가. 시간이 꽤 걸리겠어.

“아니, 충분히 도움이 되었네.”

내가 눈짓을 보내자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금이 담긴 주머니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만 가 봐도 좋다 말하며 꽤 묵직한 주머니를 들어 여인에게 건네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아!” 소리를 내며 짧게 손뼉을 쳤다.

“생각났습니다! 귀해 보이는 아가씨 한 분이 피사트를 찾아왔었어요.”

“얼굴을 봤는가?”

“모자로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얼핏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었습니다. 연갈색 눈에 검은 머리! 이제 기억이 나네요!”

그녀의 기억 속 외부인은 레이샤의 외양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레이샤가 벨리타의 비밀을 캐기 위해 리베른 영지에 방문한 것이 맞지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넘어가자니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리베른 영지를 방문했다는 건 벨리타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갔다는 건데.’

혹시 우연히 리베른에 들렸다가 벨리타를 봤나? 하지만 그럴 확률은 너무 희박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여자의 말이 나의 모든 추측을 뒤엎었다.

“피사트 그 녀석이 그 아가씨가 올 때면 엄청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헤벌쭉 웃는 걸로도 모자라 얼굴까지 발개져서는. 후에는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그 그림 속 여자를 데려왔기에 그 아가씨에 대한 마음은 정리했나 보구나. 그래, 별 수 있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기가 죽고 한 달쯤 지났나? 병을 앓는 와중에도 그 아가씨가 왔다니까 벌떡 일어나지 뭐예요?”

“잠깐. 그럼 그 외부인이라는 여자가 리베른 영지에 방문한 게 한 번이 아니었단 말인가?”

“네. 피사트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가 리베른에 오기 아홉 달 전쯤에 그 아가씨가 갑자기 이곳을 찾았었어요.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이요. 그리고 걸음이 끊기는 듯싶더니 아기가 죽고 또 한 번 왔고요. 참! 피사트가 그 댁에서 정원사로 일을 했었다고 그렇게 들은 것 같아요. 일을 그만둔 사용인과 아직까지도 인연을 이어 가는 게 참 드문 일이라 다들 신기하다 했었죠.”

살인자의 아이를 낳게 된 벨리타. 그걸 알고선 벨리타를 협박해 이용하는 레이샤.

그런데 그 살인자 피사트가 레이샤와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다. 게다가 피사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레이샤를 흠모했고.

설마 레이샤…….

‘벨리타의 약점을 캐낸 게 아니라 네가 직접 그 약점을 만들어 준 거야? 벨리타를 이용하려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힘없이 툭 내려놓은 손이 떨렸다. 누가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을까.

살인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죽은 아이를 들먹이며 사람을 협박했다는 것도 끔찍한데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이라니.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악마보다도 더 악랄한 짓을 꾸미고 그렇게 뻔뻔하게 살 수 있다니…….

레이샤, 넌 그냥 쓰레기였어.

“황후 폐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백작 부인이 나를 불렀다. 나는 차게 식은 눈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았다.

“지금 내게 말한 이 모든 것,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될 것이네.”

그녀는 티 나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단호히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평생 이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또한 내가 찾던 이 그림 속의 여자가 누구인지 의문을 품어서도 아니 될 것이야.”

“예, 황후 폐하.”

마지막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손에 들린 금 주머니를 여자에게 넘겼다.

그렇게 대가를 손에 쥔 여자가 별궁을 떠나고, 황후궁으로 돌아온 나는 적막만 가득 찬 공간 안에서 혼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벨리타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하던 비밀을 알아냈지만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벨리타의 약점을 알아내면 나 또한 그것을 이용해 레이샤와 벨리타, 그 둘을 갈라놓을 생각이었다. 물론 말 그대로 그것이 그녀의 ‘약점’일 때만.

약점이라 불리는 게 그녀의 죽은 아이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걸 약점이라고 잡아 두는 건 비겁하고 치졸한 걸 넘어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니.

난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놓인 하얀색 봉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좀 더 기다릴까 했는데…….’

“루안.”

“예, 폐하.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봄의 무도회의 일로 폐하와 궁 밖을 나서기 전에 내가 사람을 찾아 달라 했잖아요. 기억해요?”

그녀는 내 질문에 오랫동안 눈을 굴렸다. 꽤 오래전 일이니 기억해 내는 데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음……. 아! 네! 그때 폐하께서 제게 두 장의 봉투를 건네시며 그들에게 각기 그 봉투를 보내라 하셨잖아요. 맞나요?”

“맞아요.”

그때는 하드엘에게서 목숨을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에스타란토임을 암시하는 소문을 퍼뜨려야 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데 능한 이들에게 의뢰를 한 것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시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서랍 안에 놓여 있던 하얀 봉투를 주저 없이 꺼내 들었다.

더 이상 질질 끌기가 지겨워서 안 되겠어.

공작의 실체도, 벨리타의 비밀도 내가 알아야 할 건 대부분 알았으니 이제 나도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흑마법사와 엮인 일은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유일한 대처법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속 공작가의 뒤를 캐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레이샤의 실체를 알았다는 사실이 일찍 밝혀진다 한들 여기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지루함을 끝낼 때가 왔다.

무엇보다 레이샤 네가 멀쩡히 웃고 있는 꼴을 상상하니 내 속이 타들어 가서 말이야.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루안, 그때처럼 이 봉투를 그들에게 익명으로 보내 줄래요?”

루안은 두 눈을 깜빡이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은 표정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왜요. 루안?”

“여기엔 뭐가 적혀 있는 거예요?”

“궁금해요?”

루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적혀 있냐고 물으면 답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나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서 여유롭게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의 가면을 벗길 추악한 실체가 적혀 있어요.”

똑같은 방법으로 고통을 되돌려준다는 말. 이제야 지키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소문이란 걸 그토록 좋아했던 공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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