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어느덧 하늘은 불그스름한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창가에 비쳐들던 햇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암.”
늦은 저녁까지 내 옆을 지키던 엘리움은 소리를 죽여 하품을 해댔다. 나는 그런 엘리움을 발견하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하긴 종일 날 따라다녔으니.
엘리움의 황궁 출입 허가 시간도 끝나가니 이만 돌아갈 채비를 하라 해야겠어.
“엘리움, 취재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아! 네! 된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그럼 여기서 취재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몸이 많이 힘들 텐데. 어서 돌아가 쉬게.”
“아니요.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깨달은 것이 많은 하루였어요.”
그렇게 말한 엘리움은 자신의 짐들을 정리하기 바빴다. 하지만 짐이라 해 봐야 수첩과 펜이 전부였기에 그것들을 챙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귀한 시간을 내어 취재에 응해 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기사가 잘 나와야 할 텐데. 어차피 염문이 주된 기삿거리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책만 볼 게 아니라 뭐 특별한 거라도 했어야 했나?
“너무 지루하진 않았는가?”
“전혀요. 폐하의 일상을 눈앞에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폐하께선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어떻게 그렇게 쉴 틈 없이 업무를 보시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으시는지.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엘리움은 둘밖에 없는 방 안을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토라지신 것 같던데 괜찮을까요?”
“토라져? 폐하께서?”
마력 훈련이 끝나고 하드엘을 억지로 돌려보냈던 것을 걱정해 엘리움이 저런 얘기를 꺼내지 싶었다.
엘리움이 불편한 눈치길래 그랬던 건데.
돌아가지 않겠다며 한동안 버티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드엘이 토라졌다니 말도 안 됐다.
하드엘의 토라진 모습이라. 입을 삐죽 내밀고 칭얼거리고 있을 그가 상상되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아는데 귀엽긴 하겠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폐하께서 얼마나 관대하신데.”
“아까 가실 때 분명 저를 노려보신 것 같은데…….”
“폐하께서는 그런 옹졸한 분이 아니니 걱정 말고 돌아가 보게. 더 늦으면 길이 어두워 위험하니.”
“그리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내 마지막 말에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하드엘의 토라짐에 관해 걱정하던 엘리움은 이번엔 알 수 없는 존경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훌륭한 인품을 갖춘 분이세요.”
“훌륭한 인품?”
“네. 범할 수 없는 위엄으로 다른 이를 내리누르시는 대신 자애를 보여 굽어살피시니 저로서는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고백을 한다고?
기분 좋은 말이기는 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일도 없이 평소처럼 지낸 내가 언제 엘리움에게 자애를 보였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하나 내가 그대에게 딱히 잘해 준 것이 없는데.”
“이렇게 제 안전까지 염려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이 일을 하며 이런 걱정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에요.”
“당연한 걱정이네.”
“당연하다니요. 이렇게 훌륭하신 폐하를 존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겐 오늘 이 만남이 영광입니다.”
엘리움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작정하고 꿀을 발라 놓은 게 틀림없었다. 듣기에 이렇게나 달콤하다니.
“나 또한 오늘 그대와의 만남을 오래도록 기억할 듯싶어.”
엘리움은 환히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앞으로 황후 폐하께서 해 주신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내가 해 준 말?
“어느 한쪽의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제 기사가 마음에 든다 하셨죠.”
아, 그거였구나.
사실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열의에 찬 그녀의 표정을 보니 괜히 뿌듯했다.
“앞으로 폐하의 말씀을 떠올리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기사만을 쓸 거예요.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사를 말이에요.”
결의를 다짐하는 그녀의 눈은 유독 빛났다. 내 일도 아닌데 나까지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기분 좋네.
“나도 그대를 응원하겠네.”
***
엘리움의 입가엔 미소가 한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분명 일을 하러 온 것이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한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멀쩡했다. 오히려 두 눈은 더 또렷해졌다.
‘저리도 훌륭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동안의 악한 소문이 사실처럼 믿어졌었는지. 어서 가서 기사를 써야겠어.’
길을 걸으며 황궁 안에서의 순간순간을 되새기던 그녀는 문득 염문설 취재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자신이 한참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단식 이후 황후의 일상을 취재한다는 것은 그저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초반 염문설에 관해 질문을 한 것을 빼면 자신은 그 핑계뿐인 취재에 한껏 집중한 셈이었다.
“상관없겠지. 염문설에 관해서도 내 눈으로 보고 들은 걸 적으면 되니까.”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들뜬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황궁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몇 걸음 떼지도 못했을 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몸을 돌리자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며칠을 굶은 듯 깡말라 있었다.
여자는 불안한 듯 좌우를 살피더니 엘리움을 향해 다가왔다. 그에 엘리움은 무의식적으로 한발 물러나며 미간을 좁히고선 물었다.
“지금 절 부르신 건가요?”
“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시죠?”
“…누구신가요? 그보다 황실을 취재했다는 걸 어떻게 아시는 거죠?”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겠어요? 아주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는 엘리움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대신 으슥한 골목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단순히 호기심에 여자를 뒤따라가던 엘리움은 얼마 가지 않아 자리에 멈춰 섰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간 위험에 처했을 때 소리를 질러도 들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여기서 말씀하세요. 내가 황실을 취재하고 나왔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죠?”
여자는 더 조용한 곳을 찾아가고픈 눈치였으나 단호한 엘리움의 말에 결국 가까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 겨우 입을 열었다.
“저도 모릅니다.”
“뭐라고요?”
“아는 게 없어 뭐라 답을 해 줄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당신의 생김새를 말해 줬고 나는 그것으로 사람을 찾았을 뿐입니다.”
여자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두서없이 하는 말도 수상하긴 매한가지였다.
엘리움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내게 할 중요한 얘기라는 건 뭐죠?”
그러자 여자는 뜸도 들이지 않고 말을 뱉었다.
“오늘 취재한 내용을 기사로 쓸 때 그분께 불리하게 내용을 적어줘요.”
“뭐라고요?”
엘리움은 여자의 황당한 요구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다짜고짜 불리하게 내용을 적으라니.
그분이라면 황후 폐하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 취재의 대상이 황후 폐하였으니까.
한참 얼떨떨하게 서 있던 엘리움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그 여자에게 물었다.
“그분이 감히 누구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죠?”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저는 시키는 대로 말을 전할 뿐이니. 이대로 전하면 대충 알아들을 거라 했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시켰나요!”
“아! 저도 모른다니까요! 얼굴도 못 봤어요!”
계속되는 엘리움의 질문에 여자는 앙칼진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그에 엘리움은 헛웃음을 쳤다.
“됐어요. 돌아가세요.”
“아니요. 반드시 그리하겠다고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그게 그 쪽에게도 득이 될 테니까요.”
“득?”
여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또다시 주위를 살피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여자의 해진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천 주머니 하나가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거 받으세요. 나도 간 떨려 죽겠으니까 빨리 끝냅시다.”
엘리움은 여자가 내민 주머니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를 본 여자가 답답한지 가슴팍을 퍽퍽 두들기고는 구정물이 잔뜩 묻은 손으로 주머니를 열어 안을 보여줬다.
“베릴바이트예요. 이게 어떤 보석인지 알죠? 당신이 알겠다고, 그리하겠다고 답만 해 주면 나도 그 사람한테 가서 이걸 받을 수 있어요.”
“내가 방금 전의 제안을 승낙하면 당신도 이 보석을 받는다고요?”
“그래요. 뭘 망설이고 있어요? 나도 당신도 10년은 놀고먹을 수 있습니다. 아니지 10년이 뭐야. 20년은 돈 걱정 없이 살겠네.”
“…….”
“설마 지금 거절할 생각은 아니죠?”
여자는 위로 째진 눈을 치켜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엘리움을 노려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엘리움이 망설이는 듯 보이자 그 태도가 쌀쌀맞고 거칠어졌다.
“저기요! 대답을 하세요!”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천 주머니를 빤히 응시하던 엘리움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거절하면? 내가 보석을 못 받죠.”
“끝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죽을 거고.”
“뭐, 뭐라고요?”
순간 엘리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줄곧 또렷했던 눈동자도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못 들었어요? 이 제안을 거절하면 당신은 죽을 거예요. 그자가 당신에게 암살자를 보낼 거라 했어요.”
다리에 힘이 풀린 엘리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여자가 그녀를 따라 무릎을 굽혀 앉더니 어르고 달래듯 사근사근 속삭였다.
“고작 기사 하나 바꿔 쓰는 게 뭐 그리 큰일이에요. 뭐, 이 정도 보석을 그 대가로 주는 거부에게나 큰일이겠죠. 우리 같은 이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데.”
“고작 기사…….”
엘리움이 넋을 잃고 혼자 읊조리자 여자는 빠르게 주머니 안에 있던 보석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잘 봐요. 기사 몇 줄 바꾸는 걸로 이 보석을 얻을 수 있다니까?”
엘리움은 멍한 눈으로 노을빛을 받아 더욱 붉게 반짝이는 눈앞의 보석을 훑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영롱한 보석 알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마른 목에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길목에선 유달리 크게 들렸다.
“처음부터 선택지가 없는 제안이었군요.”
엘리움이 낮게 중얼대며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어린 목소리엔 떨림이 있었다.
“…좋습니다.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