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플로리아,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가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부르며 한 발짝 다가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나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보고만 있어도 이리 사랑스러우니.”
엘리움은 내내 조용했다. 옆을 보니 그녀는 입을 벌리고 한 편의 연극이라도 감상하듯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첩에 글을 적어 내려가던 것도 잊었는지 펜을 든 그 상태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 미안하네.”
나는 민망한 척 어색한 웃음소리를 꾸며 내며 하드엘과 떨어졌다.
“폐하와 항상 이렇게 지내다 보니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었지 뭔가.”
“…….”
“엘리움?”
“아, 네! 괜찮습니다! 이것 또한 황후 폐하의 일상이니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급히 대답했다. 이 정도면 기사의 첫 문단은 어느 정도 쓰인 것 같은데.
“황후 폐하께서는 매일 이렇게 폐하와 시간을 보내시나요?”
형식적인 질문이었지만 염문설에 관해 묻고 싶어 에둘러 질문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먼저 염문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나올 리 만무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나았다.
“거의 그런 편이네. 참, 그대도 최근 떠도는 내 염문을 알고 있는가?”
“네!”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원래의 목적이 이쪽이었으니 반기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밝게 답을 했음을 후에야 깨달았는지 그녀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난 괜찮으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도 좋네.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안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해명을 좀 하고 싶었던 터라. 우선 앉지.”
하드엘과 내가 폭신한 소파 위에 나란히 앉자 뒤따라 엘리움도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저 또한 창단식에서 본 양 폐하의 다정한 모습이 또렷한지라 사실이 아니란 생각은 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황제 폐하께 먼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하드엘에게?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던 하드엘은 뜬금없는 기자의 요청에 고개를 돌렸다.
“무엇을 묻고 싶은 거지?”
“폐하께서는 이번 황후 폐하의 염문설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하드엘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다소 냉랭한 분위기에 엘리움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낼 때쯤 하드엘은 입을 열었다.
“생각할 게 있나? 누가 봐도 뻔한 거짓인데. 다만 화가 치밀었을 뿐이지. 이따위 염문설을 뿌린 자를 찾아내 갈기갈기 찢고 싶을 만큼.”
“폐하, 말씀이 조금 험하신 게 아닐까요?”
“솔직해야 하지 않겠어? 당신은 듣지 마시오.”
하드엘의 귓가에 저런 말을 속삭이자 그는 엉뚱하게 내 귀를 막았다.
나는 엘리움의 수첩을 힐끗 엿보았다. 그녀는 지금 하드엘이 뱉은 말을 그대로 다 적고 있었다.
그래도 이 부분은 조금 순화해서 써 주겠지? 황실 취재 기사니까 저대로 내보낼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나는 내 귀를 덮은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 내리며 아프지 않게 손등을 살짝 눌렀다. 더 이상의 심한 말은 자중하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발언이 기사에 잘못 나갔다간 혹시나 그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는 어떻게 이런 염문이 나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글쎄. 누군가의 모함이라 보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네. 악의를 가진 소문에 이유가 있을 리 없으니.”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엘리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이번 일에 관해서 제국민들에게 따로 전하고픈 말씀이 있으신가요?”
전할 말이라…….
나는 눈앞에 엘리움을 마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엘리움, 그대가 낼 기사가 곧 내가 전하고픈 말이야. 그러니 더한 말은 필요 없겠지.”
이상하다? 왜 답이 없지?
엘리움이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 멍하니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제가 방금 엄청난 걸 본 것 같습니다.”
“?”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뒤를 휙 돌아봤다. 엄청난 거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말인가?”
그녀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엘리움을 하드엘은 서늘한 눈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황당하여 이 둘을 번갈아 봤다.
“순간 넋을 잃었어요.”
“설마 지금 내 얼굴을 보고 하는 말인가?”
그녀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빠르게 수긍했다.
“네! 정말 저랑 같은 사람 맞으세요? 사실 창단식 때 황후 폐하를 처음 뵙고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거든요.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웃는 모습을 뵈니 숨이 멎을 정도네요.”
“아하하.”
이걸 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맞장구를 칠 수도 없고. 아니라고 극구 부정할 수도 없고.
“맞는 말이지만 황후를 그리 뚫어져라 볼 필요는 없지?”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께 눈을 떼지 못해서.”
“아니, 그걸로 죄송할 필요는 없는데.”
“내 그대의 심정은 백번 이해해.”
하드엘은 턱 끝을 까딱이며 엘리움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저런 대화가 진지하게 오고 가는 게 나로선 웃길 뿐이었다.
“폐하, 그런 대화는 엘리움과 함께 제가 없는 곳에서 따로 해 주시지요. 가만히 듣고 있자니 민망해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엘리움.”
“예, 황후 폐하.”
“아까 전하고픈 말이 있냐 물었던 거. 생각해 보니 어떤 이에게 따로 하고픈 말은 있는데.”
“어떤 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염문을 처음 퍼뜨린 자.”
엘리움은 서둘러 펜을 들었고 내 답을 기다렸다.
레이샤에겐 경고도 쓸데없다. 도무지 답이 없는 그녀에게 내가 하고픈 말은 딱 하나였다.
“애를 쓰는 모습이 가여울 지경이야.”
“네?”
뒷말을 기다리던 엘리움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끝이냐 묻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방금 내가 한 말에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엘리움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자에게 하고픈 말, 그게 전부이네.”
***
염문설에 관한 수많은 질문이 오고 갔다. 그렇게 엘리움의 목적은 끝이 났겠지만 그녀는 돌아갈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내 일상을 취재한다는 목적으로 황궁에 출입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긴 대화로 모두가 지친듯하여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한 지금, 하드엘과 나는 황후궁에, 엘리움은 응접실에 남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나를 뚫어져라 보는 하드엘의 시선이 묘했다. 웃지도 않았고 단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런 모습이 오랜만이라 나 또한 낯설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걱정이 되어 다가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살짝 무릎을 굽혀 하드엘과 눈을 맞추었다.
“폐하,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황후, 혹시 알고 있소?”
알고 있냐고? 뭘?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염문을 뿌린 자.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오?”
“…아니요. 저는 모릅니다.”
“그럼 아까 그자에게 전한 말은 무슨 의미요.”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조심했어야 했는데 실수했어. 그래도 누구인지 짐작은 못 할 테니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당신이 뭔가를 알게 되어 내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해야 될 때가 오지 않는 이상 난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이다.
“플로리아.”
그는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나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항상 그대의 편이야. 그러니 언제든 기대시오.”
애틋한 눈으로 하는 저 말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난 알았다. 더한 것을 묻지 않는 것이 나에 대한 배려였음도.
“이렇게 함께 계셔 준 것만으로도 제겐 큰 힘입니다. 그런데 폐하, 안 돌아가 보셔도 되나요?”
끝에 한 질문은 말을 돌리기 위해 던진 것이었지만 정말 염려스러워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와 하루 종일 있다간 업무가 밀리고 쌓일 것인데.
이만하면 엘리움에게 다정한 모습은 보여 주고도 남았다. 오히려 기자 앞이라기엔 너무 과하지 않았나, 그게 더 걱정이니 하드엘은 이제 그만 황제궁으로 돌아가도 되는 상황이었다.
“돌아갔으면 좋겠소?”
그는 아까부터 잡고 있던 손에 깍지를 끼더니 살짝 힘을 주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지금 가지 않으면 밤새 업무를 봐야 할 테니 가라 하는 게 맞는데 나도 그 말이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돌아가지 마세요.”
나는 옅은 미소를 띠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백금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당신이 없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버텼을까. 아니, 애초에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앓고 앓다가 가슴이 문드러질 때까지, 그렇게 닳아 없어질 때까지 오로지 복수를 위해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며 혹사했겠지. 다시 살아 돌아온 걸 저주하며.
하드엘은 내 대답에 흡족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붉은빛이 도는 입술을 움직여 나른히 속삭이듯 말했다.
“에스타란토의 명을 기꺼이 따르도록 하겠소.”
***
“마력 훈련을 자주 하시나요?”
“그런 편이지. 기사단장인 아델 경과 이렇듯 거의 매일 훈련을 하니. 대부분의 훈련에서 마법서를 사용하고 있네.”
다시 만난 엘리움은 신기한지 마법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펼친 마법서를 멀리에서 요리조리 살피고 있었다.
내 곁에 있던 아델은 책에 정신이 팔린 엘리움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신전 기사단장 아델입니다.”
그제야 그녀가 두꺼운 책에서 눈을 떼고 아델을 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마법서를 처음 봐서요. 엘리움이에요. 초면은 아닙니다. 저는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 때 단장님을 아주 멀리서 뵈었거든요.”
“그런가요? 잘 부탁드립니다.”
가벼운 악수를 나누고 아델은 다시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런 아델을 유심히 보던 엘리움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갑자기 그에게 질문했다.
“두 분께서 어떻게 친해지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기 오기 전에 황후 폐하께서 단장님과는 꽤 절친한 사이라 말씀을 해 주셔서요.”
염문설이 돌고 있는지라 다소 난처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아델은 고민도 않고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되기 전부터 홀로 신전 기사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황후 폐하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건 다른 이들보다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면 신전 기사단을 통해 처음 만나 이렇게 가까워지게 되신 거군요.”
그건 아닌데. 아델과는 광장에서 우연히 만나…….
“네, 그렇죠.”
아델이 자연스레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순진무구한 웃음 뒤에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사연이 더해지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 있었다. 아델은 이를 생각해 나를 위해 거짓을 말한 거였다. 염문을 키우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런데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와 정말 종일 함께하시네요? 황후 폐하에 대한 사랑이 정말 지극하세요.”
아, 맞다. 하드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역시나 하드엘은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향해 웃는 아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시린지 훈기가 도는 방 안에서 입김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럼 수업을 시작할까요?”
우리 중 태연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델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던 엘리움이 내게로 슬쩍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황제 폐하께서 아델 경과 사이가 안 좋은…….”
“아하하, 그럴 리가. 그렇죠, 폐하?”
하드엘은 아델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봄날 같은 따스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순식간에 표정이 저리 바뀌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뭐 황후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계속하시오, 난 여기서 지켜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