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칸제로스 공작과 레이샤.
둘이서 사이좋게 황후가 되고, 황후의 아비가 되는 그런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오랜 시간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 저들의 욕심을 채우려 나를 이용한 걸 보면.
‘하지만 이제 뜻대로 되기는 힘들 거야. 욕심내는 게 황후의 자리든 뭐든 간에.’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흑마법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건 공작이 되는 걸까, 레이샤가 되는 걸까.
아니면 둘 다?
“황후 폐하!”
루안이 나를 부르며 앞으로 엎어질 듯 허겁지겁 달려왔다. 멀리에서 본 그녀의 걸음은 꽤 위태로웠다.
나는 벌떡 일어나 루안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루안, 천천히 와요. 넘어지겠어.”
하지만 그녀는 결국 내 말을 듣지 않고 뛰어왔고 단숨에 내 앞에 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안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했다.
“큰일 났습니다!”
“왜 그래요?”
루안이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똑똑
열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가 하고 보니 아델이었다.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폐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델 경, 잠시만요. 루안과 먼저 얘기를 나눈 후에 내가 다시 부를게요.”
“루안 양은 저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 겁니다.”
“같은 이야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루안은 당황하여 아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누가 보아도 티가 났다.
“저와 황후 폐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 하는 거 아닌가요? 맞죠?”
루안은 아델의 질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과 나에 관한 이야기라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상상이 안 갔다.
“제가 말씀드릴 테니 잠시만 자리를 피해 주시겠어요?”
루안은 나를 보고 어찌할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하라 눈짓을 보내자 그제야 그녀는 아델의 말을 따랐다.
루안이 나가고 짤막한 정적이 찾아왔다. 루안을 대신해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한다던 아델은 이야기는커녕 숨소리도 내지 않고 마치 조각상처럼 나를 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아델의 목소리가 들린 건 참다못해 내가 먼저 그를 부른 직후였다.
“폐하에 관한 염문설이 돌고 있습니다.”
“내 염문설 말인가요?”
나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염문설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방금 염문설이라 한 거 맞죠?”
“네.”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어떻게 대응을 해야겠다는 계획보다 내가 누구와 염문설이 났다는 건지가 더 궁금했다. 혼자 염문설이 날 리가 없으니 당연히 그 상대가 있을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누구랑 염문설이 났단 말이에요?”
아델은 말을 아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아델과 나에 관한 이야기라 했던가?
그렇다면 설마…….
“아델 그대와 나를 엮은 염문설인가요?”
“제가 폐하를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그대와 나의 염문설이라고요?”
차라리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염문설이 났다 하면 놀라기라도 하지 아델과의 염문설이라니.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어떠한 내용이던가요?”
“저를 정부로 들이신다는……. 저 때문입니다. 제가 행동을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델의 눈동자는 우울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내가 피해를 봤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생각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델 경, 그대 탓이 아니에요. 따지자면 이건 내 탓입니다. 날 음해하려는 누군가 때문에 그대가 피해를 본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레이샤의 탓이었다.
벨리타에게 배후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몸을 사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시선을 돌리게라도 할 작정이었나.’
이리도 무모하게 대응해서야.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았을 텐데.
“음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염문을 퍼뜨린 거예요. 그러니 자책할 필요 없어요.”
“그러면 더더욱 큰일이 아닙니까!”
아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날 보는 눈빛에는 우려가 한가득 묻어났다. 그의 말대로 큰일이라면 큰일인 일이었다.
하지만…….
잘하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레이샤. 이렇게 나올수록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긴 아는 건지. 멍청하긴.
지금 제국민들의 민심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이런 기사를 내. 내가 이용하기 딱 좋게.
“당장 찾아야 합니다!”
나는 가늘게 미소를 짓다 입을 열었다.
“진정해요. 생각해 보면 내게 아주 나쁜 소식만은 아니에요.”
“네?”
아델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염문설을 두고 나쁜 소식이 아니라니 내가 들어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잘된 일이죠. 안 그래도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일을 핑계로 기자를 궁에 불러들일 수 있겠어요. 작위적이지도 않고 좋네요.”
“기자는 왜…….”
“창단식에서 보여 주었던 폐하와의 사이좋던 모습을 사실로서 굳히려고요. 황실의 안정이 곧 제국의 안정이니 그 안정이라는 걸 더 확실히 하자는 의미로.”
레이샤가 노리는 게 이 자리라면 더 굳건히 지켜 낼 생각이었다.
이전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
앞으로의 내 계획을 모두 들은 아델이 조금은 안심하며 나가고, 밖에 서 있던 루안은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번 염문설이 자신이 지금껏 들어온 것들 중 가장 말도 안 되는 염문이라 강조하며 나를 대신해 화를 내어 주었다.
“그런데 이번은 또 누구의 짓일까요?”
“뻔하죠.”
“그럼 이것도 벨리타 영애와 공녀님의 짓이란 말씀이세요?”
“우선 내 생각은 그래요.”
루안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요즘 그녀는 저렇게 분노를 사그라뜨리려 노력하는 일이 잦았다.
“차라리 일전에 왔던 가십지 『델리스』의 대표에게 증언을 요구해 벨리타 영애라도 처벌함이 어떠세요? 억울해서 더는 이렇게 못 있겠어요!”
“가십지로 제대로 된 처벌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소문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쪽은 사실을 따지기도 어렵고 잘잘못을 가리기도 힘드니 벌을 내린다 해도 근신 처분 정도에 그치겠죠. 나는 그 정도의 약한 처벌은 내릴 생각이 없어요.”
레이샤는 자칫 일이 곤란해지면 벨리타를 대신 앞으로 내몰 생각이다. 이번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가십지의 문제도 벨리타의 선에서 끝내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을 쉽게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지만.
그동안의 죄를 처벌하고, 레이샤가 앞으로 저지를 죄를 막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를 옥에 가둬 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가십지나 이런 소문에 엮인 일 따위가 아니라 레이샤를 확실하게 덫에 몰아넣을 사건이 필요했다.
“듣고 보니 폐하의 말씀이 옳아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지금까지 폐하께서 온갖 소문에 고통받으신 걸 생각하면 공녀는 더한 벌을 받아야 마땅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전에 우선은 이번 일을 먼저 해결해야겠죠?”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세요?”
“궁에 기자를 부를 거예요.”
“그러면 황제 폐하께 지금 폐하의 뜻을 알릴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 줘요. 어차피 폐하의 동의가 필요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니다. 잠깐만요, 루안.”
아델과의 염문설이 하드엘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도 하드엘이 더 먼저 이 소문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오해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은 들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의심할 사람은 아니기에. 오히려 걱정한다면 모를까.
그래도 직접 만나 상황을 설명해야겠지.
“루안, 황제궁으로 갈 채비를 해야겠어요. 내가 직접 가서 폐하께 말을 전할게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이제 막 황후궁을 벗어났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하드엘이 보였다.
“폐하?”
“어? 정말 폐하이십니다!”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걷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환히 내리쬐는 빛을 얼굴에 가득 옮겨 담은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도 있는 그대로도 아름다웠지만 저리 웃을 때면 정말 눈이 부신 사람이었다.
“어딜 가는 길이오?”
금세 내 앞에 온 하드엘이 눈을 맞추며 물어왔다. 홀린 듯 그를 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폐하께 가던 길이었습니다.”
“내게?”
“여러모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폐하를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우연은 아닌 듯싶은데? 나는 황후궁으로 가던 길이었소. 그저 그대를 보고 싶어서. 할 말은 없지만 우선 플로리아 당신의 얼굴을 보고 차차 생각해 볼 참이었지.”
나를 빤히 보는 그의 눈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바라보기만 해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같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을 테니까.
“폐하, 이렇게 된 거 우리 그냥 밖에서 걸을까요?”
“당신이 좋다면야.”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푸릇한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초록빛이 싱싱히 도는 나뭇잎은 가끔씩 바람에 스쳐 듣기 좋은 소리를 내었다. 멀리에서는 아렴풋이 영롱한 신전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온통 평온하기만 했다.
시녀들과 기사들을 모두 물리고 걷는 이 산책길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나와 하드엘의 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그렇게 말없이 풍경을 훑는데 바로 옆에서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난 그가 왜 갑자기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역시. 나보다도 먼저 염문설을 들었구나.
“아까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황후, 내게 설명할 필요 없소. 그 일이 당신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게 걱정일 뿐이야.”
그는 멈춰 서더니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잠시 그의 시선은 단단히 맞붙잡은 두 손에 머물러 있었다.
“찾을 것이오. 누구의 소행인지.”
다시 고개를 들고 마주한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 온전히 나 하나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든 용서치 않아.”
“폐하.”
나는 차분히 그를 부르며 하드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누구의 짓인지 밝혀낸다고 나서겠다면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 전에 당신에게 그 무엇도 말해 주지 않을 거야.
레이샤와 엮이게 하기 싫으니까.
같은 불행이 또다시 찾아올까 봐 겁이 나.
또 당신을 잃을까 봐…….
“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거짓에 휘둘릴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그러니 폐하께서는 제가 아니라 언제나 폐하 스스로를 먼저 살피세요. 그러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다치지 않을 테니까. 이 사람이 나 때문에 다시 다치게 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리 슬픈 눈으로 보는 것이오.”
하드엘이 손을 뻗어 가만히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따스한 온기가 퍼져 갔다.
“폐하의 착각이십니다.”
나는 소리 없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들킨 지금 내 감정을 서둘러 지웠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참, 그리고 폐하, 전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궁에 기자를 부를 생각입니다.”
“기자를?”
내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하드엘이 한발 늦게 되물었다.
“네. 아델과의 염문설을 반박하는 데 이만한 방법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기자를 불러 어찌할 생각인 것이오?”
“폐하와 제가 사이좋은 모습을 적당히 보여 줘야겠지요. 기자가 기사로 쓸 수 있도록. 염문설에 대한 해명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회에 폐하와 저의 불화설을 완전히 일축시킬 거예요. 함께해 주시겠어요?”
“물론. 에스타란토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원합니다, 하드엘.”
나는 장난스럽게 맞받아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가끔씩 하드엘이 존대를 섞어 말하는 것이 이젠 내게도 제법 자연스러웠다.
저번 이후로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또 이렇게 간간이 부르고 있는 걸 보면 그와의 사이가 꽤 편해졌지 싶었다.
“아! 그런데 혹시 기자가 궁 안의 취재 요청을 해 오진 않았나요?”
지금의 상황에서 취재 요청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염문설을 들었다면 기자들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염문설의 당사자들이 다 궁 안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취재 요청을 해 왔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명을 하겠다며 기자를 부를 필요도 없이 그들의 취재 요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해 왔소.”
“그런가요? 그러면 폐하께서 제게 취재 요청 건으로 온 문서를 보내 주시겠어요?”
“찢어 버리지는 않아 다행이군…….”
“네?”
잘못 들은 건가? 분명 아까 뭘 찢었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오. 넬슨을 시켜 황후궁에 문서를 전달토록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