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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80)화 (8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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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벨리타 영애가 궁을 나간 즉시 칸제로스 공작저를 찾았다 합니다.”

그녀의 행선지는 내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부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수고했어요, 부인.”

레이샤, 이제 네 귀에도 들어갔겠구나.

지금쯤 꽤 애가 탈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지금까지의 악행을 모두 대갚음해 줄 테니.’

어떻게 하면 널 가장 괴롭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사람들의 앞에서 낱낱이 그 실체를 밝히는 것. 아무래도 귀한 공작가의 영애에겐 그게 제일 어울리려나.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느리고 반복적으로 들려오자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어 갔다.

법으로 다스리기 이전에 어디까지 썩은 뿌리가 내리벋어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모든 사실을 알아내기 전까지 레이샤는 내가 배후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상태인 줄로만 알고 있어야 한다.

섣불리 나서선 안 됐다. 지금의 정황만으로 그녀를 공격했다간 애먼 사람들만 옥에 갇힐 것이다.

우선 지금부터 내가 알아내야 할 건 세 가지였다.

칸제로스가가 흑마법사와 교류한 정황이 있는지, 공작도 레이샤와 똑같은 인간인 건지. 그리고 레이샤와 벨리타 사이의 관계까지.

흑마법사와의 교류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흑마법사를 찾아간다면 그와 접촉하기에 앞서 자신의 행동에 주의에 주의를 기울일 테니까. 이건 사람을 붙여 계속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 레이샤가 내 죽음 이후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게 확실하니…….

“직접 찾는 것보다 이쪽을 쫓아 찾아내는 게 더 빠를 거야.”

나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피로한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벨리타가 깜깜한 시야 속에 문득 그려졌다.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이 선명해질 무렵 난 다시 스르르 눈을 떴다.

벨리타는 왜 순순히 레이샤의 일에 나서 준 걸까. 자신이 혼자 벌인 짓이라고 하면서까지. 벨리타의 반응을 보면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얄미울 만큼 당당한 그녀가 짓던,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은 좀처럼 잊히지가 않았다.

‘설마 레이샤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약점, 벨리타의 약점이라…….

그러고 보니 벨리타가 날 괴롭히기 시작한 때가 몇 개월간 사교계에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직후였다.

그때부터 뭔가 일이 시작된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그 몇 개월 사이 벌어진 일이 벨리타의 약점이 되었다면 때가 맞았다.

“부인, 벨리타 영애가 사교계를 잠시 떠났던 때가 있었죠?”

“네, 몇 년 전쯤 그랬었죠.”

“무슨 이유로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던 건지 알고 있나요?”

“이유라면 알려진 건 없습니다. 벨리타 영애도 그사이의 일을 입 밖에 내기를 꺼리는 눈치여서 다들 물어보다 말았더랬죠.”

자신도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하니 벨리타의 약점이 이쯤 만들어졌을 거란 추측에 확신이 섰다.

당장 알아봐야겠어.

“그때 당시 벨리타의 행적을 조사해 줄래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보고해 줘요. 어렵겠지만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 아, 그리고 칸제로스 공작저에 감시를 붙여야겠어요.”

“방금 칸제로스 공작저라 하셨습니까?”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그녀도 공녀가 벨리타의 악행과 연관되어 있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걸 묻는 것이 실례임은 알지만 공작저엔 왜…….”

“벨리타 영애와 공녀가 한편이에요.”

“네?!”

누군가에 의해서 훗날 벨리타는 죽는다. 그때는 내 누명만 억울해하기 바빠 그녀가 왜, 어떠한 이유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 건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알겠다. 그 사건도 레이샤와 얽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녀의 죽음 전에 일을 해결하면 벨리타의 운명도 바뀔까?

“황후 폐하.”

“루안.”

“방금 하신 말씀, 그게 사실인가요?”

현재 서재 안에는 루안과 백작 부인 둘뿐이었다. 조금 떨어져 부인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안이 놀란 눈을 뜬 채 단숨에 내게 다가와 물었다.

“공녀님께서… 말도 안 돼.”

“나도 처음엔 말도 안 된다 생각했어요. 믿기지 않았죠.”

많이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 말을 듣고 누가 놀라지 않을까.

“공녀가 어떻게 폐하께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루안이 버럭 화를 냈다.

“폐하께서 지금껏 공녀님을 어찌 대해 주셨는데 그런 악독한……!”

착한 공녀님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며 믿을 수 없다, 믿기지 않는다고 말을 이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껏 들어 보지도 못 한 험한 욕으로 공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조금만 진정을…….”

루안의 과격한 언행에 두 눈을 끔뻑이던 백작 부인이 뒤늦게 나서서 루안을 말릴 정도였다.

“너무 어이가 없잖아요! 혼자 XX하고 착한 척은 다 하더니! 이런 썩을 것!”

“루, 루안! 폐하 앞에선 험한 말을 자제하세요.”

나는 이런 루안을 보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심각한 와중에 웃음을 짓게 만들어 주는 그녀의 찰진 욕이 오히려 고마웠다.

“난 괜찮아요. 덕분에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앞으로 어찌하실 건가요?”

부인은 여전히 씩씩거리는 루안을 뒤로한 채 내게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그 질문에 정해진 답은 하나였다.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겠죠.”

그동안 네가 만들어 낸 소문들이 얼마나 날 괴롭게 했는지 레이샤. 너도 느껴 봐야겠지.

“그런데 혹시 칸제로스 공작님도 이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문득 화를 삭이던 루안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건 차차 알아봐야 해요. 그런데 왜요?”

“폐하께서 도박장과 관련해 재판을 여셨던 날, 모두가 돌아가고 저는 뒤늦게 폐하께서 두고 오신 티아라를 챙기려 재판정을 다시 찾았었거든요.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 감옥 쪽으로 향하는 칸제로스 공작님을 봤어요. 지금 떠올리니 갑자기 이상해서요.”

“공작이 지하 감옥을 찾았다고요? 감옥 안으로 들어가던가요?”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바람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지는 못했어요.”

루안의 말을 듣고 나는 당장 몸을 일으키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시려고요?”

“지하 감옥에요. 지금 가 봐야겠어요. 부인, 루안과 둘이 잠시 다녀올 테니 신전 기사단에게는 따르지 말라 전해 주세요.”

***

“황후 폐하! 아니, 에스타란토께서…….”

“이전처럼 불러요. 아직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니.”

“네!”

지하 감옥을 지키고 선 기사들은 바짝 긴장하여 답했다.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 이후 기사들의 태도가 이전과 달라진 게 대번에 느껴졌다.

“죄인 베르시트를 만나고 싶은데.”

“바로 들어가시지요.”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베르시트 남작이 지하 감옥에 갇히던 날 이곳에 근무하던 기사들이 누구인가요?”

“재판이 열리던 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날 근무는 저희였습니다.”

“아하, 그랬군요.”

“하하, 네.”

“그럼 칸제로스 공작을 멋대로 들여보낸 것도 그대들인가?”

뭔가 찔리는 게 있기는 한지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들의 떨리는 손을 흘끗 내려다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그건!”

“사실대로만 말한다면 처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자하게 웃어 보여도 그들은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입을 열게 하려면 그들은 좀 더 압박해야 했다.

“이미 짐작하고 왔습니다. 난 지금 그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에요. 만약 지금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더한 처벌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제야 기사 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이 날카로운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몸을 숙였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저희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공작님께 사례를 받은 것도 없고요. 단지 공작님께서 평소 친했던 남작님을 다시 한번 뵙고 싶다 하셔서 들여보내 드린 것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남작님도 칸제로스 공작님을 불러 달라며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시던 탓에…….”

본인들의 잘못은 아는지, 얼굴을 붉히며 답한 기사들이 푹 고개를 숙였다.

칸제로스 공작. 그가 이유도 없이 남작을 찾았을 리 없다.

‘재판에 앞서 사사건건 내 일을 방해했던 게 당신이구나. 베르시트 남작과 둘이 짜고 친 거야.’

결국 공작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부녀가 어쩜 그리 똑 닮았는지. 지금껏 그런 무서운 속내를 숨기고 살아온 걸 생각하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더한 확인도 필요 없었다.

‘맹랑한 것들.’

“그래요. 약속대로 이번은 넘어가죠. 다음에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지금의 죄를 더해 물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어이가 없고 허무했을 뿐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라 생각했던 공작가가 결국 가장 큰 적이었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

“루안, 우린 황후궁으로 돌아가죠.”

“베르시트 남작을 보러 온 것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루안은 앞서 걷는 나를 쫄쫄 따라오며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곧게 뻗은 길을 계속해서 걸으며 답했다.

“만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미 답이 되었으니.”

***

“폐하, 폐하께서 살펴보셔야 할 문서가 있습니다.”

“급한 건가?”

“예.”

하드엘은 황후궁에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마지못해 넬슨 백작이 건넨 문서를 받아 들었다.

백작이 머뭇거리며 건넨 문서에는 황실에 관한 취재를 요청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하드엘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황실을 취재하고 싶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취재의 이유도 죄다 가지각색이고.”

“그게…….”

넬슨은 도무지 말하지 못하겠는지 입만 우물댔다. 그러자 그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직감하고 서둘러 백작을 재촉했다.

“어서 말하라.”

“그러니까 황후 폐하와 신전 기사단 아델 경의… 염문설이 떠도는 바람에…….”

“뭐?”

하드엘의 얼굴이 한순간 싸늘하게 굳었다.

그런 하드엘을 마주한 백작은 흠칫하며 작게 뒷걸음질을 쳤다.

최근 황제에게서 이리 싸한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매일 같이 황후를 찾아갈 때마다 매번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히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와 염문설이 나? 황후와 그자가?”

“오해일 겁니다. 황후 폐하의 성정은 누구보다 폐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단지 떠도는 이야기에 제국민이 흥미롭게 반응하니 신문사에서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뿐일 테지요. 게다가 다정하던 양 폐하의 모습을 창단식에서 직접 보았으니 제국민들도 흥미를 보일 뿐 믿지는 않는 눈치입니다.”

“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며 문서를 폐기함에 던졌다. 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것은 통째로 버려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귀족들은 내가 이따위 말에 휘둘려 황후를 의심할 거라 생각했나 보지?”

“귀족들이라니요?”

“하필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 이후 이런 염문이 돈다? 누구의 짓인지 뻔하지 않나? 가뜩이나 황후를 견제하는 세력들과 황후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확연히 두드러지기 시작한 이 시점에 말이야.”

“그럼 정말로 귀족들이 의도적으로 염문설을 만들어 낸 것일까요?”

“그거야 캐보면 나오겠지. 넬슨, 지금부터 조사를 시작해라. 누구의 소행인지 무슨 의도인지 어떻게든 찾아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 폐하.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행?”

안도하는 넬슨의 말에 하드엘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게 다행일 상황이냐 나무라는 딱 그런 얼굴이었다.

백작은 험악한 눈길에 당황하여 곧바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폐하! 제가 다행이라 말한 것은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의심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라 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황후를 의심해? 모든 일에 있어 그녀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맞다 하면 맞는 것일 텐데 플로리아에게 묻기도 전에 내가 왜 의심을 하지? 애초에 이번 건은 황후에게 물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지만.”

“아…….”

고개를 끄덕이는 백작을 뒤로하고 하드엘은 보폭을 크게 하여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리둥절해 있던 백작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그런 하드엘을 향해 다급히 물었다.

“폐하! 어디로 가십니까?”

“황후에게로 가려던 길이었으니 당연히 황후궁에 가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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