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죄다 똑같아.”
레이샤는 손에 들린 신문을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 이미 구겨진 수많은 신문들에 방 안은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황후를 찬양하는 문구가 적힌 신문의 1면은 그것대로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까. 아둔하고 어리석어. 진실과 거짓을 구분치 못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사들만 잔뜩 써 대고 있으니.”
아버지는 언제까지 기다리라고만 하실는지.
황제 폐하도, 황제 폐하의 손에 들려 있던 그 가넷 목걸이도 원래 전부 내 것이었는데 매번 이리 뺏기고만 있고!
거짓이 계속되면 그것이 진실이 되는 법이었다. 황후도 이런 속셈으로 거짓을 계속 이어 나가려는 게 분명했다.
훗날 에스타란토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안 되겠어.”
아버지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황후의 간악한 거짓말에 놀아나는 이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서둘러 따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모, 서고에 가자.”
“서고요?”
“필요한 책들을 찾아와야겠어.”
“여기 편히 계세요. 말씀만 해 주시면 제가 찾아 드릴게요.”
“아니. 같이 가. 내가 직접 보고 고를 거야. 유모는 옆에서 내가 고른 책들을 들어 주기만 하면 돼.”
에스타란토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역사서들이 많았다. 가만히 있을 바에 차라리 그 역사서라도 읽으면 황후의 거짓말에서 허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바라는 일도, 아버지가 바라는 일도 모두 수월하게 행해질 터.
거짓말쟁이 황후를 누가 좋아하겠어.
‘잠깐만… 거짓말쟁이 황후?’
플로리아, 네게 너무 잘 어울리는 별칭인데?
걸음을 옮기는 레이샤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 웃음의 대부분은 빈정거리는 조롱이었다.
“유모, 뭐 해? 가자.”
레이샤가 찾은 서고는 칸제로스 공작의 서재가 위치한 복도의 끝에 있었다.
그녀는 뒤에 있던 유모를 시켜 서고의 문을 열게 하려 했으나 정작 유모가 손을 뻗자 곧바로 그 행동을 저지시켰다.
서고 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하게 낮고 굵은 목소리.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의 것이었다.
보통 이런 곳에서 조용히 할 만한 이야기라 하면…….
그녀는 서고 안의 목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희미했던 소리가 조금은 선명해졌다.
“흑마법이라 했느냐?”
“예, 공작님. 접촉해 보시겠습니까?”
“너무 위험해. 다른 방법은 없나?”
‘흑마법? 아버지께서 왜 그런 무시무시한 걸…….’
“공녀님.”
레이샤가 뒷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그녀를 찾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서재 안에서의 대화는 끊겼다.
“깜짝이야. 왜 그러니?”
왜 지금 말을 걸어와선! 레이샤는 간신히 짜증을 억누르고 미소 지었다.
“벨리타 영애께서 공녀님을 급히 찾으십니다.”
“벨리타 영애가?”
레이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벨리타 그 애는 부르지 않는 이상 제 발로 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하녀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지?”
“공작저 밖에 계십니다. 방 안으로 안내할까요?”
“그러도록 해. 아, 그리고 영애가 또 저렇게 불쑥 찾아오면 내 방으로 먼저 안내해 줘.”
“네, 아가씨.”
말을 마친 레이샤가 복도에 난 창 너머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장미 넝쿨 아래 벨리타가 서 있었다.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리며 손톱을 씹는 그녀는 멀리에서 보더라도 꽤 불안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에 이유 없이 자신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무슨 일이 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리가 없었다.
“공녀님, 필요한 책이 있으시다고…….”
“다음에. 우선 벨리타 영애를 만나야겠어.”
레이샤는 서고에서 엿들었던 대화는 까맣게 잊은 채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방 안에 들어서자 넋이 나간 듯 바닥만 바라보는 벨리타가 보였다. 평소처럼 인사도 건네지 않은 채였다.
“벨리타 영애.”
“…….”
“벨리타 영애!”
레이샤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벨리타를 못마땅하게 쏘아봤다. 몇 분간 울먹이는 눈으로 저리 서 있는 것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짜증 섞인 마지막 부름에 몸을 움찔 떤 벨리타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레이샤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공녀님…….”
“왔으면 온 이유를 말하세요. 그렇게 굼뜨게 굴지 말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
“황후가 가십지에 기사를 실은 것이 저라는 걸 눈치챘습니다.”
“가십지?”
잠시 벨리타의 말을 되짚던 레이샤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황후가 알아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여자는 벨리타 영애가 혼자 벌인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네?”
“그건 그대가 벌인 짓이니 나의 큰일이 아니잖아요?”
“…공녀님께서 시키신 일이시잖아요.”
“내가 시켰다고 말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요? 어차피 재판정에 끌려갈 일은 없을 거예요. 투정 말고 그대 선에서 끝내세요.”
벨리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두 손에 힘만 주었다. 레이샤는 그런 벨리타를 웃는 낯으로 쳐다보더니 여유롭게 안락의자에 가 몸을 기댔다.
“뭐해요? 나가지 않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벨리타는 한 걸음 다가섰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표정은 여전했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레이샤는 마땅찮은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후가, 제가 한 일에 배후가 있음을 의심 중입니다.”
“뭐?”
레이샤가 벌떡 일어섰다. 방금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안락의자는 간닥거릴 새도 없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 모든 일에 배후가 있다는 걸 폐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레이샤가 뒤늦게 두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내게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오늘 궁에 불려갔었습니다. 제게 직접 지금껏 누구와 이런 짓을 벌인 건지 그 배후를 찾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어요.”
벨리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질수록 레이샤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붉은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허점이 없었다. 그러니 황후가 알 리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의심할 수 있었던 거지?
“화, 황후가 어떻게 배후가 있다는 걸 의심할 수 있죠? 기사 때문인가? 아니지. 기자든, 누구든 다 영애의 짓으로 알고 있을 텐데.”
“…….”
레이샤는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같은 자리를 맴돌다 유독 조용한 벨리타를 발견하고 몸을 휙 틀었다.
날카로운 구두굽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어느새 벨리타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녀는 거칠게 벨리타의 턱을 움켜잡고 들어 올렸다.
“설마 영애가 말한 건 아닐 거고, 그렇죠?”
벨리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또다시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답도 못 하고 제 눈을 피하는 그녀를 보며 레이샤는 그녀가 자신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직감했다.
“내게 숨기는 게 있군요? 당장 말해요. 내가 영애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니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실은 봄의 무도회 날 공녀님께서 제게 보내 주셨던 쪽지를 분실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황후가 가지고 있었어요.”
“뭐, 뭐?”
“죄송합니다. 공녀님. 그 쪽지가 황후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오늘에야 알았어요!”
“영애, 제정신이에요?”
싸늘한 레이샤의 목소리에 벨리타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공녀님.”
“내게 진작 알렸어야지!”
“하지만 황후는 저와 함께 일을 꾸민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그게 누구인지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잘했다 이 말인가요?”
레이샤는 소리라도 내지르고픈 마음을 꾹 누르고 강제로 분노를 삭였다. 대신 억누른 분노는 그녀의 말투에서 드러났다.
커다란 실수를 범한 주제에 제 비밀만 감춰 달라 애원을 해?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인데. 정말이지 경멸스럽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빌빌대면 다야?
“영애는 지금 태도가 잘못되었어. 당장에라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책임지고 방법이라도 내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방법이요?”
황후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그 독한 것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되면 나는…….’
아니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고민에 빠진 벨리타의 앞에서 레이샤는 불안감을 티 내지 않으며 속으로 중얼댔다.
벨리타 영애의 말대로 황후는 배후가 누구인지는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일을 벌이는 데 있어 남겨 놓은 증거도 없었다. 혹시나 무언가를 더 알아내더라도 그건 전부 벨리타 영애가 한 짓이니까 나를 엮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일을 더 파고들지는 못하게 해야 하니 황후가 눈을 돌릴 데가 필요했다.
생각해 레이샤. 생각해 내야 해.
뭐가 좋을까…….
지금 제국민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신전 기사단이었다. 에스타란토의 신전 기사단.
레이샤의 머릿속에 순간 얼마 전 황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옆에 있던 아델이란 자의 모습도 함께.
“공녀님, 그럼 우선 당분간은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시고…….”
“벨리타 영애, 말을 왜 그렇게 하지? 나보고 지금 잠자코 숨어 있어라, 그 말이에요? 됐어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머리로 무슨 방법을 떠올리겠어.”
“그러면 어떻게…….”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겨우 쌓아 온 평판을 무너뜨리는 데는 염문설이 최고다. 그에 비할 만한 방법을 찾기도 힘들었다.
기사단장과의 염문설.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열광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껜 조그마한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악랄한 황후의 정체를 의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니.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건가요?”
“영애가 잘하는 거예요.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일. 황후가 영애에게 감시를 붙였을지도 모르니 직접 나서지 말고 사람을 시켜 정보만 흘리세요.”
“감시요? 그러면 지금 제가 공작저에 왔다는 사실을 황후가…….”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배후가 나인 줄은 상상조차 못 할 텐데. 오히려 공작저를 자주 찾다가 갑자기 방문 횟수를 줄이면 더 의심을 살 겁니다. 그냥 평소같이 지내며 내가 시킨 일이나 잘 해내세요.”
“그런데 공녀님, 이번에 일을 꾸민다면 황후는 제가 한 짓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챌 거예요.”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순 없잖아. 안 그래요?”
플로리아, 넌 절대 벨리타의 배후를 찾을 수 없어. 내가 내 입으로 모든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말이야.
레이샤는 입꼬리를 당겨 환히 웃었다. 유난스럽게 따가운 정오의 봄볕이 기름진 땅 위를 비추고 있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