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설마 알고 계십니까?”
“벨리타 엔느 데보니안. 몰랐다면 내가 이렇게 조용히 있지도 않았겠지. 찾았겠지 어떻게든.”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실은 그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짐작했다. 그날 다과회에 참석한 귀족들 중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벨리타뿐이었으니까.
굳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가십지를 두고 사실을 따져 가며 지은 죄를 처벌하기가 힘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득도 없이 일을 들쑤셨다가는 벨리타의 뒤에 있는 자가 몸을 숨길 게 뻔했다.
계속해서 벨리타를 조종해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 난 그자를 찾아야 했다.
“다과회가 열린 당일에 기자를 찾아 회유를 한 사람이 데보니안 가의 사용인이라는 걸 저희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어떻게 황후 폐하께서…….”
“폐간을 재고해 본다는 약속을 했다면 내가 큰 손해를 볼 뻔했어. 이만 돌아가거라.”
“아, 안 됩니다! 폐하! 제발 넓은 아량을 베푸셔서 가십지의 폐간을 재고해 주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다급히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는 그의 손을 쳐내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를 내려 봤다.
“더 좋은 정보를 가져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지. 아, 그리고 그대가 모르나 본데 난 그렇게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야.”
“폐하!”
난 문을 열고 응접실을 나갔다. 그리고 간절히 애원하는 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당장 이 자를 궁 밖으로 내보내세요.”
나를 불러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까지 메아리쳐 울렸다. 나는 표정의 변화 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잠깐.”
“왜 그러세요, 황후 폐하?”
이런 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선 것은 그와의 대화를 되짚고 난 후였다. 그가 뱉은 말 속에 무언가 꺼림칙한 데가 있었다.
“저자가 방금 데보니안가의 사용인이 다과회가 열린 당일에 기자를 찾았다 했나요?”
“네,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상했다. 벨리타가 당일 바로 누군가의 명을 받을 틈이 있었던가.
그날 벨리타에게 수상한 행적은 없다 보고를 받았으니 누군가를 만나 말을 전한 게 아니라면 다과회에서 있었던 일을 글로 옮겨 보냈을 터.
하지만…….
벨리타에겐 그날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친 레이샤 영애를 부축해 갔고 그런 그녀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보살폈다 했으니까.
그렇다는 건 누군가의 명 없이 자신이 혼자 벌인 일이라는 건가.
‘그런데 말이 안 되잖아. 굳이 공작저에서 자신의 사용인을 불러 그런 간 큰 짓을 했다?’
레이샤가 보고 있었을 텐…….
“부인.”
“예, 폐하.”
“벨리타가 자주 공작저를 오고 간다 했었죠.”
“네, 벨리타 영애에게 붙여 놓은 감시자들이 그리 보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나요?”
레이샤.
설마…….
몰아치는 불안감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릴수록 그녀에 대한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천사같이 웃고 있던 레이샤를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폐하?”
“서재, 지금 당장 서재로 가야겠어요.”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서랍을 뒤집어엎었다. 그러자 서랍 안에 있던 온갖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중에는 봄의 무도회 날 벨리타가 흘리고 간 쪽지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며 루안을 불렀다.
“루안!”
지금까지의 내 행동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재빠르게 답했다.
“네!”
“내가 공녀에게 받았던 편지를 가져와 줘요.”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루안은 내 명대로 레이샤가 쓴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그 편지는 다과회의 일로 내게 사과를 하기 위해 레이샤가 보냈던 것이었다.
나는 곱게 접힌 낱장의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그것을 왼손에 들린 쪽지와 번갈아 봤다.
“똑같아…….”
몇 번을 확인해도 같은 사람의 필적이야.
손에 힘이 풀리자 쥐고 있던 편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
배신감보다는 허무함에 김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레이샤. 너였어? 벨리타를 시켜 소문을 퍼트린 것도. 나를 곤경에 빠뜨린 것도 전부?
“어떻게 네가…….”
날 위해 나서 다른 귀족들을 꾸짖던 그녀였다. 이전의 생에 악한 소문에 괴로워할 때마다 날 찾아와 위로해 준 것도 그녀였다.
다 네가 한 짓이었는데. 저를 믿는 나를 보며 얼마나 우스웠을까.
‘가증스러워.’
나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지그시 밟으며 서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는 게 쉽지 않았다.
벨리타를 조종하는 게 도대체 누굴까 궁금했는데.
레이샤, 이제 앞으로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든 일을 꾸미는 데 있어 교묘히 처벌을 피하도록 계획했겠지. 웬만한 죄목으로는 옥에 갇힐 일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나도 너처럼 소문을 퍼뜨려 네 깨끗한 명성을 더럽혀 줄까. 참 볼만할 거야.
죽자고 달려드는데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전에 우선 그녀가 벨리타의 배후가 맞다는 확인부터 확실히 해 둬야 했다. 훗날 내 앞에서 발뺌할 수 없게, 벨리타의 입으로 직접.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쥐고 고개를 들었다.
“루안, 내일 궁으로 벨리타 영애를 불러 줘요.”
***
이제 막 날이 밝기 시작한 이른 아침이었다. 차고 푸르른 새벽의 어스름이 물러난 자리에 훈훈한 온기가 깃들었다.
“폐하, 벨리타 영애가 도착했다 합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던 소식을 들었다. 하루 동안 분노로 들끓어 있던 마음은 냉랭히 식어 있었다.
꽤 다급했나 보지, 벨리타. 쪽지에 관해 언급하니 이리 바로 달려오고.
나는 차분히 뜬 눈으로 앞에 있던 부인을 향해 명했다.
“들라 하세요. 아, 서재로 불러 줘요.”
“네, 폐하.”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곧 서재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기다리던 벨리타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의 그녀는 평소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밤새 뒤척이기라도 한 건지 눈가는 거뭇했고 얼굴은 창백했다. 새빨갛던 입술도 윤기 없이 메말라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나는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고 펼쳐진 책을 넘기며 답했다.
“그래요. 꽤 빨리 왔네요.”
“말씀하신 쪽지라는 게 무엇인가요?”
벨리타가 말을 돌리지 않고 대놓고 물었다. 초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가늘었다.
“영애도 알고 있지 않나요?”
“폐하!”
“재촉하지 말아요. 왜 이렇게 다급하게 굴어?”
나는 서랍 안에서 쪽지를 찾아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중요한 건 잘 간수해야지.”
“!”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쪽지를 본 벨리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도 쪽지가 없어진 건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겠지.
“내용이 썩 유쾌하진 않네요. 작정하고 나를 음해하려는 것 같은데.”
“…….”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이 레…….”
“황후 폐하.”
벨리타는 돌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발뺌을 할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절대 남에게 굽히는 법 없었던 자존심 높은 벨리타의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없었다.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지금 용서라도 해 달라는 건가요?”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폐하, 제발 모른 척 이대로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되나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벨리타는 이상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 앞에서 빌더라도 레이샤에게만큼은 이 사실을 숨기고 싶다 이건가.
‘공녀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기엔 뭔가 이상해.’
“넘어가 달라니. 영애, 그게 내 앞에서 할 말입니까?”
“다시는 폐하를 욕보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한 번만. 딱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레이샤는 어쩌면 하드엘의 흑마법에도 관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지금으로선 유력하다. 지금까지 그녀가 꾸민 짓들 모두가 황후인 나를 흠집 내는 일이었으니까.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얻기 위해 그랬던 거라면 앞뒤가 맞았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문제는.
‘칸제로스 공작도 레이샤의 이러한 행실을 알고 있느냐는 건데.’
알고도 묵인해 준 거라면, 더 나아가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제 딸이 황후가 되길 간절히 욕망하는 사람이었다면 흑마법사에게 대가를 치른 배후는 공작일지도 모른다.
자애롭게 웃고 있어도 속내는 알 수 없다. 부녀가 똑같이 추악한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당장 레이샤를 찾아가 캐묻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내게 불리할 수도 있었다.
칸제로스가와 흑마법사 사이에 교류가 있는지, 공작도 레이샤와 똑같은 인간인 건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레이샤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면 당장에라도 방해하려 들 테니까.
지금 보니 레이샤와 벨리타 사이의 관계도 캐내야 할 것 같고.
방향을 바꿔야 했다. 우선 내가 레이샤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는 건 모르게 해야 한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붉어진 벨리타의 눈시울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다들 왜 이렇게 내게 살려 달라 하는지 모르겠네요. 어제 가십지의 대표라는 자가 찾아와 내게 같은 말을 했거든요. 아, 누군지 알죠? 그 사람이 내 기사를 써 달라 사주했던 사람이 영애라고 하던데. 그것도 누군가와 공모한 건가요?”
“다 혼자 벌인 짓입니다.”
“왜 이렇게 감싸고도는지 모르겠네요. 난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는데. 찾을 거예요. 영애가 누구와 함께 이런 짓을 벌였는지.”
“…….”
“이 쪽지를 쓴 게 누구인지 물으려 했는데 아쉽게도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이만 가 보세요.”
“황후 폐하.”
“뭐해요? 가 보라니까.”
그녀는 한참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래의 그녀라면 모두 내 망상이라고 따지고라도 남았을 텐데.
벨리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가 뭘까. 협박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정말 찾으실 건가요?”
“영애,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어. 법망을 약삭빠르게 빠져나간 게 누구인데. 난 그동안 내게 했던 짓들을 처벌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지경이야.”
벨리타는 나를 설득하기를 포기한 것인지 그제야 힘없이 일어나 비틀거렸다. 그 행동이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녀는 소리 없이 고개만 숙여 내게 인사를 건네더니 제 손으로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곧바로 마샤티아 백작 부인을 불렀다.
“부인, 사람을 시켜 지금 벨리타의 뒤를 밟아요. 궁을 나서는 즉시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좀 봐야겠어요.”
레이샤, 어쩌면 이쪽이 네게 더 괴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네.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할 테니.
“어서 벨리타가 네게 이 소식을 전해 줘야 할 텐데.”
네가 불안하기라도 해야 조금은 내 속이 후련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