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개운치 않은 건 사실이에요.”
아델이 황후궁에 도착한 후로 가만히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레이샤를 만난 후로 내게 변화가 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은 폐하께 좋은 날이잖아요.”
그렇지. 오늘은 내게 의미 있는 날이지.
어차피 그녀의 거짓말이 내게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니 우선은 이쯤에서 그만 생각하자.
“맞아요. 그 기쁨만 즐기기에도 모자란 하루입니다.”
창 너머의 풍경은 평소와 같았다. 눈이 시리도록 하늘은 푸르렀고, 여린 풀잎들은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무성하게 자라났다.
달라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아까의 일이 꿈같이 여겨졌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들려오던 환호와 함성. 나를 향하던 제국민들의 눈빛.
정말 모든 것이…….
“에스타란토가 아벨리움의 축복이라 했던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아델을 보았다. 아델은 언제나처럼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폐하께서는 제국의 축복이십니다.”
내가 제국의 축복…….
솔직히 이 신성으로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이전에 나는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었다.
이번 생에서도 이 힘으로 하드엘을 지키고 나를 지키고,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단상에 서서 멀리를 내다보니 욕심이 났다. 제국의 황후로서, 신전의 주인으로서 아벨리움에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주고픈 욕심이.
“많이 노력할 겁니다. 그 수식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폐하께서는 이미 더한 수식도 어울리시는 분이십니다.”
“칭찬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장난스럽게 눈살을 찌푸리자 아델은 답 없이 싱글거리더니 돌연 뒤에 서 있는 다른 신전 기사단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내게 말을 건넸다.
“폐하, 실은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요?”
그 때문에 나까지 절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마력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을 연구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보통의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력을 주체하지 못할 때 쓰는 방법을 훈련했었죠. 이제 그보다 더 강한 마력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으니 앞으로는 그걸 배우시게 되실 겁니다.”
“정말인가요?”
더 강한 마력을 다스릴 수 있다고? 그럼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날 때 확실한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는 거잖아!
나는 감탄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델 경!”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 꽤 능력 있는 마법사라고.”
모든 일이 뜻대로 풀렸다. 앞으로 이렇게만 나아가면 돼. 연달아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다니 내겐 큰 행운이었다.
“너무 고마워요. 진짜 너무.”
아델이 그렇게나 많은 마법사와 고서를 짊어지고 갔던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마주 봤다. 아델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폐하를 위해 뭐든 합니다. 신전 기사단이자 폐하의 절친한 친구니까요.”
말을 마친 그의 두 볼엔 보조개가 깊이 패었다. 나는 기쁨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런 아델을 바라봤다.
“맞아요. 그대는 정말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지요. 참! 뭐 필요한 건 없나요? 나도 그대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은데.”
그동안 날 위해 노력한 대가는 보상해 주어야 마땅했다.
황후로서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금전적인 보상이 주가 되겠지만 그렇게라도 아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
“없습니다.”
“잘 생각해 봐요.”
“정말 없습니다.”
무언가를 주고픈 나와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는 아델 사이 이와 같은 대화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을 때였다.
“황후 폐하.”
잠시 나갔다 돌아온 백작 부인이 나를 불렀다.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내 앞에 섰다.
“황제 폐하께서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 하십니다. 황후궁으로 직접 오신다 하시는데 어떻게 말씀을 전할까요?”
“폐하께서요?”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자 평소 흔들림 없는 백작 부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흠흠.”
나는 괜스레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민망함을 감추었다. 그나저나 내가 황제궁에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시라고 하세요.”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백작 부인이 나가고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해 난 급히 루안을 찾았다. 지금 이 차림으로 식사를 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아델은 루안이 오자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스스로 허리를 굽혔다.
“그럼 저희는 모두 나가 있겠습니다. 황후궁 내부에 기사단이 배치되어 있을 테니 원하실 땐 언제든 찾아 주세요.”
“그래요. 고마워요. 그리고 다들 고생했어요.”
***
하드엘은 미리 도착해 식사가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가 빼 주는 의자에 앉아 차려진 음식들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커틀릿과 잘게 저민 푸아그라, 칠면조 요리까지.
“이게 다 무엇입니까?”
둘이서는 절대 먹지 못할 양이었다. 설마 내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잖소.”
내가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한데.
“하루 종일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대와 종일 함께 먹지.”
“네?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인 것 같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농담 같기도, 진심 같기도 한 말투였다.
그런데 하드엘은 정말 괜찮은 걸까.
아직 내가 황후의 자리에 머문다고는 하나 훗날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상실감이 클 것이다. 아무리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려도 좋다고 말했어도.
그의 표정을 살피다 문득 찾아든 생각에 나는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폐하.”
“왜 그러시오?”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니?”
하드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들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일부러 내 앞이라 내색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선대 황제께서 그를 얼마나 혹독하게 대하셨는지도.
에스타란토인 내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분이셨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분이셨다.
‘어쩌면 그게 당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하드엘의 진심은 의심치 않지만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것이다.
“폐하께서 지키시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는 폐하의 자리에서, 저는 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됩니다. 폐하께서는 에스타란토의 아래에 서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나란히 걷는 것일 뿐이죠.”
“황후, 위로의 말은 고맙지만, 어쩌지?”
“네?”
“난 이제 그런 건 상관없는데.”
그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던진 내 쪽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플로리아, 내가 포기하지 못한 건 당신이야.”
어느새 그는 내 목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가넷 목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릿한 그의 눈길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과 참 잘 어울려.”
“흠!”
하드엘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려오자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넬슨 백작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기척을 내었다.
하드엘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제 몸을 홱 틀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
“폐하, 저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백작은 큰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다. 그런 넬슨을 보는 하드엘의 눈빛은 방금 전 나를 보던 눈빛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서늘한 눈에 무심한 어조까지 곁들여 가며 하드엘은 넬슨에게 명했다.
“이만 나가 봐.”
“시중을 드는 이들이 모두 밖에 있으니 저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드엘은 진지한 고민 끝에 답을 내놓은 그를 노려봤다.
그런데 잠깐. 어차피 준비된 양도 많고 보는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는 자리니 넬슨 백작도 같이 먹으면 좋지 않을까?
“백작, 차라리 같이 식사하는 게 어떻겠어요? 어차피 우리끼리니까.”
“황후?”
하드엘과 백작이 동시에 놀란 눈을 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백작은 조금은 감동 받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후 폐하! 정말 그래도 되는…….”
“백작, 바쁜 일이 있지 않나?”
하드엘은 백작의 말을 뚝 자르고 나섰다.
“바쁜 일이요? 없는데요?”
“있을 텐데.”
“?”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백작을 향해 하드엘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올라온 서류들은 정리해 두었나?”
“네, 해 두었습니다.”
“회의 자료 검토는?”
“그것 역시 끝냈습니다.”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드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서야 난 느꼈다. 그가 나와 둘이 있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는 걸.
내게 백작에게 괜한 제안을 했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넬슨 백작, 마침 그대가 해 줄 일이 생각났어. 집무실 책상 왼편에 쌓여 있는 문서 전부를 다시 검토해.”
“네!?”
“뭐 하고 있지? 나가지 않고?”
그를 기어코 내보내겠다는 하드엘의 집념에 결국 백작은 울상을 지으며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축 처진 백작의 뒷모습을 보니 내가 그의 일거리를 더해 준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해졌다.
하지만 미안함과는 별개로 하드엘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고작 나랑 둘이 있으려 저리 위엄 있는 얼굴로 백작을 내쫓다니.
하드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백작이 나간 문을 바라보더니 내 옆자리에 와 앉았다.
“폐하의 자리를 두고 왜 여기로 오십니까?”
“너무 멀지 않소?”
마주 보고 앉았던 자리가 멀다 하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는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새어 나오게 했다.
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그를 보았다.
“폐하, 언제부터 이렇게 얄궂으셨습니까?”
“내가 얄궂다고?”
“백작을 그리 쫓아내시다니요.”
내 눈을 마주 보던 하드엘이 손을 뻗었다. 그의 긴 손가락 사이를 스친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머리를 훑고 지나간 손은 곧 나의 뺨에 닿았다. 갑작스러웠지만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당신이 이리 만든 것이오.”
“지금 제 탓을 하시려는 겁니까?”
“당신이 아니면 누굴 탓하란 말이오?”
“그래요. 다 제 잘못…….”
하드엘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의 너른 품에 나를 가뒀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의 품은 단단하고도 따스했다. 언제까지고 안겨 있고 싶을 만큼.
낮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마저 달았다.
“플로리아, 오늘 당신의 모습은 평생 있지 못할 거야.”
아까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구나. 이 사람은 나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몸을 일으켜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저도요. 저도 오늘 폐하의 모습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겁니다.”
무릎을 꿇고 내 앞에서 에스타란토의 사람이라 맹세하던 당신의 모습을 난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 평생.
하드엘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입가엔 나른한 미소가 띠어졌다.
“큰일이야. 이제 내가 계속 당신을 귀찮게 할 것 같으니.”
당신의 회색빛 눈에 내가 담겨 있는 게 좋았다. 나긋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좋았다.
우리의 앞날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황후.”
“예, 폐하.”
“내게 언제까지 존대를 할 것이오?”
“언제까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스타란토께서 불러 주시는 제 이름을 듣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