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우와…….”
“루안?”
그녀가 감탄하며 나를 바라봤다. 다른 시녀들의 반응도 다를 바 없었다.
“진짜 너무 아름다우세요, 폐하. 여자인 저도 반할 정도로.”
“그대들 덕분이죠.”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땋아 내린 붉은 머리를 손으로 훑었다.
소매가 넓은 새하얀 드레스는 화려하지 않았다. 평소를 생각하면 수수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소매 끝에 금실로 수놓아진 신전 문양이 전체적인 위엄을 더해 주고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은 언젠가 본 그림 속 성녀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럼 이제 베일을 씌워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루안은 반투명한 베일을 내 머리 위에 올렸다. 보석 가루가 뿌려진 베일은 내 작은 움직임에도 무지갯빛으로 오묘하게 반짝였다.
준비를 마치자 때마침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다가왔다.
“폐하, 아델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요.”
“네.”
내 명에 아델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 폐…….”
그런데 그는 인사도 전에 말을 멈추고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 민망해질 정도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왜 그리 멍하니 있어요? 내 얼굴에 구멍 뚫리겠어요.”
민망함을 덜기 위해 농담까지 덧붙였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뒤에 말은 괜히 했나?
“아델 경, 폐하 너무 아름다우시지 않으신가요?”
다행히도 루안이 말을 걸자 그가 입을 열었다. 멍하던 시선에도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네… 정말.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그런 말을 눈앞에서 들으니 꽤 민망한데요. 신전 기사단이 도착한 건가요?”
“다들 밖에서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죠.”
몸을 돌리자 드레스 자락이 사락 소리를 내며 바닥을 쓸었다. 나는 주저함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드디어 오늘이다.
수많은 제국민들 앞에서 내 정체를 알리는 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앞에 당당히 서는 날이.
오늘따라 유독 길어 보이는 황후궁의 복도에 구두굽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창단식이 열릴 곳에 도착하기 전인데도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것은 오늘 신전의 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원하던 대로였다. 이제 저 단상에 내가 오르기만 하면 된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솟은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신전의 터에서 한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곳. 내가 저곳에 서게 된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다.
“폐하께서는 위에서 기다리고 계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장로님도 폐하와 함께 계실 겁니다.”
다섯 명의 신전 기사들은 모두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아델은 다른 기사들보다 나와 거리가 가까웠다. 그렇기에 내 질문에 답을 해 준 것 역시 그였다.
아델 앞에서는 긴장한 기색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그가 가까이에 있다는 건 내게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앞을 보고 걸으며 바로 뒤에 있을 아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나 잘할 수 있겠죠?”
“폐하.”
아델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얼굴을 볼 순 없어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대충 상상이 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겠지.
“폐하께서는 뭐든 해내는 분이 아니십니까. 애초에 그런 질문이 필요 없는 분이시죠.”
뭐든 해내는 사람. 아델의 한 말을 읊조리다가 난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요. 그런 사람이죠, 나는.”
“오셨습니까.”
단상을 오르는 돌계단 앞에 하얀 로브를 두른 신전 마법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난 높이 뻗은 계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시작이구나.’
그동안의 많은 일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 번의 생을 겪으면서 환희와 기쁨에 젖어 들던 순간들이 있었다. 자책과 슬픔에 빠져들던 날들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면서 나는 단단해졌고 견고해졌다.
마침내 알게 된 진실에 스스로 맞설 수 있을 만큼.
“황후 폐하, 오르시지요.”
나는 잠시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가요.”
돌계단 앞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던 신전 마법사는 내 움직임에 맞춰 은색의 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 계단에 내 발이 닿자 그 종을 흔들었다.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작은 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의 등장을 고하는 맑은 소리가 이어지고 주변은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의 말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차랑
종소리의 여음이 귓가에서 사라졌을 때쯤 또 한 번 종이 울렸다.
이번에 그 소리는 신전 기사단이 계단에 올랐음을 알리고 있었다.
따스하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아련히 퍼지는 마지막 종소리는 내가 단상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울렸다.
‘하드엘.’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하드엘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마지막 계단에 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오로지 나 하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하드엘의 뒤로 장로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없이 빙긋 웃어 보이고 빛이 만든 길을 향해 걸었다.
머리를 덮고 있는 베일은 불어오는 바람에 우아하게 나울거렸다. 드레스 자락도 걸음에 맞춰 가볍게 물결쳤다.
계단에서 멀어질수록 점차 시야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사람들의 행렬이 신전의 터 너머까지 길게 벋쳐 있었으니 그 수에 압도될 정도였다.
“와아!!”
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단상 아래에서 제국민들의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땅을 울릴 듯 어마어마한 소리에 새들은 놀라 날개를 마구 치며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이리 높은 자리에서 이런 환호를 받을 날을 꿈꾸지 못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나는 한동안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난 대제국 아벨리움의 황후이자 붉은 별을 타고난 에스타란토입니다.”
그들은 내 말소리에 스스로 제 목소리를 죽였다. 그에 주변이 고요해지고 나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널리 울려 퍼졌다.
“이런 나의 권한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신전 마법사로 이루어진 신전 기사단을 창단하고자 합니다.”
나는 뒤를 돌았다. 그러자 아델은 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다른 신전 기사들보다 조금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곧 기사들의 서약을 읊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섯의 신전 마법사들이 에스타란토의 기사가 되어 플로리아 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델이 말을 마치자 장로가 다가와 내게 다섯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신전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앞으로 신전 기사단을 대표하는 증표가 되어 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델을 포함한 신전 기사단 모두에게 나눠 준 후 다시 제국민들을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놀랐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잠들어 있는 신성을 숨긴 것은 아직 그것이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떠도는 소문이 커지니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겠더군요.”
에스타란토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하여 귀족과 평민 가릴 것 없이 다들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서 날 폄하했던 귀족들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번지르르한 차림새만으로도 쉽게 구분이 되었다.
참 볼만한 표정들을 짓고 텐데 멀리 있어 보이지가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네.
“고서에 따르면 내가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당장 오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머리 위에 씌워진 베일을 내 손으로 벗겨냈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내고 시선을 내려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나는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그 자리에 앉지 않을 겁니다.”
잠시 소란이 일었다.
귀족들과 한 서약의 내용을 모르는 제국민들은 오늘 이후로 내가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당장 오르지 않는 것은 마력 훈련에 집중하기 위한 내 뜻이었지만 얼마 전 서약서를 적는 동시에 귀족들과의 계약이 되었다.
그렇기에 난 그에 적힌 내용을 제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귀족들과의 서약 때문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어떻게 알리느냐에 따라 민심은 뒤바뀔 테니.
아직까지 나에 관한 악한 소문이 사실이라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수 있도록 겸손하면서도 너그럽게 말을 해야 한다.
나는 잔잔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황후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부족한 내가 힘이 깨어나기도 전에 감히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지요.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황후로서 그대들에게 더욱 덕을 보인 후가 되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나는 우리 아벨리움의 풍요를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어려움이 있다면 언제든 황궁의 문을 두드리세요.”
말을 마치자 잠시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이 환호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얼마 안 가 여기저기서 박수와 찬사가 쏟아졌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보란 듯 여유롭게.
서약서를 받아 간 귀족들이 자리에 있다면 그들은 아마 무척이나 황당해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과의 서약을 아량이라도 베풀듯 이용했으니.
하지만 그런 것까지 내가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득은 없었으니까.
박수 소리를 뒤로 한 채 단상을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돌연 하드엘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이번 창단식에서 하드엘이 나설 일은 없었다. 지금 그의 모든 행동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가넷이 박힌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하드엘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며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황후.”
“폐하?”
어느새 하드엘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장로를 향해 이게 무엇이냐 입을 벙긋거리며 물었지만 그는 흐뭇하게 나와 하드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딜 보는 것이오. 당신의 시선이 닿아야 할 곳은 여긴데.”
나긋한 그의 음성에 나는 홀린 듯 하드엘을 쳐다보았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햇빛 아래에서 그의 백금발 머리칼은 윤기를 더했다.
“내 선물이오.”
하드엘은 두 팔로 내 목을 안듯이 감싸며 원래 차고 있던 물빛 목걸이를 풀은 뒤 자신이 들고 있던 붉은 가넷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실바람을 타고 흐르던 그의 향기가 한층 짙어졌다.
“에스타란토께 이리 닿을 수 있으니 영광입니다.”
하드엘이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그의 숨결이 귓가에 선명하게 와 닿았다.
나는 목을 장식하고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일부로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선물한 것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스타란토의 상징이 적색이니.
내게서 떨어진 하드엘은 곧이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폐하, 뭐 하시는 겁니까?”
나만큼이나 당황한 제국민들은 숨죽여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황제가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팔이 떨어지겠소.”
재촉에 못 이겨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하드엘은 이런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고개를 들며 부드럽게 웃었다.
더없이 차가운 분위기의 얼굴임에도 나를 보는 저 눈빛만큼은 따스했다.
“플로리아, 에스타란토의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나는 평생토록 당신의 사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