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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72)화 (7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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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왜 제가 다 기대가 되죠?”

루안은 내 목에 초록빛 페리도트가 박힌 목걸이를 대 보다 말고 들뜬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런 루안도 나만큼이나 긴장되진 않으리라.

“어떤 분들이실까요. 엄청 대단한 분들만 모이셨겠죠? 언제 오신다 하셨죠?”

“곧 올 거예요. 방금 전 아델 경에게 쪽지를 받았거든요.”

신전 기사단과의 첫 만남.

공식적인 창단식을 앞두고 그들과 만남을 갖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델만 곁에 있을 때는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되기 전까지 최대한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신전 기사단의 존재를 감추는 게 무의미해졌으니까.

어차피 곧 열릴 창단식에서 모두가 그들을 보게 될 테니 그들이 황후궁을 찾는 것은 이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이요? 그럼 서둘러 단장을 마쳐야겠어요!”

루안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나는 그런 루안을 보며 가만히 미소 짓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발그레한 뺨과 분홍빛이 도는 입술. 이 모든 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죽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다니.

내게 얽힌 비밀을 알게 된 지도 벌써 수일이 흘렀다. 그간 흑마법에 관한 책만 파고들었던지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세계, 이곳에서 지켜야 할 내 사람들. 모든 고통이 나의 죽음으로 초래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잠들지 못했다.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여도 흑마법에 당해 까맣게 물들어 가던 하드엘의 눈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어긋난 운명은 반복될 수 있다 했지. 더 지독하고 질기게.

흑마법을 이길 수 있는 건 에스타란토의 힘뿐. 흑마법은 그 마력의 원천이 어둠이기에 백마법사들은 흑마법의 실체를 확인하기조차 힘들다 했다. 그러니 백마법사들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래서 하드엘이 어둠에 먹혀 버린다면 그의 마음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지금으로선 현재 나의 생이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누가 흑마법사에게 대가를 주었는지 알면 일이 수월해지겠지만 보았던 장면을 아무리 되새겨 봐도 배후를 알아낼 실마리는 없었다.

어차피 누구인지를 찾아낸다 해도 당장은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긴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그자를 옥에 가둬 둘 수도 없으니 경계하는 것 정도겠지.

‘정말 누굴까.’

날 확실히 죽이려고 하드엘을 이용했으니, 내게 원한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내 죽음을 바라는 자.

내가 죽고 가장 큰 이익을 얻었던 자.

‘잠깐.’

가장 큰 득을 본 자들이라 하면…….

“칸제로스 공작가……?”

나는 곧바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공녀가 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곤란한 상황마다 나를 도왔던 그녀였다. 남들이 황후인 나를 욕할 때마다 그녀는 앞서서 그들을 꾸짖었다.

공작도 제국에 헌신적이었던 사람이니 칸제로스 공작가를 의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폐하. 어떠세요?”

단장을 모두 마쳤는지 루안이 한 걸음 물러나며 내게 물어 왔다. 그에 나는 심란한 기색을 감추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마음에 들어요. 오늘 목걸이가 드레스랑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제가 보아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참 귀걸이는 내게 줄래요?”

“네, 알겠습니다.”

공녀와 칸제로스 공작.

그렇지. 그들을 의심을 해서는 안 되지.

귀족들 중에선 거의 유일하다시피 나를 편견 없이 대해 줬던 사람들이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이상했다.

흑마법사는 대가를 받고 하드엘의 어둠을 건드렸다. 그렇다는 건 하드엘은 흑마법사에 의해 마음을 조종당했다는 건데. 그 상태에서 곧바로 레이샤 공녀를 황후로 맞이했다고?

“폐하, 여기요!”

루안은 목걸이와 같은 페리도트 귀걸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조그만 상자 안에 놓여 있는 그것을 집어 들어 귀에 걸었다.

정교하게 가공된 보석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양쪽 귀에 귀걸이를 모두 걸고 나서 난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냥 넘기기엔 아무래도 거슬려.

지금껏 겪어온 일들이 내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다. 뭐든 당연한 건 없다는 것.

이 일에 연관된 자를 알아내려면 누구든 배제해서는 안 된다.

설령 칸제로스 공작가라 할지라도.

***

“아벨리움의 빛이신 에스타란토를 뵈옵니다.”

아델을 포함한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내 앞에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하얀 망토에 새겨진 금빛 문양이 그들이 여느 기사들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감정이 벅차올랐다. 나를 위한 신전 기사단이라니.

“반가워요.”

장로가 선발한 이들이니 실력은 확실하겠지.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들이 고개를 들자 아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주변에 신전 동료들이 있어서인지 아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저희 신전 기사단은 앞으로 폐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의 목숨을 다해 지켜드리겠습니다.”

“뛰어난 실력들일 테니 믿고 의지할게요.”

내가 다가가 손을 내밀자 그들은 차례로 자신을 소개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릭스입니다, 황후 폐하.”

“바릴호움입니다.”

“저는 릴리입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황후 폐하! 줄리아입니다.”

특히나 줄리아는 잔뜩 긴장하여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경직되어 맞잡은 그녀의 손에는 땀이 송골 맺혔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긴장 풀어요, 줄리아 경.”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그 끝에는 아델이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도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델은 소리 없이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기사단장 아델입니다. 신전의 기사로서 에스타란토께 제 모든 날을 바칩니다.”

“아델 경, 소개하지 않아도 그대는 내가 아주 잘 알죠.”

그러고 보면 내 지난 생에 아델은 없었는데. 운명은 어디서부터 바뀌기 시작한 걸까.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더 단단해진 내 모습이.

돌이켜보면 기억을 잃어 참 다행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원래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면 내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숨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럼 지금 아델의 눈에 비친 내 모습도 보지 못했겠지.

“신전 기사단 창단식이 정확히 일주일 후죠?”

“그렇습니다.”

일주일 후. 모든 게 달라진다.

귀족들과의 서약대로 정식으로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앉지는 않겠지만 나를 보는 시선, 태도 하나까지 전부 달라질 것이다.

신전의 주인, 제국의 축복, 아벨리움의 수호자.

앞으로 나를 뒤따를 수많은 수식어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변화는 언제나 두렵지만 하드엘, 당신을 잃는 일, 내 사람들을 잃는 일 이제 그것보다 두려운 건 내겐 없었다. 그러니 뭐든 할 수 있어.

“창단식은 최대한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어야 합니다. 모든 제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있도록.”

“일전에 전해 주신 뜻대로 준비 중에 있습니다.”

내가 에스타란토의 흉내를 내는 가짜라는 소문과, 고귀한 신성을 이어받은 진짜 에스타란토라는 소문. 지금 제국민들 사이에선 이렇게 두 가지 소문이 대치되고 있었다.

와중에 봄의 무도회 즈음에 하드엘에게서 나를 구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은 노래가 되어 요즘 더욱 구체적으로 불리고 있었다.

흥미로운 내용을 덧붙인 쉬운 노랫가락은 말보다도 빨리 퍼져 나갔다. 그 덕에 누군가 악의를 지니고 퍼뜨린 소문에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으니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서약을 받아 간 귀족들도 당장은 잠잠했다. 황제의 피까지 보았으니 그들도 약속을 어길 순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일하게 있을 생각은 없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그 전에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한다.

어떤 소문이 진짜인지, 그대들이 따라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또한 최대한 널리 창단식에 관한 이야기를 퍼뜨려야 합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세요.”

“예, 폐하.”

아델은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내가 에스타란토라는 걸 끝까지 믿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창단식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은 내가 진짜라는 소문을 믿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러도록 만들 거니까.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신전 기사단은 본래 자신의 자리인 신전으로 돌아가려 했다. 아직 정식으로 기사단이 꾸려진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델 경? 함께 가지 않으세요?”

“먼저 가라.”

하지만 모두가 나가도 아델만은 끝까지 자리에 남았다. 나는 그런 아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신전 근무 아닌가요?”

“폐하, 저것이 다 무엇입니까?”

그는 책상 위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델의 시선이 닿은 곳엔 며칠 동안 쌓아 두고 본 흑마법 책이 있었다.

“흑마법에 관한 서적들입니다. 필요한 곳이 있었어요.”

“필요한 곳이요?”

“아델 경, 안 그래도 마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근방에 대가를 받고 흑마법을 사용해 주는 흑마법사가 누가 있는지 찾을 수 있나요?”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드물다 했으니 아델에게 답을 들으면 흑마법사의 정체를 추려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내 기대감은 그의 다음 말로 단번에 사그라졌다.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아가기는 하나 그 위치가 타인에게 발각되는 즉시 자리를 떠날 거고요. 하지만 자신을 찾는 이들이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원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채는 놈들이니 그런 이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일부러 드러내 보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아 그러니까…….”

뜻밖의 질문에 난 적당한 답을 찾아내느라 말을 얼버무렸다. 아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위험에 빠지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

“에스타란토의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다른 마법 종류의 지식도 알아 두면 좋을 듯싶어서요. 자세히 알아보다 보니 흑마법을 사용하는 이들이 궁금해지고 했고.”

“위험합니다. 흑마법은 절대 가까이해서도, 그 마법을 사용하는 자를 상대해서도 안 됩니다.”

“알아요, 나도.”

“그들은 자신의 마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 어둠을 이용합니다. 그러니…….”

이러다 괜히 걱정만 끼치겠어. 나는 그가 말을 하는 도중에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자, 이만 돌아가실까요?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님. 난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 마요.”

“폐하! 제 말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의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 책상 앞으로 가 그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책상 한편에 자리한 자그마한 보석함의 은테가 반짝거렸다.

나는 그것을 열었다 닫는 무의미한 행동을 이어 가다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델의 말처럼 그들은 위험한 존재다. 황제인 하드엘도 한순간에 그렇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그들이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었다.

만약 흑마법사를 상대해야 한다면 그건 내 몫이니까.

부서진 빛이 새하얀 천장 위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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