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그때도 같은 말을 하셨죠.]
그게 내가 시간을 되돌려 달라 한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하드엘을 공격한 그자는 누구인가요.”
흑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분명 흑마법사일 것이다. 그 남자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를 찾는 것은 플로리아 님의 몫입니다. 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대답에 실망할 새도 없이 홀로 아까의 장면을 되짚었다.
허상 같은 공간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흑갈색 눈만 기억에 남았다.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임은 확실했다.
흑마법사라면 숨어 지낸다 했으니 찾는 게 어려울 테지. 다른 방향으로 추적해야 했다.
…대가!
하드엘을 공격한 남자가 분명 마지막에 그리 말했다. 대가를 받았다고.
이제 끝났으니 나오라고 한 걸 보면 그에게 대가를 준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장면이 끊어지는 바람에 흑마법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형체는 아예 보지 못했다.
하드엘의 앞에 바로 서지 않았다는 건 대가를 준 그자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일 텐데.
“흑마법사가 하드엘을 공격했을 때, 그때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있었어요. 혹시 그 이후를 더 보거나 할 수는 없는 건가요?”
[흑마법에 의해 어둠에 잠식된 직후로는 그분의 시야가 온통 까맣게 변했습니다. 당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없다는 뜻이죠.]
결국 내가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증거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을 추려 나갔다.
가장 유력한 사람은 벨리타.
하지만 벨리타는 그 전에 죽는다.
그렇다면 벨리타의 뒤에서 그녀를 조종하는 사람인가.
몰락 귀족이 에스타란토라는 것을 믿기 싫어하는 귀족들이 범인일 수도 있겠지. 결론적으로는 나를 확실히 죽이기 위해 하드엘을 이용한 것이니까.
[플로리아 님, 어긋난 운명은 반복될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아니면 또 다른 방법으로.]
“괜찮아요. 난 이제 죽지 않아요.”
만에 하나 그 더러운 운명을 막지 못해 같은 일이 반복된다 해도 난 스스로 깨어날 것이다. 기필코. 하드엘 당신도 그렇게 두지 않아.
“당신이 말했죠. 난 단단해졌다고, 과거의 두려움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맞아요. 난 이전과 달라요.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어긋난 운명 같은 건.”
나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주위의 붉은빛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울리던 목소리도 점점 희미하게 들려왔다.
[플로리아 님, 항상 명심하세요. 언제든 변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뭐든 더욱 질기고 악하게 다가올지도…….]
-똑똑
“들어가 봐도 될까요?”
나는 갑자기 들려온 루안의 목소리에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묘한 목소리도, 반짝이던 붉은빛도 완전히 사라졌다. 문밖에서는 놀란 시녀들을 챙기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멈춘 듯 정지해 있던 세상도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산들거렸고, 나비는 화려한 날개를 접었다 피며 꽃 사이를 넘노닐고 있었다.
나는 큰 심호흡을 내뱉었다.
아까의 일은 꿈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평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내가 정말 플로리아…….”
나는 시선을 내려 붉은 머리를 매만졌다. 당장은 두 사람의 기억이 한 몸에 함께 있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하나는 내가 하드엘 당신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금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하드엘. 나 때문에 흑마법에…….
어둠이 마음에 배어들수록 창백해지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처음 본 그날, 나의 거친 손을 보고 그렇게나 아린 표정을 짓던 당신이었다. 그런 사람이 날 죽게 버려둘 리가 없었는데.
당신은 날 미워했어도 내 손끝에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난 그것을 알면서도 날 죽음으로 몰아간 건 하드엘의 당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걸 죽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도 몰랐다면 어땠을까. 당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겠지…….
-똑똑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답이 없자 루안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폐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시죠?”
나는 직접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루안은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마지막 순간까지 날 지켜 주던 사람. 루안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그때가 떠올라 난 그녀를 꼭 껴안았다.
“루안, 반가워요.”
“네, 네?”
“너무 너무 반가워.”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자 어리둥절하여 루안도 나를 껴안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요. 아무 일도. 그냥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좋네요.”
내가 놓아 주자마자 그녀는 나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으셨던 거죠?”
“그럼요. 그냥 여기 있는 책을 보고 있었…….”
나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을 씻고 봐도 연분홍 표지의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 책도 같이 사라진 건가?
-짹!
“알링?”
나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에 뒤를 돌았다. 붉은 깃털을 뽐내며 서재 책장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알링이 보였다.
알링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어라? 알링과 같이 계셨어요?”
“그런가 봐요. 나도 몰랐네요. 알링을 이제야 봤어요. 루안, 그런데 다른 시녀들은 어때요? 좀 진정이 되었나요?”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몰라 하긴 하지만요.”
다행이다.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 줄래요? 난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시려고요? 호위를…….”
“호위는 괜찮아요. 폐하를 다시 뵙고 오려고요. 나 예전 기억이 모두 돌아온 것 같거든요.”
루안은 더듬거리며 내 말을 되짚다가 이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곤 서둘러 길을 내주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돌아오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 주겠다 약속하고 궁을 나섰다.
황제궁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난 옆으로 퍼진 상앗빛 드레스 자락을 잡고 뛰듯이 걸었다.
“하드엘.”
그의 이름을 되뇌자 입 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는 것만 같았다.
다시 이 눈으로 그의 백금발 머리칼을 담고, 회색빛 눈동자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벅찼다.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당신은 알까.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마음을 열어 주어 고맙다 할까. 그도 아님 이렇게 나올 거면서 왜 그동안은 매정하게 굴었냐며 타박이라도 할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와 입을 맞춘 것이 방금 전 일임에도 며칠이 흐른 느낌이었다.
“폐하.”
나는 화원 근처에서 걸음을 늦췄다. 굳이 황제궁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에스트라의 화원에 그가 있었으니까.
에스트라의 꽃처럼 하얀 제복을 입고 선 하드엘은 멍하니 손에 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폐하.”
하드엘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후?”
나를 발견한 그의 눈가엔 미소가 서렸다.
자신을 바치겠다 속삭이던 하드엘의 나긋한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너무나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지금 당장 하고픈 말은 딱 하나였다.
“지켜드리겠습니다, 폐하.”
당신의 마음이 어둠에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다신 운명이 어긋나지 않도록.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살갗에 닿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하드엘은 이런 나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며 내 눈을 마주 봤다.
“지켜 준다니. 든든하군. 그런데 그 말을 하려고 내게 돌아온 것이오?”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하드엘은 무언가 다른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네,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아주 많이.
“방금 전 일은 나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오.”
다정한 말투에 은근한 서운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당신을 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당신이 나를 피하지 않았다면 우린 처음부터 이렇게 편히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글쎄요. 아, 폐하께서 눈물을 보이신 일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장난스럽게 말을 걸며 환히 웃자 그가 내 허리를 꽉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맞닿는 그의 온기가 마음 깊은 곳에 일말의 두려움도 남아 있지 못하게 했다.
“황후.”
“예, 폐하.”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아. 당신을 보고 있는데도 이리 보고픈 걸 보면 말이야.”
그가 하는 말이 너무나 엉뚱해서 난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운 얼굴로 제법 능청스러운 말을 잘 내뱉는 그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반한 제게 할 말은 아닙니다.”
“두 번?”
하드엘이 내 양어깨를 잡고 물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대답을 재촉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하드엘의 시선은 한층 집요해졌다.
“있습니다, 그런 게.”
마지못해 빙빙 돌려 답을 하는데 문득 오른쪽 어깨에 무언가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왼손에는 헤지다 못해 닳고 닳은 주머니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신을 부르기 직전까지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이 주머니일 줄이야.
“이걸… 아직도 지니고 계셨어요?”
“이 주머니를 기억하시오?”
“그럼요. 빠짐없이 모두 기억나요. 폐하에 관한 건 전부.”
내겐 너무나 익숙한 물건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난 항상 저 주머니를 들고 다녔으니까.
주머니 안에 담아둔 약과 붕대는 잡일로 돈을 벌며 하루가 멀다고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몇 년 전 바로 이곳에서 하드엘에게 저 주머니를 건네주고는 나도 잊고 있던 것이었다.
“왜 버리지 않으셨어요?”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었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주머니를 하드엘은 꽉 쥐었다.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남들이 무자비한 황제라며 두려워해도 내가 보는 당신은 한없이 여린 사람이었어.
“고마워요.”
“무엇이 말이오?”
“당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해줘서.”
이번 생의 결말은 비극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다른 누군가의 운명이 아니라 내 운명을 바로잡아서.
나를 구하고 당신을 구해서.
***
“너 아까 또 황실 도서관에 갔다며? 언제까지 고서만 파고들 거야? 마력을 다스리는 법을 연구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잠은 자야지.”
“…….”
“아델, 내 말 듣고 있어?”
신전을 향해 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서서 아델은 한참 동안 에스트라의 화원을 바라보았다.
그림 같은 풍경을 뒤에 두고 다정히 서로를 마주 보는 두 남녀가 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들을 누가 보아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이젠.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결정은 역시 폐하를 용서하시는 일이었네요.
인상을 찡그려도,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아도 아름다운 그녀였지만 저렇게 환히 웃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홀린 듯 플로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누군가에게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이 있던가.
냉정하고 모질게 황후를 대했다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화가 났다.
나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여인을 그리 대한다는 것이. 전부를 다 주어도 모자랄 여인이었으니까.
그런데 황후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잠시 그게 자신의 오해이길, 소문이 사실이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황후를 위해 대신 피를 본 것이 황제가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리되면 나를 한 번 더 보아 줄 테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악한 것이라는 걸 그때야 느꼈다.
그래도 이 마음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라도 당신의 주위에 머물 수라도 있으니.
그는 쓰린 마음을 다잡았다. 이것까지는 저도 어쩌지 못 하는 일이었다.
에스트라의 화원을 담은 눈에 쓸쓸한 빛이 더해졌다.
황후 폐하, 당신의 친구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딱 그 정도의 곁만 허락해 주십시오.
주군을 지키는 기사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딱 그 정도의 곁만…….
아델은 멀리에 선 플로리아에게서 이만 시선을 거두었다.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그 웃음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옆에 남아 있을 수 있으니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