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아리고 아렸던 마음의 정체를 이제야 알았다.
그렇게 당하고도 버리지 못한 마음이. 그 미련한 마음 때문에 당신을 잊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하얀 손등을 내려다봤다.
이제는 상처가 많이 아물었지만 여전히 곳곳엔 흐릿하게 흉이 남아 있었다.
과거, 고된 일 끝에 망가진 손을 보고 사람들은 나를 욕했다. 내 집안을 욕했고 내 처지를 욕했다.
화원의 다리 위에서 당신을 처음 본 날 아무렇지 않게 이 손을 내보였을 때.
거친 손을 그렇게나 쓰라린 눈빛으로 바라봐 주던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제껏 당신의 동정에 취해, 그저 잠깐의 봄날 단 한 번 보여준 미소에 취해 죽은 후에도 당신의 사랑을 바란 것이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너무나 비참해서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당신을 사랑하는 데 있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는 내가 싫었다.
[플로리아 님께선 서서히 기억을 되찾아 가고 계셨습니다.]
“차라리 되찾지 못하게 하지 그랬어요!”
[예측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운명을 바로잡는 데 방해가 되기에 기억을 돌려 드리지 않은 것인데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신성이 그리 강한 회복력을 부여할 줄은 저 또한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플로리아 님. 플로리아 님께서는 이미 단단해지셨습니다. 이제 과거의 두려움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니고 계세요. 틀어졌던 운명 또한 바로잡아 가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운명을 바로잡아 가고 있다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게 운명을 바로잡는 일이야?
“당신이 틀렸어요, 전부.”
오히려 운명은 지독하게 얽히고 얽혔다.
하드엘은 날 끝까지 미워해야 했다. 그래야만 나도 날 죽게 버려둔 당신을 미워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게 매일같이 당신의 뒷모습만 눈으로 훔치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텐데.
나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변호사로 살던 내 삶이 가짜인가요?”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일 뿐입니다. 책은 에스타란토의 기억을 이야기로 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거짓된 세상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잘됐네요. 난 이윤지로 살겠어요. 이 세계를 떠날 거예요. 죽은 날 멋대로 살려낸 게 당신이죠? 그러니 책임지고 날 다시 보내 줘요.”
[마지막 기억은 아직 되찾지 못하셨군요. 이 모든 것은 플로리아 님께서 에스타란토의 수호자인 제게 직접 명하신 일입니다.]
“내가 명한 일이라고요?”
믿기지 않지만 저 수호자라는 자가 거짓을 말할 리도 없었다. 저 말이 진짜라면 이유는 하나겠지.
“폐하께 복수를 할 테니 시간을 되돌려 달라 하기라도 했나요? 그런 거라면 이제 전부 필요 없어요.”
[아니요. 그 반대였습니다. 운명을 바꿀 테니 시간을 되돌려달라고 하셨죠. 그분을 구해 내고 스스로를 살릴 거라 하시며.]
하드엘을 구한다 했다니, 아무리 미련해도 설마 내가 그랬을 리가.
“그 사람은 날 죽게 버려뒀어요. 구할 것도 없겠지만 그럴 이유도 없어요.”
[흑마법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점으로 플로리아 님의 모든 운명이 틀어진 것입니다. 어둠에 덮여 마음을 잃기 직전까지도 그분은 플로리아 님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흑마법?”
[원하신다면 밝혀드리겠습니다. 그날의 진실을.]
유난히 달빛이 밝던 날. 창가에 기대어 하드엘과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마음을 깨닫지 못했어도 어떻게 해서든 날 살릴 것이라 했다.
그게 진짜라면, 정말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원해요. 그러니 알려 주세요.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기억 전부를.”
간절히 응답하자 주위가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었다.
방황하는 내 눈에 차츰차츰 황제궁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향기, 익숙한 장소.
“다시 말해 보거라.”
그리고 익숙한 하드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 *
“폐하.”
넬슨의 주저에 하드엘은 차가운 눈을 번뜩였다. 매번 한 치의 동요도 없던 회색빛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 보라 하였다.”
“황후 폐하께서 피를 토해 내고 계신다 합니다. 목숨이… 위태로우십니다.”
“뭐?”
백작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마지막 말에 하드엘은 무너지는 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황후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토록 바라던 것인데.
플로리아.
당신에 대한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되뇌던 그날 이후로 줄곧…….
하드엘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 숨결에 떨림이 묻어났다.
두려움에 찬 눈을 들자 창문 너머 에스트라의 화원이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검은 배경 위로 자신이 상기한 봄날을 그려 냈다. 플로리아. 그녀가 옆에 있던 그 찬란했던 봄날을.
제국 가장 높은 곳에 서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을 혹독하게 살아왔다.
죽을 만큼 힘들 땐 투정 대신 책을 펼쳤다. 손이 곪아 진물이 나와도 수련장에 가 칼을 잡았다.
그렇게 지켜 온 자리였다. 지금 나의 자리는.
그런데 플로리아, 그대는 단지 에스타란토의 신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나의 자리를 위협했다. 내가 지켜온 모든 것을 앗아 가려 했다.
그런 당신의 죽음. 기뻐해야 마땅한 것인데.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지도 못할 테니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는 게 맞는 것인데.
그런데 난…….
‘태자 전하께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잊고 있던, 아니 그토록 잊으려 애썼던 음성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티 없이 말갛게 웃던 플로리아는 입가를 움직여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리 말을 해 주고 있었다.
나를 향해, 그토록 환히 웃으며.
시야가 아득해질 때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독기가 서린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아.
당신이 진짜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다신 그 얼굴을 보지 못할까 봐.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이렇게 둘 순 없었다.
애써 견뎌 왔던 지난날이 다 허상이 되어 버린다 해도, 당신을 살려내는 게 나의 위협이 된다 해도 우선은 그대를 살리고 봐야겠다.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살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
하드엘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베일 듯 날이 선 말투에는 나날이 약해지는 그녀를 보며 느끼던 괴로운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모든 의원을 붙여라. 궁내의 의원뿐 아니라 실력이 좋다는 의원 전부를 찾아 궁으로 불러들여. 지금 당장.”
“폐하, 황후 폐하의 병은 의원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신전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백작의 대답에 하드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럼 장로를 불러라. 내가 그를 직접 만나야겠다.”
* * *
유독 스산한 밤이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하얀 달빛이 희미했다.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도, 이름 모를 동물의 울음소리도 기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하드엘은 장로를 만나기 위해 홀로 조급히 좁은 길목을 걸었다.
한시가 급했다. 장로가 황제궁으로 직접 찾아올 때까지 편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을 보고 주먹을 쥐자 푸른 힘줄이 도드라졌다.
“어떻게든 살려야 해. 어떻게든…… .”
이토록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해본 적이 있었던가.
하드엘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에스타란토의 신성을 향해 그녀의 목숨을 간절히 구걸하고 있었다.
애원하고 또 애원하며.
이제 이 길목만 빠져나가면 황제궁으로 향하고 있을 장로와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하드엘의 걸음 폭은 더욱 넓어졌다.
-터벅
그런데 그때.
풀잎이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땅 아래 비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곧이어 두터운 나무줄기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한 남자가 나타나 하드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흑갈색 로브를 두른 남자는 어둠 속에 제 얼굴을 숨겼다. 그는 방긋 웃고 있는 눈만을 드러내며 하드엘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인사를 건네는 몸짓이 한없이 건방졌다.
“비켜라.”
하드엘은 시간을 지체시키고 있는 눈앞의 남자를 살벌하게 내려 봤다.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황제의 앞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오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하드엘은 그것을 탓할 여유가 없었다.
옷차림 또한 수상하나 그가 누구이건 상관없었다.
“비키라 하였다!”
하드엘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고함쳤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전히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어딜 그리 다급히 가십니까. 설마 황후 폐하를 구하러 가시는 겁니까?”
남자의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리자 어둠이 내려앉은 길은 더욱 음침해졌다.
하드엘은 대답 없이 그를 지켜보다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은 만들면 그만인 것을.
남자의 목을 겨눈 검이 높게 올라갔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칼날이 섬뜩하게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윽!”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는 수상한 남자가 아닌 하드엘 쪽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빛이 연기처럼 그를 감싸고 돌았다. 하드엘의 회색빛 눈동자가 순간 까맣게 물들었다.
혼이 나간 듯 두 눈은 남자에게 고정된 채였다.
“참으로 애절한 마음입니다. 어둠에 삼켜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 있는 게 황후 폐하를 향한 마음이라니.”
마지막까지 칼을 놓치지 않는 황제를 보며 남자는 안타깝기라도 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야. 아파라.”
뒤늦게 눈 아래 따끔거렸다. 칼이 스치며 상처가 생긴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쓸자 한 방울의 핏물이 남자의 손가락 끝에 번졌다.
그는 로브에 피를 문질러 닦고 멍하니 서 있는 하드엘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송구합니다. 저도 대가를 받아서 말이죠. 마침 에스타란토라는 게 거슬리기도 했고. 안 그래도 백마법사들이 기승인데 힘이 발현되면 둘이 붙어먹을 게 뻔하잖아.”
발끝에 닿는 돌을 무의미하게 차내며 남자는 피식거렸다.
“그리 약한 자가 에스타란토의 신성과 마력을 품다니. 뭐, 가만히 둬도 죽기는 했겠지만 우리 폐하께서 그걸 자꾸 방해할 것 같아서. 혹시나 살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장로를 막을 사람도 필요하고.”
주문이라도 걸듯 계속해서 중얼거리다 그는 돌연 뒤를 돌았다. 싸늘한 밤바람에 길옆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선들댔다. 남자는 그중 자신이 몸을 숨겼던 나무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나오시죠? 다 끝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