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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67)화 (6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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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

“황후 폐하, 백작님께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주무시고 계신다던가요?”

“네, 가 보시겠어요?”

루안이 내게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백작에게 따로 전갈을 달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또 수면 약을 먹은 건가?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기에 의아했지만 나는 답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늦은 오후의 금빛 햇살이 눈앞에서 부서져 내렸다. 황제궁을 가는 내내 난 말 없이 걷기만 했다.

내 복잡한 심경을 느꼈는지 뒤따라오는 시녀들도 오늘따라 조용했다.

걸음이 무거웠다. 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뒤엉키고 또 엉켜서 이젠 나조차 형체를 모를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것은 스스로 제 몸집을 키워가니 이젠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어? 폐하, 저기 아델 경 아니신가요?”

줄곧 텅 빈 허공만 응시하고 있던 나는 루안의 말을 듣고 눈으로 아델을 찾았다.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아델은 이쪽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아델 경, 어딜 가는 길이에요?”

“황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신전으로 복귀하는 길입니다. 필요한 책이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그제야 아델의 두 손 위에 잔뜩 쌓인 책들이 보였다. 죄다 고서에 마법서였다.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그리 달려오다니. 괜한 사람을 붙잡고 있었었다는 생각에 난 서둘러 그를 보내려 했다.

“그럼 난 가 볼게요. 무거울 텐데 어서 돌아가 봐요.”

“잠시만요!”

그런데 아델은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오히려 돌아서려는 나를 붙잡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어딜 가시는 길이십니까?”

예상 밖의 싱거운 질문이었다.

“난 황제궁에 가는 길입니다. 폐하를 뵐 일이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곧 아델의 눈가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였다.

“오늘따라 귀걸이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을 뱉은 그가 돌연 책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한 발짝 다가왔다. 그리고 팔 부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 가까워졌다 멀어진 그의 손에 가는 실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집은 것은 드레스에 붙어 있던 내 붉은 머리카락 한 올이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그나저나 어서 돌아가 봐요. 책 무게가 상당할 텐데.”

아델은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들으며 제법 여유롭다는 듯이 말을 했다.

“이 정도도 들지 못할 만큼 나약하진 않습니다. 황후 폐하를 지키는 기사가 아닙니까, 제가.”

나는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또 웃네요. 아까까진 나름 심각했는데.”

“그게 제 전부…….”

아델은 스스로 제 말을 잘라냈다.

“왜 그래요, 아델 경?”

“아닙니다. 아무것도. 너무 쓸데없는 말이라.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중요하지 않다면야. 생각해 보니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일 수도 있는 거고.

“그래요. 나도 가 볼게요.”

나는 결국 아델이 잘라 낸 말을 듣지 못한 채 황제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참 동안 등 뒤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걷다 말고 멈춰 서서 뒤를 확인했다. 돌아가 보겠다고 말한 그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도 꽤 굳은 표정으로.

“아델 경!”

나는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그를 불렀다. 그러자 아델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잘못 보았던 것인가 생각이 들 만큼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은 금세 풀어졌다.

아델은 입꼬리를 올리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 색과 꼭 닮은 햇살이 그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난 큰 목소리로 그런 아델을 향해 말했다.

“무거우니까 어서 들어가요!”

싱긋 웃은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그런 그를 뒤로하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갔다.

“황후 폐하!”

“넬슨 백작? 왜 나와 있어요?”

황제궁 앞에 서 있던 넬슨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초조해 보이던 얼굴이 날 발견하고는 환해졌다.

“곧 오실 것 같아 미리 나와 있었습니다. 이제 들어가 보시지요.”

“폐하께서는 아직 주무시는 거죠?”

“네. 폐하께서 제게 얼마나 닦달을… 헙!”

그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닦달? 무슨 닦달이요?”

“아니 그것이… 아! 아까 아프다 하시면서 얼마나 닦달을 해 대시던지. 의원이 치료를 해 주는데 제 소매를 붙잡고 아프다고, 아프다고 계속 그러시더라고요.”

“폐하께서요?”

“네, 네! 폐하께서 이런 걸 창피해하시니 말씀을 안 드리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하하.”

하드엘이 자신의 입으로 아프다고 말을 했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 앞에서는 매번 괜찮다는 말만 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상처가 심각한 걸까?’

백작이 저리 말할 정도이면 아까 보았던 것보다 더 깊게 상처가 난 걸지도 몰랐다.

더욱 속이 타 저절로 입이 바짝 말랐다.

“루안, 다른 시녀들과 함께 밖에서 기다려 줘요.”

아주 잠깐만, 조용히 다녀오면 되는 거야.

난 홀로 다짐 같은 말을 되뇌며 시녀들을 등지고 하드엘이 있을 침실로 들어섰다.

백작은 침실 앞까지 따라와 직접 커다란 문을 열어 주었다.

소리 없이 조용히 열린 문 너머에 눈을 감고 잠든 하드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구두굽 소리마저 줄이려 애쓰며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는 사이 백작은 문을 닫고 물러났다.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황후 폐하,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백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조금 이상한 말이었지만 하드엘이 깨기 전에 상태만 보고 서둘러 나가야 했기에 백작을 다시 불러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조용히 걸어가 침대 옆에 마련되어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집무실에서 잠들었다가 이곳에서 깨어났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그러니 황제궁 침실은 내게도 조금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원목 탁자를 흘끗 보니 그때 보았던 종이 뭉치들은 죄다 치워져 있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나는 하드엘을 내려다봤다.

눈을 감은 모습을 보는 것도, 이렇게 낮은 시선으로 그를 내려 보는 것도 모두 처음인 것 같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가를 통해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헝클어진 백금발 머리칼은 은은하게 빛났고, 평온히 감긴 눈은 그에게서 풍겨 오는 나른한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플로리아의 눈으로 보아 이 사람이 더욱 아름다운 걸까.

그의 얼굴에서 팔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옮기자 상의 소매가 걷혀 있는 게 보였다. 상처가 난 부근이 붕대로 덮여 있었다.

“많이 아팠겠지…….”

아팠을 거야.

그의 팔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 하드엘의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나 때문에 당신이 피를 흘릴 때 숨이 막혔어요.”

나는 낮게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 실어 보낸 감정은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슬픔이었다. 나조차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짙은 슬픔.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애타게 구는지.

내가 무엇이기에…….

자신의 위를 내주겠다고 고백한 그의 모습이, 진심 어린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다정하던 모습도, 날 걱정해 주던 모습도 전부.

나는 눈을 찌르는 하드엘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내가 운명을 바꿀수록 당신은 잃는 것이 많아지는데.’

내 손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나는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저 잠시의 욕심이었고, 찰나의 바람이었다.

“당신을, 용서하고 싶어져…….”

떨리는 목소리로 가슴에 품어 왔던 말을 기어코 뱉고야 말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하드엘의 눈을 보고 말해 버릴 것 같았다.

귓가가 윙윙 울렸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돌아가야겠어.

나는 그의 뺨에서 손을 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내가 뒤를 돌았을 때였다.

“플로리아.”

잠들어 있어야 할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고 젖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그는 깨어 있어서는 안 됐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들어선 안 되니까.

하지만 이런 내 간절함이 무색해지게 하드엘이 뒤에서 나를 감싸 안았다.

그의 팔에 힘이 실렸다.

“미안하오. 내가 당신의 상처가 되어서.”

가까이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렇게 애절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잠들어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고 나서야 아까 넬슨의 중얼거림이 이해가 되었다.

설명해야 했다.

어떻게든.

“폐하, 아까 한 말은…….”

나는 하드엘의 팔을 풀고 뒤를 돌아 그를 마주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후에는 더 이상 하려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시리기만 하던 회색빛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붉어진 두 눈에 고인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나의 욕심 때문에 당신을 괴롭게 해서…….”

나는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그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난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

함부로 외면할 수 없을 만큼.

플로리아에 대한 죄책감을 짓누를 수 있을 만큼.

한없이 냉랭하기만 하던 사람이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보다가 나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붉어진 그의 눈시울 아래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것은 맞닿았던 살갗의 온도보다도 더 따뜻했다.

‘하드엘, 당신은 이렇게 우는구나.’

처음 이 세계에 오고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엄청난 목표를 세우며 가끔씩은 그런 상상을 했다.

하드엘이 내 앞에서 잘못을 비는 상상을.

통쾌할 줄 알았는데, 이제야 잘못을 깨달았냐며 한소리 해 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당신의 눈물이 닿은 손끝까지 아릿해질 정도로 가슴이 미어졌다.

에스타란토가 나타나고 모든 것이 무너졌을 당신의 혹독한 처지를 깨달아 버려서.

그리 힘겹게 지키던 것을 버리고 내 옆에 서겠다 말한 당신의 마음을 알아 버려서.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되는 바람에.

플로리아.

내가… 당신을 대신해 이 사람을 용서하면 안 될까요?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저 사람이 우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밀어 낼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것도, 나 때문에 아파하는 것도 못 보겠어, 이젠.

당신의 세계에서 당신의 운명을 바꿔 줄게요. 그러니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때까지만 플로리아 당신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 내게 해줘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와르르 깨부수어지는 느낌이었다.

두 발을 얽매고 있던 쇠사슬이 이제야 끊어졌다.

이제야.

이대로 그에게 걸어가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하드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내가 우는 걸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기도 울고 있는 주제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아직도 남아 있는 찝찝한 감정을 모조리 흘려보내고 싶다는 희망 같은 건 없었다.

모두 내가 지고 가야 할 내 감정이었고 남아 있는 죄책감, 그것 역시 내 몫이었다.

다만 그의 앞에선 웃고 싶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폐하.”

이젠 당신을 밀어 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림자를 걷고 나니 기분 좋은 울렁거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황후, 내가…….”

나는 뒤꿈치를 들어 유난히 핏기가 도는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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