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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66)화 (6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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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

레이샤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황후가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고 순순히 말했다니?

방금 들은 말의 뜻을 확인해야 했다. 일그러진 공작의 표정도 지금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오는 딸을 지켜만 보던 공작은 뒤에 있던 잔느를 향해 말했다.

“레이샤를 데려가거라.”

“예, 공작님. 아가씨, 어서…….”

“유모, 잠깐 비켜봐.”

레이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잔느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팽개쳤다. 바닥에 팔꿈치를 내리찍고 잔느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제발 말씀해 주세요.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니요?”

“레이샤.”

“아니죠? 제가 잘못 들은 것이지요? 그런 천한 몸에 고귀한 신성이라니. 우매한 것들이 떠들어 대는 소문일 뿐이잖아요.”

레이샤는 한 걸음씩 나아가다 공작의 앞에서 그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흰자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하나 분명 그것은 슬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차마 억누르지 못하는 증오와 혐오. 그것으로 가득 찬 제 딸의 눈을 마주하고 공작은 눈썹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제발요, 제발.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그 한마디만 해 주세요 아버지.”

나직한 한숨을 흘린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황후에게 신전 기사단이 있다. 장로가 나서서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는 증언까지 했어.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는 건 진실에 가깝다 보아야겠지.”

“진실에 가깝다고요? 하하, 가끔씩 이렇게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레이샤는 공작의 말을 부정하며 벌건 눈을 한 채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도 불안한 것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한심하게 제 감정하나 어쩌지 못해 이리 티를 내다니. 공작은 쯧 혀를 찼다.

“어떻게든 해결될 일이다. 이만 물러가거라.”

“해결이요?”

“그래. 아직 힘을 깨워 내기 전이니 뭐든 방법이 있을 거다.”

레이샤는 허망한 웃음을 흘리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싸 쥐며 그녀는 무릎 사이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야, 못 믿어. 못 믿어. 아니야. 가짜야. 황후가 미친 거지. 감히 에스타란토를 흉내 내?”

분홍빛 입술로 쏟아 내는 말들은 그녀 자신을 위한 주문처럼 들렸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혼자 쪼그려 앉아 중얼거리는 모습이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그림이었다.

공작은 혹시 몰라 창가를 한 번 내다보고 커튼을 내렸다.

제 딸의 미련한 태도에 화가 치민 공작은 이후 레이샤가 있는 곳으로 단숨에 걸어가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정신 똑바로 차려!”

레이샤는 움찔 몸을 떨며 눈을 꼭 감았다. 맞을 것을 각오한 듯 이미 얼굴은 긴장감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공작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레이샤는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이 공작의 눈자위를 지났다. 잘 벼른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눈을 뜨고 숨을 고르던 공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레이샤. 넌 황후가 되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황후의 자리에 올라야 해. 그런 네가 이리 굴면 우리 가문 전체가 욕보인다.”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니까요. 그때도 그러셨고…….”

“그때?”

공작의 눈빛에 잠시 주춤한 레이샤는 계속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폐하께서 황후에게 마음이 있다 하셨잖아요. 혹시… 잊으셨어요? 아버지께서 던진 농에 제가 얼마나 식겁했는데.”

“농이라니?”

“사실 저 이렇게 아버지를 찾아뵌 것도 폐하께서 가십지를 폐간한 것에 대해 아버지께서 이상한 오해를 하실까 봐, 그래서 온 것이었어요.”

레이샤는 손톱을 뜯적이며 눈을 내리떴다.

레이샤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공작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거짓을 말한다. 이제껏 정말 그렇게 믿고 있던 건가?

“이번에도 황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아시면서 괜히 절 자극하려고 황후가 에스타란토일 수도 있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렇죠?”

또다시 되묻는 질문의 내용은 전과 다름없었다.

“레이샤……?”

“네, 아버지.”

사실을 말해 주려던 입이 굳었다.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아까보다 그가 보기엔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자기가 그리 믿고 싶다는데 구태여 사실을 알려 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 만족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말이 필요했다.

그래. 저 아이가 믿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이 낫지. 나에게도. 그리고 레이샤에게도.

그리고 지금은 거짓일지 몰라도 어차피 훗날엔 모두 현실이 되어 있으리라. 그러니 아주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 황후는 제국민들을 현혹시키려 하고 있어. 레이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황후의 거짓에 속는 척하며 따라야 해. 때를 기다려야 하니까.”

원하는 답을 들은 레이샤의 표정이 이제야 밝아졌다.

“아버지! 그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표정과 달리 목소리에서는 심각함이 묻어났다.

“그렇지. 하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혹시 폐하께서도 황후의 거짓말에 속고 계시나요?”

“어? 어. 그래, 그렇겠지.”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얼핏 슬픔에 젖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불쌍하셔라. 그런 거짓말에 농락당해 어쩔 수 없이 곁을 내주고 계시다니.”

조곤조곤 차분히 읊조리는 레이샤를 보고 공작은 이제야 그녀가 정상으로 돌아왔단 생각에 안도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레이샤는 선한 눈매를 휘며 공작을 바라봤다. 시선을 맞추자 그녀는 더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아무래도 저 하루빨리 제 자리를 되찾아야겠어요. 황후의 자리와 황제 폐하. 이 두 가지만 제 것이면 돼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게 폐하와 저. 우리 가문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요.”

* * *

“폐하, 의원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래.”

황제궁으로 돌아가는 길. 넬슨 백작은 이상한 눈빛으로 하드엘을 응시했다.

그런데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누구라도 이상한 눈빛을 보냈을 것이다. 자신의 팔목에 난 상처를 보고 저리 환히 웃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프지 않으세요?”

“글쎄.”

짤막하게 답한 하드엘은 허공을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회의장에서의 싸늘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힐끗 상처를 바라보던 넬슨은 잠시 몸을 돌려 황후궁으로 향하는 길목을 쳐다봤다. 황후 폐하께서 폐하를 이렇게나 바꿔 놓으셨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새삼스러워할 일이 아니긴 했다. 황후 폐하께서 에스타란토인 것만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두 분은 원래 이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니.

에스트라의 화원에서 플로리아를 보고 한동안 멍해 있던 황태자의 모습이 넬슨의 기억에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 봄날을 떠올리고 지금의 황제를 보자 넬슨 백작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냉랭한 목소리로, 굳은 얼굴로, 괴로운 혼잣말로 황후를 경계하던 황제는 이제 없었다.

물론 백작 본인은 지금의 황제의 감정을 가장 뒤늦게 깨달은 사람 중 하나였지만.

‘예전에는 내가 꽤 빠르게 눈치를 챘었는데 말이지.’

“백작, 그대도 들었나?”

“네? 무엇을요?”

“황후가 날 걱정하고 있다 했지. 내가 걱정된다고.”

“아! 황후 폐하께서 차가운 얼굴을 하시고 그런 비슷한 말을 하시긴 했습니다. 정확히 말씀을 드리자면 걱정된다가 아니라 ‘어서 의원에게 가세요. 저도 싫습니다. 저 때문에 폐하께서 다치시는 거’라고 하셨죠.”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네?”

“됐다. 괜히 물어봤지 내가.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서는.”

하드엘은 자신을 불러 대는 백작의 목소리는 못 들은체하며 백작을 두고 저 앞으로 먼저 훌쩍 걸어갔다.

바람이 일자 지나는 길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의 가지가 흔들렸다. 다복이 피어난 무성한 연두색 잎도 뒤따라 느릿하게 너울거렸다.

하드엘은 입가에 미소의 여운을 남긴 채 계속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보통 칼에 베인 상처는 흉이 질까요?”

“그렇죠. 보통은 그럴 거예요.”

“그럼 폐하께서도… 아니에요.”

황궁에 있는 의원이 어련히 알아서 잘 치료해 줄 것이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이렇게 딱 잘라 생각을 정리하려 했으나 자꾸만 그의 상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도 내 탓인데 치료가 끝나면 가 보는 게 도리일까?

그러게 내 손가락만 조금 찌르면 될 걸 왜 자기 팔목을 베?

머릿속이 복잡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문득 거울을 보니 붉은 머리가 흐트러져 산발이 되어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한심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귀족들은 한동안 잠잠해질 것이다.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는 거래였다. 아니지. 오히려 이득이라 해야 하나.

귀족들은 더 이상 신전 기사단의 해체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요구한 서약까지 받아 간 마당에 가짜니 사칭이니 하며 이전처럼 소란을 피우지도 못할 테고.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하드엘이 아니라 원래대로 내가 서약만 했었더라면, 내 손을 베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좋지 않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깐 정말이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드엘의 팔목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붉은 액체를 보는데 숨이 턱 막혔다.

되새기기 싫을 만큼 너무나 끔찍했던 장면이 다시 생생히 떠오를 것 같아 난 고개를 휘저었다.

내게서 칼을 뺏어 들 때 빨리 말렸어야 했는데.

눈을 질끈 감자 미안하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사과는 왜 해 바보같이. 차라리 다치지나 말지. 내가 뭘 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지.

귀족들이 뭐라 해도 그는 내 편에 서서는 안 됐다.

그래. 차라리 그랬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그가 이리 나올수록 내가 행복해지는 선택이 하드엘을 용서하는 것이라 믿고 싶어지니까.

아델의 말대로 참 쉽지가 않았다. 마음이라는 건.

나는 두 손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루안, 넬슨 백작에게 따로 가서 폐하께서 잠드실 때 내게 말을 해 달라 해 줄래요? 직접 가 봐야겠어요.”

빗을 들고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내 주변만 계속 맴돌고 있던 루안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주무실 때요? 깨어 계실 때 가 보지 않으시고요?”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의 눈을 마주 보고 감정이 서린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그에게 말하고야 말 것이다.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플로리아를 대신해서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나는 창가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멋대로 들떠 있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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