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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65)화 (6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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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

“하, 하지만 폐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상관없습니다. 고작 피 한 방울인데요.”

내가 칼을 집어 들자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저 불안한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젠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발 그 칼을 내려놓으라고.

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귀족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원하는 것의 절반은 취했다 여길 귀족들이 속으로 얼마나 환호를 하고 있을까.

하드엘의 앞이라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궁 밖을 나가는 순간 기쁨에 겨운 소리라도 지르고픈 심정일지도 모른다.

신전 기사단을 그대로 두고 서약만 받아 가는 것이 얼마나 손해 보는 거래인 줄도 모르고.

뭐, 나머지 절반을 이루지 못해 마땅찮아 할 이들도 있겠지만.

“황후 폐하, 서명하시죠.”

“무례하게 황후 폐하께 뭣들 하는 것이오! 에스타란토께 이리 굴다니 앞으로 받을 벌이 두렵지 않소!”

장로가 엄중하게 그들을 다그쳤다.

벌이라는 말에 귀족들은 잠시 움찔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아 했다. 하긴 황제의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뜻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 벌이 무서울까.

“그래요. 서명하죠.”

나는 검지에 조그만 칼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 누군가 내 손에서 빠르게 그 칼을 빼앗았다.

옆을 돌아보니 하드엘이 제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폐하!”

내 부름에 아랑곳 않고 그는 귀족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대신 서명하지. 상관없지 않은가? 황제가 황후를 대신하겠다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잠재웠다.

노기가 가득 찬 그 목소리에 귀족들은 차마 안 된다 말도 못 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이 하드엘이 자신의 왼쪽 팔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안 돼. 말려야 돼.’

“폐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드엘은 들고 있는 칼로 자신의 살갗을 베었다.

새어 나온 피가 팔목의 곡선을 타고 흐르다 그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이제 되었나?”

서약서 위에서 붉은 핏물이 번져나갔다.

하드엘 그는 지나치게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귀족들을 훑고 있었다.

단도로 벤 상처가 아물자마자 나는 그에게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주고야 말았다.

나는 더 이상 그 장면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덕에 절망스러운 표정은 감출 수 있었지만 떨리는 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이런 내 손 위에 커다란 손 하나가 포개졌다.

이 온기의 주인은 다친 것은 자신인 주제에 내 손등을 쓸며 나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런 게 싫었다. 나 때문에 다치는 것도, 날 위해 나서는 것도, 이리 다정히 구는 것도 전부.

자꾸 생각나게 하니까. 그러면 내가 당신을 지우지 못하는데…….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하드엘의 손을 밀어 냈다.

“지혈을 하셔야 합니다.”

때마침 황제궁 소속의 시종 하나가 거즈를 가져왔다. 하드엘은 밀려 난 자신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 시종이 내미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대들도 서명을 해야지?”

지혈을 하던 황제를 멍하니 보고만 있던 귀족들이 그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황제의 피를 보게 된 이 상황에 당황스러워할 뿐이었다.

“누가 대표로 할 것인가?”

“…제, 제가 하겠습니다.”

모인 이들 중 작위가 가장 높은 이가 뒤늦게 나섰다. 찡그려진 미간과 축 처진 입을 보니 정말 마지못해 나선 티가 났다.

내 앞에 있던 서약서는 그대로 그 귀족의 앞으로 옮겨 갔다. 더불어 조그마한 칼과 펜도 함께 따라갔다.

당연하게 펜을 집어 드는 귀족을 보고 하드엘은 실소했다.

“잠깐. 왜 펜을 들지?”

“네?”

“설마 황제인 나는 피를 보게 하고, 너는 편히 펜으로 서명을 하겠다 이건가?”

“그것이 아니오라 화, 황후 폐하께서 약조를 해 주시는 서약서였기에 황후 폐하의 피가 필요했던 것이고 저는 그저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는 증표로 서명을 하는 것이라…….”

“아니지. 그대도 약조를 해야지. 여기에서 더 이상 어떠한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혹시 아는가? 나중에 가서 신전 기사단을 다시 해체하라 할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쩌지? 내가 믿지 못하겠는데.”

피로 번진 서약서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그걸 챙겨 나가야 하는 장로가 희끗한 눈썹을 찡그리며 만지기를 망설여할 정도였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 저는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간신히 서약서의 끄트머리를 잡은 장로는 “에스타란토께 축복을”이란 인사말을 보란 듯이 덧붙이며 내 앞에서 한 번 더 허리를 숙이고서야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을 벤 귀족은 제 손가락을 지혈하며 곧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을 뒤로한 채 나와 하드엘도 몸을 일으켰다.

귀족들은 인사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내가 그들을 말렸다.

“인사할 필요 없어요. 그대들의 인사는 받기 싫으니까.”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태연히 웃으며 회의장을 나갈 줄 알았는데 탁자 위에 한가득 쌓여 가는 하드엘의 피 묻은 거즈를 보니 귀족들을 상대로 여유로운 척 표정을 꾸며 낼 수가 없었다.

하드엘보다도 내가 먼저 빠른 걸음으로 회의장을 빠져나왔고 그렇게 난 곧장 황후궁으로 향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걸 넘어서 기분이 참 거지 같아.

“황후!”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금세 나를 따라잡은 하드엘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놓아 주세요.”

나는 그를 마주 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 오히려 날 지켜 주려다 다쳤는데도 난 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은 분노라기엔 너무나 슬픈 감정이었다.

“황후.”

“왜 그러셨어요? 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가 다치니까.”

“차라리 제가 다치는 게 낫습니다.”

“난 그 반대야. 내가 다치는 게 백번 나아. 그대가 다치면 못 견뎌, 나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난 침묵했고 그는 내 입에서 나올 말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내 손목을 잡지 않은 그의 반대편 팔목에는 여전히 피가 고여 있었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니 오히려 지금은 벌어진 상처가 더 잘 보였다.

“…어서 가세요. 가서 빨리 치료를 받으세요.”

“미안하오.”

“폐하께서 왜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사과할 사람은 당신이 아닌데. 이런 표정을 지어야 할 사람도 당신이 아니었다.

“내가 황후 그대에게 올라갈 해명 요구서를 빼돌렸어. 하지만 나도 걱정이 되어…….”

“폐하께서는 제가 지금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 생각하시나요?”

잇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그의 눈이 아닌 다친 팔목을 보며 말했다.

“어서 의원에게 가세요. 저도 싫습니다. 저 때문에 폐하께서 다치시는 거.”

* * *

“이상해.”

“공녀님…….”

“유모, 이상해. 황제 폐하께서 가십지를 폐간하셨대. 우연이겠지? 황후 때문은 아닐 거야.”

레이샤는 마른 입술을 손톱으로 뜯적이며 초조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잖아. 폐하께서 사랑해야 하는 건 황후가 아니라 나인데. 황후 때문에 그리 애쓸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앞에 서 있던 유모 잔느로부터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말갛기만 한 연갈색 눈이 잔느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모? 왜 답이 없어?”

“마, 맞습니다.”

잔느는 대부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지만 조금은 두려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듯 레이샤가 배꽃처럼 환히 웃었다.

“그렇지? 유모도 그렇게 생각하지? 괜한 걱정을 했어.”

순식간에 긴장감이 사라진 방 안에서 아름다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레이샤는 유모에게 빗을 건넸다. 잔느는 그것을 받아 들어 레이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들어 올리며 조심스레 빗질을 시작했다.

“아! 잠깐만, 유모.”

자줏빛 보석이 박힌 핀을 머리 이곳저곳에 대보던 레이샤가 돌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잔느는 일제히 모든 행동을 멈추었고 레이샤는 몸을 틀어 반짝이는 눈으로 유모를 올려다봤다.

“혹시나 아버지께서 또 오해하시려나?”

“네? 무슨 오해요?”

“유모, 왜 이렇게 답답해? 황제 폐하께서 황후의 기사가 나간 가십지를 폐간시킨 걸 아버지가 알면 또 폐하께서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는 둥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실 거 아니야. 휴, 왜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어.”

“설마요. 아닐 거예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잇는 잔느를 향해 레이샤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소리 없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레이샤를 보며 잔느는 괜히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녀가 다가가자 레이샤도 몸을 숙였다. 그리고 여자의 귓가를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아버지께서 노망이라도 드신 걸까?”

“아가씨!”

그녀가 들어선 안 될 말이라도 들은 듯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만 자세를 바로 한 레이샤는 거울 너머로 그런 유모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유모, 장난이야. 빨리 마저 머리나 빗겨 줘. 아버지께 가야 해. 오해하지 않으시게 황제 폐하를 대신해 내가 해명을 해 드려야지.”

* * *

“뭐? 신전 기사단은 그대로 두고 서약만 받았다?”

“네.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러합니다.”

“금 한 덩이 값을 그따위로 해? 신전 기사단을 없앴어야지! 그게 핵심인데! 황후가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고 순순히 말한 이유가 뭐겠어. 신전 기사단만으로 지지 세력을 얻기에 충분하니까! 기사단이 곧 에스타란토의 상징이니까!”

“공작님 진정을…….”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귀족들 하는 꼬락서니가 어설프다 싶더니 기어코 그들이 내 일을 그르치는구나.”

“그래도 서약을 받아 냈으니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는 절대 황제 폐하의 위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멍해 있던 레이샤가 문을 벌컥 열었다.

공작과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던 집사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만 가 보게.”

공작의 명에 집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황급히 레이샤를 지나쳐갔다.

그와 달리 레이샤는 천천히 공작을 향해 다가왔다.

“아버지.”

“…….”

“방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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