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귀족들은 저들끼리 서로 눈을 맞추다가 뒤늦게 장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증명해 주신다는 건가요?”
“황후 폐하께서는 붉은 별을 타고나셨습니다. 저는 에스타란토의 상징인 붉은 별의 기운을 황후 폐하의 탄생과 함께 느꼈습니다. 그렇게 18년 후 에스타란토의 존재를 선대 황제께 알렸으니 선대 황제께서도 이를 아시고 지금의 황후 폐하를 당시 황태자비 자리에 올리신 것이지요.”
앞뒤가 맞았다.
황태자비 내정자였던 레이샤 공녀가 그 자리에서 파해진 이유도, 몰락 귀족이 황태자비 자리를 차지한 이유도 장로의 말대로라면 전부 설명이 되는 것이었다.
“마, 말뿐인 것을 저희가 어찌 믿습니까!”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가짜라는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다. 몰락 귀족에게 그런 고귀한 신성이 들었을 리가 없다. 이 자리에 앉은 귀족들 대부분이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에스타란토를 사칭하는 황후로부터 정의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굳건한 믿음에 금이 갈까 봐 그들은 장로의 증언을 부정했다.
“장로님께서도 스스로를 속이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황후 폐하와 한 편이신가요? 눈앞에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세요.”
장로의 바로 옆에 있던 하드엘이 귀족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들은 ‘설마 아무리 황제라도 이 많은 귀족들을 어찌하진 못하겠지’ 생각하며 애써 그 눈을 회피하였다.
“확실한 증거?”
하지만 곧이어 그런 귀족들의 귓가에 서슬 퍼런 황제의 음성이 꽂혔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건 그대들이 아닌가? 믿을 수가 없는 건가,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건가?”
* * *
“궁 안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오늘따라 유독 그랬다. 딱히 달라진 건 없음에도 분위기가 붕 뜬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심란함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야기되었는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하고 나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앞에 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황후 폐하!”
그때였다. 문밖에서 루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의아함에 방금 들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서둘러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알링에게 모이를 주고 오겠다며 신이 나서 나간 게 방금 전인데, 그녀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리가 없었다.
달려오다시피 걸어온 루안은 내 앞에 서서 한참이나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폐하께서…….”
루안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몇 번 심호흡을 하고 곧장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지금 회의장에서 귀족들을 만나고 계신다 합니다.”
“귀족들을?”
무역에 관한 일 때문인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루안이 이렇게 급하게 달려올 이유가 없었다.
“백작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듣기로는 지금 궁에 불려 온 그 귀족들 모두가 얼마 전 황후 폐하께 해명 요구서를 보낸 분들이라 합니다.”
“해명 요구서?”
“네. 아셔야 할 것 같아 급히 달려왔어요. 또 최근 귀족들 사이에서 신전 기사단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해요. 그리고…….”
루안이 말을 머뭇거렸다. 내게 좋지 않은 소식인지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넬슨 백작이 말한 큰일이 지금 루안이 하려는 말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루안, 어서 말해 봐요. 난 괜찮으니까.”
“…폐하께서 에스타란토를 사칭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함께 떠돌고 있다 합니다.”
“그래서 귀족들이 그 해명 요구서라는 걸 내게 보냈다는 거군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근데 해명 요구서가 내게 오지 않았는데요?”
“아무래도 폐하께서 그것을 황후 폐하께 보내지 못하게 하신 것 같아요.”
마지막은 루안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말에 확신이 섰다. 그는 내 귀에 들어가지 않게 이번 일을 알아서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그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드엘, 정말…….
나는 책상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루안, 그 회의장이 어디인지 알아봐 주세요.”
“직접 가 보시려고요?”
“내 일이니 내가 직접 나서야지요.”
나는 그 길로 곧장 루안이 알아온 장소로 향했다.
“문을 여세요.”
회의장의 문을 지키고 선 기사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문을 열지도 열지 않을 수도 없어 그는 내 눈치를 살펴 가며 쭈뼛거렸다.
계속해 기다려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열지 않을 건가요? 그럼 내가 열죠.”
나는 앞으로 걸어가 굳게 닫힌 문을 직접 밀었다.
서서히 문틈이 벌어지고 고개를 들자 노기를 띤 얼굴로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는 하드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차례로 장로와 귀족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황후?”
처음엔 모두가 갑자기 문을 밀고 들어온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차차 극명하게 그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누가 황후를 회의장에 들인 것이냐.”
하드엘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서린 눈으로 문밖에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 옆의 장로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분명한 건 귀족들은 나의 등장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하드엘과의 대화가 잘 안 풀렸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이렇게 직접 오셨으니 당사자인 황후 폐하께서 해명을…….”
그들은 수시로 하드엘을 흘긋 쳐다보고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끝을 맺지 못한 대부분의 말들은 그들의 입술 위에서 뭉그러졌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아무리 조심스럽다 한들 만만한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뻔한 속내는 감출 수 없었다.
“해명이라 했나요?”
나는 그들과 시선을 맞추며 하드엘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어쩌죠? 난 해명을 할 생각이 없는데.”
불쾌함을 숨기지 못한 몇 귀족들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백 번을 해명해도 거짓이라 말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왜 그런 수고스러운 짓을 해야 합니까? 입만 아프게.”
장로까지 있는 걸로 봐서 그가 플로리아가 에스타란토라는 증언까지 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저리 군다?
그건 그냥 저들 믿고 싶은 대로 믿겠다는 거지.
황당한 표정의 귀족들 틈에서 하드엘의 눈치를 살피던 한 남자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작게 목을 가다듬고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 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인정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쾅!
“도저히 못 봐주겠군. 당장 저자를 끌고 가.”
격노한 하드엘의 목소리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달려와 그가 가리킨 귀족을 에워쌌다.
우람한 기사들에게 파묻히게 된 남자는 비리비리한 몸을 떨었다.
“폐하, 제 일입니다. 제가 이들과 대화하겠습니다.”
“그대를 욕보였소.”
“그러나 지금 저자가 옥에 갇힌다면 제가 에스타란토를 사칭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해명 요구서를 보냈는데 다음날 궁에 불려가 옥에 갇힌다면 어느 쪽 소문이 우세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침착하고 태연해야 했다. 그들에게 휘말리지 않으려면.
내 말을 들은 하드엘이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던 기사들을 물리쳤다.
“자, 이제 내게 하고픈 말을 해 보세요.”
안도의 숨을 내쉬던 그 남자 귀족은 나의 재촉에 떨림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말을 더듬거리며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야 했다.
“그, 그러니까 아까는 장로께서 하신 증언만으로는 황후 폐하께서 에스타란토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조금 힘들 것 같다는… 그, 그런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 저희가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공식적 해명이 필요하다 사료되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모,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그렇지요?”
그가 동의를 구하자 몇몇은 어정쩡하게 또 다른 몇몇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마세요. 내가 그대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는 황후 폐하께서 에스타란토를 사칭하셨다는 소문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저희는 염려가 되어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죠?”
“당장은 신전 기사단을 해체시켜 주시는 것이 소문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되옵니다. 힘이 발현되시기 전까지 에스타란토의 자리에 오르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함께 써 주신다면 폐하께 독이 되는 소문은 더욱 빠르게 사라질 것입니다.”
바들거리면서도 원하는 것은 제법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이 동의한 내용인가 보네.
“서약?”
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신전 기사단의 해체는 그렇다 쳐도 고작 서약 하나 받아 내자고 그리 굴었던 거라니.
훗날을 위해서라도 귀족들의 뒤틀린 심사는 잠재워야만 했고 그러려면 뭐 하나는 버려야 한다 생각하긴 했다. 가짜라고 계속 떠들고 다니면 나도 곤란하니까.
그런데 서약? 나야말로 고맙지.
원래대로라면 에스타란토는 힘을 깨워 낼 때 자신의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에스타란토의 정체가 비밀에 부쳐졌으니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드엘이 신전 기사단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나도 내 정체를 소문으로 퍼뜨렸었다.
심지어 오늘 장로가 귀족들의 앞에서 내가 에스타란토라 증언까지 했다.
그러나 달라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바람대로 난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에스타란토의 자리를 꿰찰 생각이 없었다.
그들과 나의 생각이 같았다.
물론 그 이유는 달랐지만.
에스타란토의 자리에서 신전의 업무를 보는 것보다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지금의 내겐 더 중요하다. 그래서 당장은 마력을 다스리는 훈련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들이 내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을 서약으로 써 달라 요구하고 나섰다.
이걸 참, 행운이라 해야 하나?
나는 최대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뜸을 들이며 마지못해 대답하는 척 굴었다.
“좋습니다. 대신 신전 기사단의 해체는 불가합니다.”
결국 이들이 얻는 것은 없을 것이다. 단 하나도.
“내가 이 정도로 그대들의 청을 들어주겠다는데 다른 것까지 해 달라 떼를 쓰면 너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신전 기사단까지 해체하라 한다면 내가 뭣 하러 그대들의 뜻을 들어주나요? 차라리 사칭이란 소문이 떠돌더라도 폐하의 말씀대로 죄다 옥에 보내는 게 낫지.”
“!”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귀족들의 표정을 웃는 낯으로 지켜보았다. 당혹감, 멸시, 두려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감정이 참 다양했다.
몰락 귀족이 에스타란토라는 게 그렇게나 믿기가 싫을까? 신전 장로의 증언에도 귀를 막고 스스로 제 눈을 가리고.
‘계급에 대한 우월감이 저렇게도 사람을 썩게 만드는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 정했어요? 감옥으로 갈지, 서약서를 받아 낼지?”
“저희는…….”
가장 앞장서서 말을 꺼낸 귀족이 주변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의견을 내달라는 눈빛이었지만 그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는 못 기다리는데. 그러면 그냥…….”
“서약서! 서약서를 받겠습니다.”
잠시 뒤, 그 외침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원하는 내용을 문서로 적었다.
서약서와 함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칼과 펜이 내 앞에 먼저 내밀어졌다.
내가 자연스레 펜을 드니 가까이에 있던 귀족 하나가 머뭇거리다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는 하드엘을 힐끗 바라보고 이런 내 행동을 말렸다.
“황후 폐하, 이건 보통의 서약이 아닙니다. 펜으로 서명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서명을 하죠?”
“중요하고도 진실한 서약임을 맹세하는 데는 잉크가 아닌 핏물이 필요하지요. 그러니…….”
“지금 황후에게 피로 서명을 하라 이 말인가?”
귀족의 말을 자르고 나선 것은 하드엘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귀족을 내려 보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섬뜩한 이채를 띠고 있었다.
“감히 누구의 손을 베려 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