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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63)화 (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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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

“무슨 일이지?”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하드엘은 백작을 급히 추궁했다.

황후의 눈치를 보고 말을 머뭇거린 걸로 봐서 분명 그 ‘큰일’이 황후에 관한 일임이 확실했다.

게다가 별로 좋지 않은 일.

언뜻 차분해 보이는 회색빛 눈이 예리한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수도 내의 귀족들 사이에서 최근 소문 하나가 돌았다 합니다.”

“소문?”

“황후 폐하께서 신전 마법사를 기사로 두고 계시다는 소문이요.”

“그게 뭐가 큰일이라는 거지?”

신전 기사단이 곧 공식화되면 어차피 모두가 다 알게 될 것이었다. 오히려 기뻐 날뛰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토록 기다리던 에스타란토가 황후라는데.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소문이 더해져 돌고 있습니다.”

백작이 목소리를 죽였다.

“황후 폐하께서 가짜라는…….”

그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하드엘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소리에 놀란 백작이 순간 어깨를 움찔거렸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잘도 떠들고 다니는군. 누구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이지?”

“저도 그것을 알아보려 했으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들었다 이야기를 하니 출처가 모호합니다.”

하필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이 얼마 안 남은 지금…….

에스타란토는 아벨리움의 축복이었다. 그런 축복을 사칭했다는 오명은 재앙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귀족들은 황후가 진짜 에스타란토의 신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에스타란토를 사칭한 것이라며 물고 늘어지겠지.

‘이대로 가다간 소문에 잡아먹힌다.’

황후가 힘을 발현시키기 전까지 이 소문에 대응할 또 다른 소문이 필요했다.

궁 안에 있다. 궁 안에 있다. 들끓는 불의 힘은 궁 안에 있다. 일렁이는 불씨가 타오를 때 우리 제국 축복을 맞이하리.

하드엘의 머릿속에 한 구절의 노랫말이 스쳐 지나갔다.

일전에 봄의 무도회 준비를 위해 황후와 궁 밖을 나섰을 때 들었던 바로 그 노랫말이었다.

“넬슨.”

“예, 폐하.”

“제국민들 사이에 떠도는 노래가 하나 있을 거다.”

“노래요?”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는 것을 암시하는 노래.”

“아! 그 아이들 사이에서 불리는 노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 노래를 더 퍼뜨려. 모든 제국민들의 귀에 들어가도록 최대한 멀리. 장로가 붉은 별을 보았다는 사실도 노랫말에 덧붙이고. 차라리 황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도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전 기사단의 창단식을 앞당겨야겠다.”

악의적인 소문을 믿는 이들은 사실을 눈앞에서 보아도 부정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신전 기사단의 창단을 보고만 있을까. 황후가 에스타란토인 것은 거짓이라며 창단도 전에 신전 기사단의 해체를 요구할 게 뻔하다.

이제 황후에겐 더더욱 자신의 편이 필요해졌다.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킬 힘이.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장로님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폐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넬슨 백작은 자신의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오늘 황후 폐하께 올라갈 귀족들의 해명 요구서입니다.”

하드엘은 미간을 좁히고서 문서를 받아 들었다. 회색 눈이 종이 위에서 바삐 움직일수록 그 눈빛은 더없이 싸늘해져 갔다.

이런 황제의 눈빛에 익숙해졌다 생각한 백작도 오늘만큼은 그 섬뜩함에 몸이 굳을 정도였다.

“웃기는군.”

그는 피식 실소를 흘리더니 책상 위로 문서를 던졌다. 해명 요구서라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노골적이고 무례했다.

“이런 것을 황후에게 보내? 누구 마음대로.”

황후가 이걸 읽고 지을 표정을 떠올리자 절로 분노가 치밀었다. 하드엘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어찌할까요?”

“이들에게 전부 명해라. 내일 당장 궁으로 오라고.”

“내일 당장이요?”

“단, 황후가 알아서는 안 돼.”

상처가 될 게 뻔하니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덮칠 어둠은 앞으로 오로지 자신의 몫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플로리아 당신이 안전할 테니.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것이다. 그 아무리 더럽고 추한 일이라도.

그리고 그것이 나를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 * *

“이만 물러가게.”

칸제로스 공작에게 말을 전한 집사가 물러났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짤깍대는 시계 초침의 소음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공작은 그 초침 소리에 맞춰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치다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집사가 전하고 간 말을 곱씹었다.

“황후에게 해명서를 보낸 귀족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라……. 골치 아프게 됐어. 황제가 황후를 이토록 감싸고돈다면.”

신전 기사단을 황후의 주변에서 없애야 했다.

그것이 황후에게 신전 기사단이 있다는 소문과 그 여자가 가짜 에스타란토란 소문을 동시에 퍼뜨린 이유였다.

귀족들에게 말을 흘려 놓으면 귀족들뿐 아니라 제국민들에게까지 이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다. 그때 가서 일이 커지고 편이 갈리면 자신이 나서 유일한 해결책인 양 신전 기사단을 해체시킬 생각이었다.

황후에게 당장은 에스타란토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는 서약 또한 받아 놓으려 했다.

황실과 제국민 사이에서 모두를 위한 중재자가 되는 것. 그러면서 원하는 목적을 취하는 것. 그가 원하던 그림은 그것이었다.

귀족들이 이리 멍청하게 해명서를 냅다 보낼 줄은 몰랐지만.

‘덜떨어진 것들.’

순간의 화를 이기지 못한 공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해명 요구서를 보낸 귀족들만 궁에 불러들였으니 자신이 내일 그 자리에 참석할 방법은 없었다.

참석한다 해도 소문이 들끓기 전이니 신전 기사단을 해체시키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고심했다.

그런데 잠깐?

‘내가 직접 할 수 없다면…….’

돌연 공작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더니 씨익 웃었다.

“차라리 잘된 건가?”

그는 왼손에 펜을 잡아 들고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아래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 쓰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쓰는 글씨임에도 글씨체만 다를 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신전 기사단을 해체시키고 힘이 발현되기 전까지 에스타란토의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피의 서약을 받아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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