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그 의미를 알고 있었구나.’
괴한으로부터 하드엘을 구하고 쓰러졌던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백작 부인이 이 단도를 주며 그런 말을 했다.
폐하께서 어떤 위험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앞으로는 이것을 지니고 있으라 했다고.
난 그의 손에 들린 단도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아벨리움에서 단도를 선물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일.
당시 난 그 오랜 풍습과도 같은 의미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이 단도를 받아 들었었다.
하드엘이 나의 안전을 기도하며 단도를 준다? 당시엔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나 또한 특별한 의미로 지니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제의 명이라니 따랐을 뿐. 어찌 되었든 내게 나쁠 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폐하의 안전은 기원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제게 주신 이 단도가 폐하를 베었으니 말이에요.”
나는 그의 다친 손등을 빤히 보며 단도를 받아 들었다. 내가 오래도록 눈을 들지 않자 하드엘은 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을 보게 했다.
“고작 이런 상처에 죄책감이 깃든 얼굴이라.”
“고작이라니요.”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소. 그대의 평안이 곧 나의 평안이니.”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자주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얼어붙은 듯 서 있던 내가 움직인 건 그의 상처를 다시 보고 난 후였다.
나는 시녀들에게 부탁해 연고를 받았다.
황제궁에 없다던 황제가 집무실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그녀들은 명만 따르고는 별말 없이 물러났다.
뒤따라 함께 온 황제궁 시종이 불을 켜 주변을 밝히고서야 세상이 환해졌다.
덩달아 하드엘의 상처도 아주 잘 보였다.
“황후, 이럴 필요까지는…….”
“의원을 부르는 것도 싫다 하시니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그의 손등을 잡고 무작정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라고는 하나 내가 만든 것이니 그냥 둘 수 없었다.
“이리 해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처음에 나를 만류하며 손을 빼던 하드엘이 어느 순간부터는 순순히 내 뜻을 따랐다.
그는 내게 잡히지 않은 왼손으로는 턱을 괴었다. 내가 몸을 틀거나 자세를 달리할 때마다 그의 눈이 나를 좇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난 다 바른 연고를 내려놓고 물었다.
“궁금해서.”
입가에 웃음이 띄워진 것과는 달리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떤 것이요?”
“집무실은 왜 찾아온 것이오?”
“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들고 온 문서를 어디에 뒀더라?
바닥에 떨어진 문서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주워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하드엘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을 빠뜨렸습니다.”
“문서?”
하드엘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꽤 실망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서랠 왕국의 무역에 관해 추가적으로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아까부터 나란히 앉아 있던 하드엘이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까 왕자가 황후궁을 찾아왔는데…….”
“왕자가 황후궁을? 설마 또 그대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다든지 그런 이상한 얘길 한 건 아니겠지?”
그가 굳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아직도 그 얘길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것이 아니라 왕자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벨리움에 도움이 될 정보들이 있어 전해 드리고자 직접 찾아왔습니다. 서랠 왕국에 금 조개가 많이 난다 하니 그걸 사들여 장식품으로 만들도록 장려하여 우리 아벨리움에서 수출을 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금 조개? 사절에게는 듣지 못한 얘기인데.”
“금 조개는 그들에게는 흔한 것이니까요. 무역품으로는 생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 물론 아벨리움의 현 실정에 맞게 지금 제가 낸 의견을 수정하는 것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서랠 왕국 내의 정책이…….”
멀리 길을 비추는 불빛이 하나둘 꺼져갔다. 바깥이 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집무실을 밝히고 있는 불빛은 더욱 밝아졌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드엘과 무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늦은 밤이 되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피곤이 몰려왔다. 멀쩡하게 말을 하면서도 순간 꾸벅 졸다가 놀라 눈을 번쩍 뜨기 일쑤였다.
아직 그에게 전해 줄 말이 많은데.
그런데 이렇게 피곤해하는 건 나뿐이었다. 하드엘의 눈은 피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미뤄 두고 잠을 쫓으려 손으로 뺨을 두드리려 했다.
“왜 손이 뺨으로 가는 것이오?”
그러나 이 행동은 하드엘이 내 팔을 덥석 잡는 바람에 저지되었다.
조심스레 팔을 놓아 준 그가 졸음이 가득한 내 눈을 살피다 피식 웃음 지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잠을 깨려거든 차를 들이라 이르겠소.”
* * *
“폐하, 차를…….”
“쉿.”
하드엘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온 시녀를 향해 이만 나가라 손짓했다.
시녀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황후를 보더니 문 근처,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차를 든 쟁반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하드엘은 고른 숨을 내쉬는 플로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깊게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은 새벽달 아래 에스트라의 꽃처럼 말갛기만 하였다.
긴 속눈썹도, 엷붉은 입술도, 오뚝한 코도 이미 눈에 담고 있었지만 계속 또 보고 싶었다.
그는 손을 뻗어 조심스레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플로리아의 입가엔 웃음이 번졌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
그때, 그 봄날과 똑같은 웃음.
“내가 당신을 지킬 것이오. 매일 같이 이리 웃을 수 있게.”
하드엘의 속삭임에 대답하듯 그녀가 작게 웅얼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착각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겉옷을 벗어 플로리아의 어깨 위에 덮어 주려 다가갔다. 뜻하지 않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열기 섞인 숨을 삼켜야 했다.
“폐하.”
그때 플로리아의 잠꼬대가 또렷하게 들렸다. 말없이 지켜보자 그녀는 다시 한번 하드엘을 불렀다.
“폐하.”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리운 사람을 부르듯 애타게. 한참 동안 그 조그만 입술을 움직여 그녀는 그를 찾았다.
영원히 듣고 싶은 목소리로. 그렇게.
“플로리아…….”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날 때 황제는 그 앞에서 진실로 무릎을 꿇는다고 하였던가.
아벨리움의 고서에 새겨진 구절을 그토록 증오했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니,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황제인 내가 당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난 몇 번이고…….
* * *
하드엘은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스르르 눈을 떴다.
약 기운에 취하지 않은 채 아침을 맞은 건 오랜만이었다. 목이 좀 뻐근한 것만 빼면 전체적으로 몸이 개운했다.
지나치게 밝은 빛에 차차 익숙해질 무렵 나른히 뜬 두 눈에 플로리아가 담겼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하드엘은 책상 위에 엎드려 조용히 플로리아의 숨소리를 들었다.
고른 호흡마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그동안 나는…….
“황후, 매번, 매 순간… 난 후회하오.”
그대의 슬픈 얼굴을 모른 척한 그때를. 마음을 접으리라 다짐한 순간을.
난 미치도록 후회해.
낮게 잠긴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았다.
“으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드엘에게 내리쬐던 빛이 어느새 플로리아에게로 옮겨 갔다. 강한 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는 플로리아를 보며 하드엘은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은 햇빛을 가려 주기에 충분했고 플로리아의 얼굴은 금세 풀어졌다.
미간을 펴고 다시 곤히 잠든 황후를 보던 하드엘은 조용히 웃음을 띠었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 죄책감이 묘하게 뒤번져 있는 미소였다.
* * *
나는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볐다.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따사로운 빛을 듬뿍 받으며 몸을 일으키니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눈부셔.”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깨어날 때면 시녀들이 항상 옆에서 말을 걸어 주었으니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여기가 어디야?”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그제야 눈을 번쩍 떴다.
휑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방 안. 장식품이라고는 꽃도 안 꽂혀 있는 유리 화병이 전부였다.
“황후궁이 아니잖아!”
입고 있는 옷이 묵직했다. 평소 잠을 잘 때 입는 가벼운 소재의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 어제 황제궁을 찾을 때 입은 드레스 그대로였다.
“어쩐지 불편하더라니. 아니,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내가 왜 여기에서 잠들었지?”
분명 어제 하드엘과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누다가……?
“깨어나셨어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안이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루안, 여기가 어디예요?”
내 질문에 루안은 방실방실 웃더니 침실 안으로 슬쩍 발을 디뎠다.
“황제궁 침실입니다.”
“황제궁?! 내가 왜 여기 있죠?”
그것도 하드엘의 침대 위에?
“어제 집무실에서 잠이 드셨어요. 폐하께서 어젯밤 종일 황후 폐하의 곁에 머무르시며 깨어나시길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니까! 난 집무실에서 잠든 건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런데 잠깐.
“종일 곁에 머물렀다고요?”
루안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신이 나 말을 이었다.
“네, 종일! 그런데 깊게 잠드셨는지 깨어나지 않으시기에 황제 폐하께서 오늘 아침 이쪽으로 모시라 하신 거예요! 황후궁에 가려면 황후 폐하의 잠을 깨워야 하니 우선 이곳에서 재우라 하시면서요.”
“그럼 폐하께서는요?”
“회의 일정이 있으셔서 방금 전 황제궁을 나가셨습니다.”
지금 하드엘이 황제궁에 없다. 그것만큼은 정말 다행이었다.
심각한 나와는 정반대로 루안은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고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행동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도.
“황후 폐하, 틀림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황후 폐하를 사랑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이대로 하드엘과 황제궁에서 마주친다면 얼마나 민망할까. 집무실도 모자라 황제의 침실에서 잠을 자다니.
당장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했다.
“루안, 우리 얼른 황후궁으로 가요.”
“네?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보고를 올리라 하셨는데.”
“황후궁에 돌아가서 말하면 되죠.”
나는 루안의 손을 덥석 잡고서 걸음을 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나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무릎을 부여잡았다.
“으으.”
침대 바로 옆에 탁자가 있을 줄이야.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조금 아프긴 하지만 멀쩡해요. 아마도.”
루안은 내 답을 듣고 안도하며 원목 협탁 위에서 우수수 떨어진 종이 뭉치들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나도 그녀를 따라 몸을 낮췄다.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내가 떨어뜨린 건데.”
근데 쓰레기가 왜 이렇게 많아?
집무실은 책이며 문서 한 장까지 바르게 정리되어 있더니.
“어?”
나는 제대로 뭉쳐지지 않은 종이 뭉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안에 조그맣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황후에게.
종이를 완전히 펼치니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이를 확인하고 나는 다른 종이 뭉치도 펼쳤다. 전부 내게 쓴 편지였다.
이게 다 뭐야.
나는 하드엘의 글씨체로 쓰인 편지들을 읽어 내려갔다.
미안하다고…….
모든 종잇장마다 마지막 줄엔 꼭 그리 적혀 있었다.
일상적인 말들로 이어진 편지도, 취미를 묻는 편지도 결국 마지막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오른쪽 하단에 쓰여 있는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먹고 싶은 게 있냐는, 그 한 문장의 간단한 쪽지를 내 손에 쥐여 준 바로 그날 쓴 편지였다.
전부.
부딪친 무릎이 아까보다 더 시큰거려 왔다.
“폐하?”
나는 루안의 부름에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요, 루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