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손에 들린 가십지가 무참히 구겨졌다.
“폐하…….”
“황후 폐하의 히스테리는 애꿎은 공녀에게로. 제목 한번 잘 뽑았네요.”
가십지 『델리스』. 가십지일뿐이지만 이곳에 실린 가십들은 단순히 루머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문사의 기자들이 이곳에 실린 가십을 보고 특종을 찾아다니기도 할 정도이니.
“말도 안 되는 기사입니다! 레이샤 공녀를 밀지 않은 것을 저희가 보았는데요. 폐하, 누가 이런 짓을 꾸몄는지 알아볼까요? 기자를 찾아내면 쉽게 진실을 밝힐 수 있을 텐데요.”
평소 쉽게 화를 내지 않는 백작 부인도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니요. 알아낸다 해도 가십지라 사실을 따지며 처벌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누구의 짓인지는 이미 알고 있어요.”
벨리타.
이런 짓을 벌일 이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부인, 벨리타 영애 말인데요, 여전히 수상한 움직임이 전혀 없다 하던가요?”
“네. 제가 듣기로는 없었습니다.”
도대체 누굴까. 벨리타를 앞에 세워 두고 이런 치기 어린 행동을 하는 자가. 글로 지시를 내린다 해도 한 번쯤은 만날 텐데.
“폐하! 괜찮으십니까?”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불쑥 나타난 아델은 내가 방금 읽은 가십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델의 갑작스러운 등장보다도 그가 걸친 조끼의 상태를 보고 더 놀랐다.
조끼 단추가 우습게 하나씩 밀려 채워져 있었다.
두 번째 구멍에 채워져 있어야 할 단추가 세 번째 구멍에, 세 번째 구멍에 채워져 있어야 할 단추는 네 번째 구멍에. 그런 식이었다.
“난 괜찮은데… 아델 경, 아무래도 그대가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내가 조끼를 바라보며 말을 하자 그의 시선도 절로 내려갔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아델의 얼굴이 급격히 빨개졌다.
그는 다급히 뒤를 돌아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단추를 바로 채웠다.
“죄송합니다. 의복을 갖춰 입던 중 급하게 달려오는 바람에.”
목까지 붉어졌으면서 태도는 더없이 정중했다.
“옷을 입다가 달려온 거예요? 이거 감동인데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이런 가십에 휘둘려서 뭐 하겠어요.”
“폐하, 제 앞에서는 안 괜찮으셔도 됩니다.”
“말은 고맙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조금 짜증이 나긴 하지만.”
소문은 바로잡아야 했다. 가만히 두었다간 소문을 사실로 여기는 이들이 늘어날 테니.
하찮은 장난질로 겨우 끌어올린 평판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어차피 레이샤가 내가 민 게 아니라고 말을 했고 당시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이를 들었으니 해결도 간단했다.
벨리타가 신문사가 아닌 가십지 기자를 찾은 것도 모두 이 때문일 것이다. 쉽게 사실이 밝혀질 걸 알고 있으니까.
사실 작은 흠집 내기 정도밖에 안 되는 일이었다. 벨리타를 조종하는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짓까지 꾸미는 걸 보면 많이 초조했던 모양이다.
“부인.”
“예, 폐하.”
“신문사에 해당 가십지에 실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말해 주세요. 그리고 그날 다과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명단을 넘기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참!”
“왜 그래요, 루안?”
“레이샤 공녀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아까 받아 놨는데 가십지 때문에 잊고 있었어요!”
나는 루안이 건네는 봉투를 받아 자리에서 곧바로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다과회에서의 일을 사과하는 장문의 글이 반듯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그분이 황후 폐하께 왜 편지를 보내셨지?”
시녀들은 내 주위를 배회하며 다 들리게 속닥였다. 물론 그들은 최대한 소리를 낮춘 것 같았지만.
“공녀가 이번 일이 자기 때문이라고 미안하다 하네요. 가십지를 읽은 모양이에요. 따로 답장을 보내 줘야겠어요.”
“자기 때문이라 미안하다니요? 설마 그 공녀라는 여자가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는 건가요?”
옆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아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이 일은 레이샤 공녀와 무관해… 음? 둘이 아는 사이 아닌가요?”
“네? 아는 사이요? 누구랑요?”
“칸제로스가의 레이샤 공녀요.”
아델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전 그 공녀의 얼굴도 알지 못합니다.”
“얼굴도 모른다고요? 공녀는 그대와 친구라 하던데요?”
“저는 그런 친구가 없습니다.”
“다과회가 열린 날 나와 마주친 거 기억하죠?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영애예요. 잘 기억해 봐요.”
“다른 곳을 보기 바빠 제가 당시엔 옆을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억해야만 생각나는 친분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이가 아닐까요?”
내가 물으면서도 뭔가가 이상했다. 레이샤는 아델을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아니면 그 공녀가 제 뒤에 있던 다른 신전 마법사와 착각을 한 건 아닐까요?”
“아, 그건 아니었어요.”
확실히 아델을 보고 한 말이 맞았다. 주변 사람들도 함께 들었으니 내가 혼자 잘못 들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공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 * *
하드엘은 넬슨이 건네준 가십지의 첫 장을 보고서는 멈칫했다. 황후에 관한 이야기가 가십지의 맨 앞에 가장 크게 실려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가십을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내돋쳤다.
기사의 제목부터가 작정하고 황후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걱정으로 또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로웠다.
“넬슨, 황후가 이 가십지를 절대 보지 못하게 해라.”
“황후궁 시녀들에게 듣기로는 황후 폐하께서 이미 그 가십지를 보셨다 합니다.”
“황후가 보았다고?”
“네…….”
“하.”
짧은 숨을 토해낸 하드엘은 잠시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내리떴다.
겁이 났다. 플로리아 당신이 혹여 상처를 받았을까 봐. 나 때문에 곪아 있는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질까 봐…….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회색 눈에 하드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당시 자리에 있던 귀족들의 입을 빌려 해명 기사를 내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다만, 해당 가십지가 유명하다 보니 믿는 이들이 꽤 있는 바람에 가십을 완전히 묻는 데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따위 가십을 믿는다? 시간이 걸린다면 별다른 수가 없어. 없애야지.”
하드엘은 그 자리에서 가십지를 찢었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종이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동안 소문 속에 황후를 방치한 건 자신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리 둘 수 없다.
자비 없이 냉혹한 음성이 선연히 울렸다.
“가십지 『델리스』를 폐간하라.”
“네? 폐간이요?”
입을 벌리고 가십지가 찢기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백작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런 유명 가십지를 폐간하라니.
가십을 실은 기자에게 적당히 벌을 줄 것이라고만 예상했지 아예 가십지를 폐간시켜 그 뿌리까지 뽑을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래. 지금 당장.”
당혹스러워하는 백작을 뒤로하고 하드엘은 처참하게 찢긴 가십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구두굽이 조각난 종잇조각을 지그시 밟고 지나갔다.
* * *
내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소문은 잠잠해졌다.
나에 관한 가십 전부가 사라지는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 귀족들의 해명이 신문에 실리기도 전이었다.
대신 세간에서는 ‘황제가 황후를 위해 가십지 『델리스』를 폐간시킨다’는 이야기가 새로운 화젯거리가 되어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떠도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하드엘이 직접 내게 와서 말해 준 사실.
-짹, 짹.
나는 손등 위에 앉아 있던 알링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창밖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알링의 지저귐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시선을 들자 저 멀리 꽃잎이 흩날리는 화창한 봄날의 풍경이 눈에 담겼다.
정말 많은 게 바뀌었다.
아벨리움의 길고 긴 봄. 이 향기로운 풍경은 여전한데 하드엘 그 남자에 관한 것만큼은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플로리아를 지키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이제 거리낌이 없었다.
플로리아를 죽음으로 몰아간 하드엘은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주인공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가 플로리아를, 아니, 나를 죽게 내버려 둔다 걸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마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면 내가 그를 미워해야 할 필요가…….
“정말 큰일났다, 나.”
생각을 더 잇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자 알링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백작 부인이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알린 건 그때였다.
“황후 폐하, 서랠 왕국의 왕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왕자가요?”
들이라는 명에 따라 문이 열리고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루이 왕자, 어쩐 일이에요?”
나는 갑자기 황후궁에 방문한 왕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놀러 왔어요! 이제 서랠 왕국으로 돌아갈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러갔네요.”
“네, 조금 있으면 전 아벨리움을 떠나야 합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느라 입꼬리가 축 처졌다. 그런 왕자의 모습은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혹시 갑자기 이렇게 찾아뵈어 실례가 된 것은 아닐까요?”
“실례라니요. 그럴 리가요.”
내 대답에 루이 왕자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순수하고 맑은 왕자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미뤄 둘 수 있을 만큼.
“폐하, 그런데 그 새는 뭐예요?”
“알링이에요. 내가 키우는 새죠.”
왕자가 신기한지 손등에 있는 알링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알링은 왕자의 시선과는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왕자가 오른쪽을 쳐다보면 알링은 왼쪽으로, 왕자가 왼쪽을 쳐다보면 알링은 또 오른쪽으로. 고갯짓이 참 재빠르기도 했다.
“저를 안 봐요. 제가 싫은가 봐요.”
“아니에요. 이것 봐요.”
나는 섭섭해하는 왕자를 위해 알링을 그의 눈앞에 내밀며 목소리를 바꿔 알링인 척 말했다.
“왕자님, 반가워요. 알링입니다.”
재미없는 연극에도 왕자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서랠 왕국에 가면 형님께 엄청 자랑할 거예요. 황후 폐하께서 새 목소리도 내 주셨다고!”
“내가 알링 흉내를 낸 것을 자랑… 한다고요?”
“네! 많이 많이 자랑할 거예요!”
황후가 대낮에 황제를 끌어안은 것도 모자라 새 흉내까지 냈다는 소문도 추가되겠구나.
나는 슬그머니 팔을 내리고 알링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제자리에서 몇 번을 콩콩 뛴 알링은 가까운 창틀까지 날아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폐하!”
“왜요, 왕자?”
“서랠 왕국에 놀러 오시면 안 돼요? 제 방에 놓인 예쁜 금 조개도 보여 드리고 싶고 제가 읽는 책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아! 검술 훈련하는 모습도요!”
왕자는 신이 나서 두 팔을 휘저으며 제 방에서 왕궁 더 나아가 서랠 왕국의 문화까지 자세히 설명하기 바빴다.
나는 함부로 가겠다는 약속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 줄 수는 있었다.
그리고 왕자의 이야기는 실제로도 꽤 재미있었다.
또래에 비해 조리 있는 언변으로 서랠 왕국을 단숨에 설명해 주는데, 나는 그런 왕자의 이야기에 순식간에 푹 빠져들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내가 꼭 기억해둬야 할 몇 가지 정보도 있었다.
서랠 왕국에서 금 조개가 유독 많이 나온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머릿속이 번뜩였다.
금 조개는 빛깔이 아름다우니 우리 아벨리움에서 그것을 사들여 장신구를 만들거나 그 껍데기를 썰어 만든 조각으로 가구를 장식해 수출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어?”
내가 진지하게 무역의 이익을 가늠하는 사이 왕자는 돌연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살폈다.
“이게 뭐예요?”
“어떤 거요?”
그가 몸을 굽히더니 하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어 내게 건넸다.
그것을 자세히 살피고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왜 여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