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그들은 놀란 눈으로 넘어진 그녀와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나를 번갈아 봤다.
“폐하, 돌아가시는 길이셨지요?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가세요.”
이어진 레이샤의 발언에 그들은 확연한 온도 차를 내비쳤다.
레이샤를 보는 눈빛은 한없이 따스했지만 날 바라보는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몇몇은 눈을 치켜뜨며 웅성댔고 다른 몇몇은 노골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제 손 잡으세요, 공녀님.”
벨리타가 레이샤 앞에 손을 내밀었다.
레이샤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자 아까부터 내밀어져 있던 내 손이 무안해졌다.
“읏!”
레이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었다.
“많이 다치신 거예요? 어쩌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는 레이샤를 부축하던 벨리타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왜 나를 그렇게 보죠?”
“…정말 너무하십니다.”
“?”
“멀리서 제가 보았습니다. 폐하께서 공녀님을 밀치셨잖아요.”
“내가 공녀를 밀쳤다고요?”
나를 둘러싼 모두의 시선이 지금 벨리타의 것과 비슷했다. 멸시를 가득 담은, 저 지겹도록 익숙한 눈빛.
“멀리서 보아 착각을 한 모양인데 그건…….”
“그럼 잘 걸어가던 공녀님께서 돌부리 하나 없는 잔디밭을 걷다 혼자 넘어지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황후 폐하의 바로 앞에서?”
“그만하세요. 전 괜찮아요.”
“공녀님, 변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변명이라고?
“하!”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벨리타. 내내 조용하더니 아주 작정을 했네. 넘어진 레이샤까지 이용해서 나를 이리 궁지로 몰아 가?
나는 헛소리를 조잘대는 벨리타를 무시하고 순진하게 날 올려보는 공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녀. 그대가 직접 말해 봐요. 내가 넘어뜨렸나요?”
레이샤는 울먹거리는 눈으로 호소했다.
“제 잘못입니다. 다 제 탓이니 황후 폐하께 그리들 굴지 마세요!”
그러나 레이샤의 대답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모인 귀족들은 아까보다 더 비난적인 어조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착하셔서 아무 말도 못 하시는 게야.”
“벨리타 영애께서 직접 보셨다잖아. 우리도 아까 그리 듣고 뛰어온 건데. 설마 잘못 보신 거겠어?”
“어떻게 이런 일이, 쯧.”
곁에 있던 시녀들이 나를 해명해 주기 위해 애썼지만 여기서 누가 봐도 내 편인 그녀들이 하는 말은 신빙성을 얻기가 힘들었다.
“후.”
나는 화를 억누르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귀족들을 향해 물었다.
“그대들은 벨리타 영애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장담하죠?”
“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한다 이 말씀이십니까?”
“지금 하고 있잖아요.”
“말도 안 됩니다!”
“내가 공녀를 넘어뜨렸다는 건 말이 되고 그대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 말인가? 왜?”
“제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유? 항상 날 깎아내리려 안달인 게 그대인데. 아,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영애가 내게 그리 구는 이유를 말이야.”
주변이 고요해졌다. 방금까지도 들리지 않았던 새 울음소리가 적막 속에서 선명히 울려 퍼졌다.
레이샤는 부축을 받느라 잡고 있던 벨리타의 손을 놓고 발을 절뚝이며 무리의 한가운데로 와서 섰다.
“다들 진정하세요.”
이미 내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레이샤의 잘못이 아닌 걸 알지만 그녀를 향해서도 차갑게 말이 나갔다.
“공녀, 확실히 말해 봐요. 내가 밀었나요?”
“아닙니다. 모두 제 탓…….”
“아니, 그렇게 애매하게 말고 확실히. 내가 밀었나요?”
“아… 그것은 아닙니다.”
그제야 귀족들은 놀란 눈으로 벨리타를 쳐다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주변 이들과 다르게 나는 냉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벨리타의 두 눈을 마주하고서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삼킬 수 없어 뱉었다.
“자꾸 거슬리게 굴지 마세요. 눈이 나빠 누구 앞인지 분간이 안 되나?”
* * *
“황후 폐하께서 요즘 달라지셨다더니.”
“그러게.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그래 봤자 황제 폐하의 관심이 떠나면 저리 구는 것도 끝 아닌가.”
“어쨌든 이번에는 벨리타 영애가 너무하긴 했어. 잘못 본 걸로 황후 폐하를 그렇게 몰아붙이다니.”
“쉿! 듣겠다.”
레이샤가 벨리타의 부축을 받으며 지나가자 숙덕이던 귀족들이 말을 멈췄다.
“벨리타 영애, 잠시만요. 다른 분들께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힐끗 눈이 마주친 후 저들에게로 다가오는 레이샤를 발견한 귀족들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녀님, 무슨 일로…….”
“소란을 일으켜 죄송해요. 벨리타 영애가 오해를 했나 봐요. 황후 폐하께는 따로 사과를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죄송하다니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런 레이샤의 태연한 태도가 자신들에겐 아무런 불똥도 튀지 않으리란 확언 같아 내심 불안해하고 있던 이들은 안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워낙 황후에 관해 들려오는 소문이 제각각이지 않은가.
황제의 사랑을 받는다던가, 그동안 비상한 머리를 감추고 순진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던가.
예전 소문보다 이런 소문이 힘을 얻고 있는 판에 괜히 황후와 관련된 일에 엮여 좋을 건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레이샤는 다리를 절뚝이는 와중에도 완벽한 예의를 갖췄다.
이를 지켜보던 귀족들은 역시 칸제로스가의 품위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며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사람들의 칭찬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 있을 무렵 다친 발목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던 영식이 말을 걸어왔다.
“발목은 괜찮으십니까? 심하게 다치신 것 같은데.”
“접질린 것 같기는 한데 큰 걱정은 마세요. 금방 나을 거예요.”
“자작가의 주치의가 근처에 있는데 의원을 불러 드릴까요?”
레이샤는 손을 휘저으며 단호히 영식의 호의를 거절했다.
“괜찮아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래도…….”
“벨리타 영애가 부축해 주겠다고 했으니 집에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면 돼요.”
“아프실 텐데 분위기가 더 싸해질까 내색도 못 하시고. 공녀님께서는 너무 착하셔서 탈이십니다.”
“영식께서 알아주시니 그걸로 된 거죠.”
레이샤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 그림자가 아랫눈시울에 희미하게 비쳤다.
그 아래로 지어 보인 너그러운 미소는 마주 보는 영식의 마음을 달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제가 부축해 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의 수줍은 제안을 거절하는 레이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상냥했고 또 아까보다 더 단호했다.
* * *
“벨리타 영애.”
“…….”
“영애!”
공작 저에 들어선 레이샤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벨리타를 불러댔다.
화들짝 놀란 벨리타가 자신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레이샤를 바라봤다.
“네, 공녀님.”
“이제 팔 좀 놔 줄래요?”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벨리타를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빨리.”
재촉함에 조심스럽게 팔을 풀자 레이샤는 방금까지 절뚝이던 두 다리를 멀쩡히 움직여 창가 근처를 향해 걸어갔다.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그녀는 복받치는 웃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끅끅대다 이내 폭소했다.
“정말, 다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신경을 긁어 대는 웃음소리가 고아한 취향에 맞게 꾸며진 방 안에 가득 찼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레이샤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동시에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의 여운이 가셨다.
그녀는 전보다 투명하게 빛나는 연갈색 눈으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벨리타를 비딱하게 바라봤다.
“벨리타 영애, 오늘도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리 조용했어요?”
“네?”
“다과회에서 왜 그렇게 조용했냐고요. 영애답지 않게.”
“공녀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니.”
레이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소 격해진 감정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다과회에서 황후가 오만하게 굴지 못하게 적당히 치고 빠져야 할 거 아니에요, 평소처럼.”
평소처럼. 그 말을 들은 벨리타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왜요? 하기 싫어서? 잘하잖아요, 그런 거.”
“그게 사실 일전에 공녀님과 나눈 쪽지가…….”
벨리타는 작게 중얼거리다 말을 멈췄다. 쪽지가 없어졌다. 그걸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공녀가 사교계에서 자신을 매장시킬지도 몰랐다.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
힘을 실은 손이 파르르 떨리자 벨리타는 그 떨림을 감추려 손등을 꾹 눌렀다.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이샤는 아둔하게 구는 벨리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떨리는 손을 발견하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난 사냥감을 지켜보는 듯 그녀의 눈빛엔 흥미가 가득했다.
“설마 내가 ‘그 일’을 밝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죠?”
“공녀님!”
벨리타의 안색이 혈기 없이 창백해졌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그녀를 보며 레이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잘 행동해요. 영애가 이리 제 역할을 못다 하니 황후가 미안하다 머리도 조아리지 않고 내게 확실한 답을 내놓으라는 둥 그리 버릇없이 구는 게 아닙니까. 내 입이 언제까지 무거울 수 있을지 나도 장담 못 해요.”
“공, 공녀님… 제발……!”
눈앞이 가물거렸다. 붉어진 눈시울에 맺혀 있던 눈물이 벨리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벨리타는 다급히 레이샤의 오른손을 꼭 부여잡았다. 제발, 제발. 바들거리는 입술이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영애가 나를 위해 노력해 준다면 나도 내가 알고 있는 영애의 그 더러운 비밀을 평생 가슴속에 묻어 둘 거예요. 내 말 이해했죠?”
벨리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힐끗 본 레이샤는 벨리타의 손을 밀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입가에는 너그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모든 이들이 아는, 무구하고 깨끗한 바로 그 미소였다.
“영애, 울지 마세요. 왜 울고 그래요. 이러면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그녀는 손을 뻗어 벨리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자신의 눈가를 꾹꾹 누르는 그 차가운 손길에 소름이 끼쳐 벨리타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레이샤는 오른손으로 벨리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더니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악의로 가득 찬 두 눈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뒤이어 벨리타의 귓가엔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섬세하고 여린, 하지만 굉장히 위압적인 속삭임이었다.
“지금 당장 가십지를 쓰는 기자에게 사람을 하나 보내세요.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들려주면 돼요. 간단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