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평소에도 아름다운 레이샤였지만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났다.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꽂힌 반짝이는 짙푸른 머리 장식이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니에요. 늦게라도 와 주어 고마워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분들께도 사과드립니다. 방해가 된 게 아닐는지.”
멍하니 그녀를 지켜보던 귀족들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방해라니요. 레이샤 공녀님께서 늦으신 거면 당연히 이유가 있으셨겠죠.”
“공녀님, 오셨군요.”
“아, 벨리타 영애! 잘 지내셨나요?”
모두가 그녀를 반기고 있었지만 가까운 곳에서는 질투 섞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저게 몇 시간짜리 머리 장식이야.”
“단장하다가 늦은 거 아니야?”
“설마, 공녀님께서 사정이 있으셨겠지.”
레이샤는 등장과 동시에 관심의 중심에 섰다. 순식간에 그녀는 이 다과회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그녀는 자연스레 한 귀족이 빼 놓은 의자에 착석하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던 벨리타가 냉큼 답했다.
“사절께서 가져온 그림에 관해 토론 중이었습니다.”
“저 앞에 있는 그림인가요?”
벨리타가 옆에 붙어 그녀에게 그림에 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레이샤는 흥미롭다는 듯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살인자와 성직자라…….”
“공녀님께서는 어떤 그림이 성직자의 그림 같으신가요?”
“음, 저는 오른쪽이 아닐까 싶은데. 아, 물론 짐작이에요!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계신 분이니 붓 터치가 조금 더 차분하고 섬세하지 않을까 해서요. 왼쪽은 거친 느낌이 있어요.”
레이샤의 의견에 오른쪽이 성직자의 그림이라 주장한 이들이 기세등등하게 굴었다.
고작 그림을 평가하는 것뿐인데 편이 갈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샤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질문이 나를 향한 탓에 귀족들은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은근히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았다.
살인자의 그림과 성직자의 그림을 구별하는 것이다 보니 그림깨나 안다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나는 신중히 답하기 위해 그림을 더욱 오랜 시간 살펴보았다.
이어진 두 점의 그림은 확실히 화풍이 비슷하나 또 다르다.
하지만 물 번짐의 정도나 붓을 사용하는 기술이 똑같았다. 일부로 본떠 그린 모작이라 해도 저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따라 하기는 힘들었다.
아무래도 사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듯한데.
“이게 성직자와 살인자가 그린 그림이 맞나요?”
“네?”
사절은 내 질문에 몹시 당황해했다. 귀족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풍이 비슷한 듯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나 그림에 구사된 기교가 똑같아서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 사람이 그린 그림 같은데 맞나요?”
귀족들 사이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사절의 박수 소리에 그 웃음소리는 곧바로 묻혔다.
“황후 폐하, 안목이 정말 뛰어나십니다! 세상에.”
“한 사람이 그린 게 맞나보군요.”
“네. 지금까지 먼저 알아본 사람이 없었는데 대단하십니다! 사실 두 점 다 성직자의 그림입니다. 단, 한 점은 성직자가 하늘의 소명을 받아 직분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고 또 다른 한 점은 살인죄를 짓고 옥에 갇혀 그린 그림이지요.”
“성직자가 살인을?”
“말도 안 돼!”
“폐하께서 거기까지 내다보신 건가?”
숙덕거리는 귀족들 사이, 레이샤는 입을 닫았다. 그녀의 볼이 유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레이샤로선 조금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주변 귀족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긋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절은 그런 레이샤를 발견하고는 친절히 말했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원래 공녀님 같은 반응이 당연하거든요. 황후 폐하께서 유난히 눈썰미가 좋으신 거지요.”
“그럼 왜 굳이 저희를 속이신 거죠?”
귀족 중 한 명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사절이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그에게 놀아난 기분이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절은 천천히 귀족들의 표정을 훑더니 빙긋 웃었다.
“여러분들은 당연하게 성직자와 살인자의 그림을 나누어 생각하셨을 겁니다. 성직자가 살인자일 줄은 예상치 못하셨겠죠. 성직자는 살인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황후 폐하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의 제 말에 어떤 속뜻이 숨어 있다 생각하십니까?”
사절은 내게 잔뜩 기대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나의 생각을 읊었다.
“감정적 판단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을 경계하라. 이러한 깨달음을 전해 주고 싶은 건가요?”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말씀을 해 주시는지! 맞습니다. 심지어 감정가들마저도 사실을 알기 전까지 두 점의 그림에 쓰인 동일한 기교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찾아내어도 무시를 했죠. 우리는 너무나 일반화된 생각으로 사람을 봅니다. 이 그림을 보는 시선에서도 알 수 있죠. 바로 그러한 고정관념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알려진, 혹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생각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림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니. 정말 매력적이네요.”
“…….”
한참이 지나도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자 사절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혹시 실례가 된 것인가요? 저희 왕국의 문화를 여러분께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서랠에서는 그림 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것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보다 못한 내가 나서려 했을 때였다. 다행히도 레이샤가 먼저 사절을 향해 상냥히 답했다.
“아닙니다. 이리 귀한 뜻을 일깨워주시니 오히려 감사한걸요. 황후 폐하의 안목도 정말 대단하세요. 의외의 모습이셨어요.”
‘의외?’
“양국의 친교가 성공적으로 성사된 것 또한 황후 폐하께서 힘 써주신 덕분입니다. 이번 교류가 서랠에 있어 정말 후회 없는 결정이 될 것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군요.”
왕자가 사절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사절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아, 그랬군요!”
나는 레이샤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천사 같은 얼굴로 사절이 민망하지 않게 말을 이어나가 주고 있었다.
의외라……. 아깐 그저 실수한 거겠지.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뱉었을 리가.
“어, 저기 신전 마법사님들이 지나가시네요!”
한 영애의 외침에 모두가 몸을 틀었다. 하얀 망토를 두른 신전 마법사의 무리들이 저 멀리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선두에는 아델이 서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키가 크기에 난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마법 휘장이 새겨진 망토가 바람을 타고 힘차게 펄럭였다.
열을 맞춘 마법사들은 시원스러운 걸음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 갔다.
“아, 저분들이 아벨리움의 신전 마법사들이십니까? 말로만 들어 왔는데…….”
사절과 왕자는 신기한지 마법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타국의 손님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애들의 시선이 줄곧 한곳을 좇았다.
“저기 맨 앞에 계신 분은 누구예요?”
“누구요?”
“제일 키가 크신 분 말씀하시는 거죠?”
“호호, 영애께서도 보고 계셨나 봐요?
“눈에 안 띄는 게 이상할 정도네요. 신전에 저런 외모를 지닌 마법사님이 계셨나?”
그녀들은 수줍음에 얼굴을 붉히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중심에는 아델이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아델이.
영애들의 관심을 독차지 했다, 돌아가면 아델에게 꼭 그 말을 전해 주리라 다짐하며 나는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내 칭찬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저 흑발! 정말 넋을 놓고……. 어머! 여기 쳐다보신다!”
소란을 눈치챈 아델은 이쪽을 돌아봤다. 다과회가 열리고 있는 것을 알고부터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나는 그런 아델과 눈이 마주쳤다.
착각인가 싶을 때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뭐야! 웃으셨어!”
아델의 작은 행동에도 영애들은 뛸 듯이 좋아했다.
아델,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이야. 처음 볼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그런데 누구한테 인사한 거야?”
“레이샤 공녀님 쪽을 보고 계신 것 같은데?”
“맞네, 맞아! 시선이 딱 그쯤이었어.”
“공녀님! 뭐예요?”
“뭘요?”
레이샤는 쏟아지는 영애들의 질문에 두 눈을 예쁘게 깜빡였다.
다들 레이샤에게 인사를 했다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내게 인사한 것이라고 굳이 해명하는 것도 이상하겠다 싶어 나는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말을 아꼈다.
“방금 지나간 신전 마법사님이 공녀님께 인사하셨잖아요. 아는 사이세요?”
“아…….”
그녀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던 영애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사이세요?”
“글쎄요?”
레이샤는 애매한 답을 내놓더니 찻잔을 들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뭐예요, 공녀님! 모른 척하시기예요? 아무 사이도 아니신 거면 저 소개해 주시면 안 돼요?”
“싫어할 거예요. 그런 거.”
그녀가 딱 잘라 답했다. 눈가를 살짝 찡그리는 것으로 그녀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을 표했다.
‘레이샤가 아델과 친분이 있었던가?’
아델의 입에서 레이샤의 이야기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내게 말을 안 했을 수도 있긴 하다만.
“소개라니, 딱 보면 몰라? 저분이 공녀님을 친구로 보고 계시겠어?”
소개를 해 달라 말을 꺼냈던 영애는 풀이 죽은 표정을 지으며 앞에 있는 케이크를 포크로 수차례 찔렀다.
레이샤는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설마요. 우린 그저 친구일 뿐인걸요.”
* * *
“오늘 다들 고마웠어요. 왕자께서도 기뻐할 겁니다.”
“네, 저 역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과회가 슬슬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물론 몇몇은 따로 남아 이야기를 더 나눌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쯤에서 빠져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와 루이 왕자가 몸을 일으키자 귀족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리고 영광이었습니다, 왕자님.”
왕자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밑으로는 내게 슬쩍 손을 흔들었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그렇게 왕자는 나와 수십 번 인사를 주고받고서야 별궁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나 또한 황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만 자리를 벗어났다.
“황후 폐하.”
그런데 얼마 안 가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레이샤가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을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공녀? 왜 그러죠?”
“그게… 앗!”
“공녀!”
내 코앞에서 그녀가 털썩 넘어졌다. 놀란 나는 다급히 레이샤를 일으키려 몸을 숙였다.
그녀가 입은 새하얀 드레스가 흙으로 더러워졌다. 그나마 잔디 위에서 넘어져서 다행이지 돌이라도 있었으면 크게 다칠 뻔한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레이샤는 내가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네……. 드레스를 밟는 바람에. 폐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창피하게 이런 모습만 보여 드렸네요. 죄송해요.”
“내게 할 말이요? 할 말이 무엇인데요?”
“재판정에서 너무 멋있으셨다고, 얼굴을 뵈면 꼭 그 말을 직접 전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왠지 부끄러워서…….”
“공녀님!”
그때 등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귀족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쪽으로 우르르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