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젖살도 빠지지 않은 귀여운 남자아이였다. 사탕이라도 문 듯 양 볼이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우유 냄새가 날 것 같은 말랑한 볼살 때문인지 그는 귀여운 개구쟁이처럼 보였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 위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잽싸게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멀리까지 사절을 보내 주어 고맙소. 고단했을 텐데 오늘은 편히 쉬시오.”
하드엘의 말이 끝나자 아이는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사절의 대표로 인사말을 전하려는 듯 보였다.
굉장히 긴장했는지 그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아이의 긴장이 풀렸으면 해 일부로 더욱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랠 왕국의 왕자, 루이 폰드 디베날입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양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루이 왕자는 제법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땅을 내려 보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 것만 빼면 왕자로서 완벽한 품위를 갖춘 인사였다.
“혹시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어느새 고개를 든 루이 왕자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왕자님!” 하고 부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고맙습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나는 루이 왕자의 감사 인사를 듣고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뒤로 물러나는 게 순서인데 왕자는 할 말이 남은 건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아! 그리고 황후 폐하께 드릴 것이 있는데…….”
“내게요?”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왕자는 품 안에서 주섬주섬 하얀 봉투를 꺼냈다.
“원래는 형아가, 아니, 형님이 오시기로 하셨는데 이쪽에서 명단 제외를 요청하셔서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형아, 아니, 형님이 황후 폐하를 많이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절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말을 들으니 아까 하드엘과 백작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둘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하!”
루이 왕자가 내게 그 하얀 봉투를 내밀자 기가 막힌다는 듯 누군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이 상황에 웃음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하드엘은 비딱한 시선으로 이 광경을 굉장히 불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희 왕국에서도 리폼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아벨리움의 무도회 날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리폼이란 것을 사용하신 게 정말 인상 깊었어요. 왜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더라고요!”
나는 하드엘의 따가운 눈초리를 무시하며 조그만 손에 쥐어진 봉투를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 편지는 누가 보낸 건가요?”
“형님께서요! 사절로 직접 오고 싶어 하셨는데 그러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꼭 이 편지를 전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왕세자께서요?”
봉투 맨 아래에는 서랠 왕국을 상징하는 순백의 비둘기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서랠의 왕가만이 이 표식을 사용할 수 있고 더군다나 왕자가 직접 전달했으니 이 편지를 왕세자가 보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랠 왕국의 왕세자가 사절로 오지 못한 게 아쉬워 내게 자필 편지까지 보냈다? 그러기엔 나와 너무 접점이 없었다.
가는 눈을 뜨고 편지를 유심히 내려 보는 사이 마주 보고 있던 루이 왕자가 말을 덧붙였다.
“형님께서 얼마 전 재판 기사를 접하시고는 줄곧 황후 폐하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셨거든요. 사실 아벨리움에 무역 사절을 보내자 한 것도 형님이십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단지 내 평판을 바꾸려던 것뿐이었다. 그날의 재판이 이렇게 큰 변화를 몰고 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서랠 왕국이 아벨리움과 첫 무역을 하게 된 게 나 때문이라니.
나는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사절단을 살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랠의 사절들은 눈을 내리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묘하게 가슴이 떨려왔다. 재판의 끝을 알리던 북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퍼지던 그날처럼.
편지를 쥔 손에 절로 힘이 실렸다.
“이번 서랠 왕국의 무역 제안에 있어 황후 그대도 의견을 내어 주었으면 하오.”
“제가요?”
“일전에 회의장에서처럼 말이오.”
사절단과의 인사를 마치고 황후궁으로 돌아가는 길.
황제궁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데 하드엘은 굳이 황후궁으로 향하는 이 길을 고집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말을 전하려 했나 보다.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견을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를 보고 무역 사절을 보냈다는데 내가 더욱 신경을 쓰는 게 맞았다.
이번 무역은 필시 아벨리움과 서랠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가 될 것이다.
바람에 실려 온 싱그러운 풀 향이 한층 짙어져 주변에 은은하게 퍼졌다. 나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알른거리는 길 위를 계속해 걸으며 다짐했다.
그렇게 말없이 걷기를 한참, 어쩐지 아까부터 하드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모른 척 넘어가려 했으나 무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지못해 옆을 보니 그는 내가 아닌 내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폐하?”
“그 편지.”
하드엘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초록빛 풍경이 고스란히 비쳐 있는 회색 눈이 사뭇 진지하게 빛났다.
“아무래도 버리는 게 좋겠어.”
“네? 편지를 버리라니요?”
“말 그대로요.”
엄숙한 얼굴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을 내린 그가 왕자의 편지를 가리켰다.
그냥 편지도 아니고 서랠 왕국의 왕세자가 직접 쓴 편지였다. 왕세자의 편지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버려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건 아니 됩니다.”
“편지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잖소.”
“고작 종이 한 장일 뿐입니다. 위험이란 게 존재할 리가요.”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하드엘은 붉은 기가 도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왕세자가 황후 그대를…….”
“폐하, 조심하세요!”
다듬어진 길 위에 뜬금없이 돌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가 피하면 그만인 작은 돌부리일 뿐이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하드엘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
무방비 상태였던 하드엘은 꽤 가볍게 끌려왔다. 그런데… 너무나 가볍게 끌려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내 품에 안겼을 뿐.
손에 잡힌 그의 팔 근육이 생생히 느껴졌다.
내 품 안에 갇힌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맞닿은 탄탄한 가슴이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
서로가 당황하여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던 그때.
“폐하!”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서랠 왕국의 사절 중 한 명도 이런 우리를 보고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나와 눈을 마주친 사절단의 사신은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별궁에서 드렸어야 했는데 깜빡하는 바람에…….”
그가 멍하니 서 있던 넬슨 백작에게 조심스레 서류를 건넸다.
“흠흠, 아벨리움의 양 폐하께서는 사이가 참 좋으신가 봅니다. 그럼 전 이만.”
“아니, 잠깐!”
사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별궁을 향해 달려갔다.
졸지에 대낮에 황제를 껴안은 적극적인 황후가 되고야 말았다. 아직도 그와 껴안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을 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넘어지게 두는 게 더 나을 뻔했어! 그러게 멀쩡히 가는 사람 팔을 왜 잡아당겨서는!
멀어져 가는 사신의 뒷모습을 난처하게 바라보며 하드엘을 밀어 내려 할 때였다.
그는 여전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편지를 흘끗 보더니 오히려 조심스레 나를 안았다. 마치 깨지기라도 할 듯 정말 조심스레.
뒤이어 하드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감도는 바람처럼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이런 상황에도 당신 손에 있는 편지에 질투가 나니, 나도 참 큰일이야.”
그 속삭임은 너무나 다정해 평소 그가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를 잊게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드엘의 옷깃을 장식하고 있는 은빛 보석 테가 투명한 빛줄기 아래서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 * *
“꺅!”
“정말이야? 그래서?”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허리를 확! 휘감으시더니…….”
제발 그만…….
루안은 동화책이라도 읽어 주듯 하드엘과 나의 이야기를 퍼뜨리기 바빴다.
어제부터 내내.
황후궁 시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듣고 있었다. 매번 저런 반응이라니. 누가 보면 처음 듣는 줄 알 것이다.
가뜩이나 많은 사람이 이 장면을 목격하는 바람에 궁내에도 소문이 쫙 퍼졌다.
사절이 돌아가고 나면 아마 서랠 왕국에도……!
나는 무작정 손에 잡히는 것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향해 부채질했다.
“폐하! 왕세자께서 건네신 편지가!”
“편지?”
나는 부인의 말에 내 손에 집힌 그 무언가를 바라봤다.
거친 부채질에 처참히 구겨져 가는 그것은 하필 왕세자의 편지였다.
‘이런 상황에도 당신 손에 있는 편지에 질투가 나니, 나도 참 큰일이야.’
어제 하드엘의 속삭임이 또다시 상기되었다.
‘잊자. 잊어.’
나는 이미 구겨진 편지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그와 멀어지려 할수록 자꾸만 가까워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황후 폐하.”
시녀들 사이 열띤 분위기가 식기 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아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그를 반갑게 맞았다.
“아, 아델 경 왔어요? 오늘 수업이 있었죠?”
“그렇게 고개를 저으시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설마 다치기야 하겠어요.”
나를 향해 싱긋 웃는 아델에게 시녀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루안 또한 어느새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저 빛나는 눈을 보건대 분명 아델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 주려는 것 같았다.
“아델 경, 그거 아세요?”
“무엇을요?”
신전에만 갇혀 있었어도 본 사람이 많으니 아델은 이미 이 소문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 얼굴이 한 번 더 붉어지는 일만 생길 뿐이었다.
“글쎄 어제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를…….”
“죄송하지만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루안을 말리기도 전에 아델이 먼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정중했지만 또 차가웠다.
나도, 루안도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아델 경,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괜찮으니 내게 말해 봐요.”
내가 아는 아델은 항상 밝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흙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건네는 순간에도, 신전 기사라며 불쑥 찾아온 순간에도 그는 내 앞에선 항상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일이 있다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나도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아델은 내가 알던 아델과는 달랐다.
‘정말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만약 그렇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도움이 안 된다면 의지라도 되어 주고 싶었다.
언제나 내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준 그였으니 나도 아델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게 당연했다.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거든요.”
창가에 스민 빛줄기가 아델의 눈자위를 비추었다. 그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영롱히 반짝였다.
분명 아름다웠는데, 슬퍼 보였다.
심각한 일인가 묻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닫았다. 더 캐물어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제 욕심으로 비롯된 일에 마땅한 대가가 따를 뿐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줘요.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도울게요.”
“네, 웃으며 털어놓을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땐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그가 더욱 환히 웃었다.
“그래도 폐하께서 걱정해 주시니 기분이 나아집니다.”
“그렇게라도 힘이 되었다면 다행이에요.”
언제부터인가 장로처럼, 황후궁 시녀들처럼 아델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 아델은 믿을 수 있는 친구였고, 든든한 기사였다. 그러니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나를 도왔던 것처럼.
내게 힘이 되어 준 것처럼.
아델은 내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그만 수업을 받으러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