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황후, 황후!”
넓은 대저택이 공작의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분을 이기지 못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버지…….”
공작의 명으로 그의 앞에 불려온 레이샤는 두려움에 어깨를 파르르 떨다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그에 공작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핏발이 선 두 눈에 제 딸이 담기자 그의 분노는 한층 더 짙어졌다.
“레이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
“그 하찮은 게 황후의 자리에 오르더니 이제야 그 역할을 하려 들더구나.”
공작은 단 몇 걸음만으로 단번에 딸의 앞에 다가섰다. 레이샤는 꿈쩍도 않고, 그를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아비가 언제까지 그 여자 앞에서 허리를 숙여야 할까?”
“죄송합니다…….”
레이샤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점점 작아지다 못해 끝에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넘치는 주변의 사랑에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인 칸제로스 공작의 앞에서만큼은 아니었다.
“뭐라고? 죄송? 그래. 그렇게나 죄송하다는 너는 지금껏 무엇을 하고 있지?”
“…….”
“뭘 하고 있느냐고!”
-짜악!
레이샤의 고개가 한껏 돌아갔다. 공작이 내려친 오른뺨은 금세 붉어져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귀가 윙윙댔다. 꾹 참고 있던 눈물이 레이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넌 칸제로스가의 망신이다. 고작 그런 여자에게 황후의 자리를 빼앗겨서! 네가!”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천천히 공작을 올려다봤다.
맑고 깨끗한 연갈색 눈에는 증오와 원망 그리고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벼려 놓은 날카로운 촉은 오늘도 공작이 아닌 플로리아 그 여자를 향했다.
황제 폐하의 옆자리, 제국 황후의 자리. 나의 모든 걸 빼앗아간 그 천한 계집.
“그 계집이 웃으며 지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 멍청한 건, 곧…….”
레이샤는 이를 악물어 가며 말했다. 뺨이 욱신거렸지만 금세 사그라질 익숙한 고통이었다.
한편 레이샤의 턱 끝에 맺힌 눈물을 보고서 공작은 높이 올렸던 손을 내리고 노기를 몰아내듯 한동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전보단 침착해진, 그래서 더 냉랭해진 목소리로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너도, 나도 지금껏 황후의 연기에 잘도 속아 놀아났구나.”
“연기라니요?”
“이번 재판을 보거라. 그 여자가 변호인으로 나설 머리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지금까지 발칙하게 연기를 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설명될 수가 없지.”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황제의 눈에 들 때까지 착한 척 가식을 떤 게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거짓임이 분명하다. 오늘 황후가 후작에게 뭐라 말한 줄 아느냐? 입을 잘못 놀리면 그 혀를 뽑아 버리겠다 하더구나. 그리 독한 것인 줄도 모르고.”
“네?”
“지금까지 꿈쩍도 않던 황제는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오늘 있던 일을 하나씩 나열하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려 공작은 이마를 짚었다. 말을 잇지 않는 공작을 먼저 재촉한 건 레이샤였다.
“이게 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지금은 그 여자가 황제 폐하의 눈에 들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줄곧 움츠려 있던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다. 눈빛도, 말투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매서웠다.
공작은 조금은 놀란 눈으로 제 딸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이내 미간을 확 구기며 대꾸했다.
“황제가 황후에게 마음을 두었다. 오늘 보니 티가 나더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불안하게 휘청거린 레이샤는 테이블을 짚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정돈된 머리칼을 쥐어뜯는 하얀 손이 작게 떨렸다.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선 고작 그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실 분이 아닙니다.”
쯧. 혀를 찬 공작은 제정신이 아닌듯한 딸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그딴 것을 염려할 때가 아니다.
그는 지하 감옥을 지키던 기사들이 떠들던 말들을 기억했다.
신전 기사단.
공작이 생각하는 유일한 복병은 바로 그것이었다.
신전 마법사가 황후에게 붙어 있는 이유는 그녀가 에스타란토일 경우, 그 하나뿐이다.
‘황후가 에스타란토일 수도 있다는 소문, 그저 어리석은 제국민들이 떠들고 다니는 허무맹랑한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여겼는데…….’
만약 정말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면 무조건 그 힘을 깨우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그 여자가 황후의 자리가 아닌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더 이상 레이샤가 설 자리는 없으니. 그렇게 된다면 황실에 칸제로스 가문이 설 자리도 없어질 것이다.
하나 진짜 마법사들이 곁에 붙어 있다면 황후를 위협하는 건 쉽지 않을 터. 늦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택해야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공작이 눈을 바로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슨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 중얼대는 레이샤가 아까부터 거슬렸다.
저리도 나약해서야. 그녀를 바라본 공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걱정 마라. 네가 되찾아올 것은 황후의 자리뿐이니. 차라리 잘되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지. 그러니 황후를 잘만 이용하면 황제의 숨통을 조일 빌미가 될 수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폐하께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버지.”
손끝을 덜덜 떨며 레이샤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을 뱉었다.
아까보다 부은 뺨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공작과 마주 선 그녀의 눈에 다시금 물기가 차올라 반짝였다.
“폐하의 사랑과 황후의 자리 원래 모두 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뭔가를 잘못 아신 것이 분명해요. 폐하의 여인은 저인데 폐하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니 너무나 말이 안 되잖아요. 그것도 그런 미천한 계집을.”
“그러니까 레이샤, 네 말은 지금 내가 거짓을 말한다 이 뜻이더냐?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한…….”
이제 아예 두 귀를 막고서 레이샤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공작이 무슨 말을 더하려 하자 그녀는 제발 그만해 달라 애걸하며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공간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하!”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공작은 실소했다.
툭 던져진 짧은 실소는 순식간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로 바뀌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공작은 레이샤의 뺨을 내리친 자신의 오른손을 한참 내려다 보다 조용히 읊조렸다.
“미련한 것.”
* * *
“황후 폐하, 안 피곤하세요?”
“피곤해요. 하지만 내일 즈음이면 서랠 왕국의 사절이 도착할 테니 어쩔 수 없죠.”
루안은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런데 그 하품이 옮기라도 한 건지 나도 따라 하품이 나왔다.
뒤이어 엄청난 졸음이 밀려왔다. 며칠 동안 누적된 피로가 쌓이고 쌓인 탓이었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고 잠을 쫓으려 두 손으로 양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마지막으로 이것만 검토만 하고요. 그러면 이제 정말 끝이에요.”
육로를 통해 온다고 했던 사절이 해로를 통해 오게 되며 모든 일정이 앞당겨졌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도착할 날짜는 일주일 뒤였다.
물론 서랠 왕국 측에서 갑자기 일정을 당긴 것이니 준비에 차질이 생겨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허술하게 준비하여 양해를 구하며 이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 욕심이 나를 며칠 내내 잠들지 못하게 했다.
“요새 잠을 통 못 주무시니 걱정입니다.”
“어쩔 수 없죠. 서랠 왕국의 사절이 가고 나면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될 텐데 이런 상황에서 책잡힐 오점이 하나라도 생기면 내 손해잖아요.”
더군다나 저번 회의장에서의 태도로 내가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럴 때 실수라도 했다간 물어뜯기기에 십상이다.
“휴.”
짧은 한숨을 뱉으며 나는 창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날은 저문 지 오래였고 그만큼 밤은 깊어 갔다.
사람의 기척도, 창 아래 아른거리는 희미한 달빛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은 유난히 깜깜해 보였다.
“오늘은 달빛이 밝지 않네요.”
하드엘의 얼굴이 찰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창에 기대 그와 나누던 대화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해 난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일하자, 일.’
나는 곧바로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
창을 넘어 불어온 봄밤의 따스한 바람이 애써 바삐 종잇장을 넘기는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 * *
서랠 왕국의 사절단이 아벨리움의 땅에 발을 디뎠다는 소식에 황궁 사람들은 오전부터 바삐 움직였다.
국내의 귀족을 상대로 열리는 봄의 무도회 때와는 그 분주함이 비교되지 않았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지금 황궁을 돌아다니면 투덜거리는 몇몇 시녀들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정신없이 수선스러웠다.
시간은 일주일이나 줄었는데 손님맞이에 있어서는 일이 줄지 않았다. 그러니 더 촉박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오후가 되어 황궁은 손님맞이 준비를 완전히 마칠 수 있었고 긴 행렬을 이끌고 온 사절은 운이 좋게도 때를 맞춰 황궁의 입구를 통과했다.
“황후 폐하, 서랠 왕국의 사절이 도착했다 합니다.”
“폐하께서는요?”
“황후궁 앞에서 황후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랠 왕국의 왕족이 온다는데 직접 나가 맞이하는 게 예의였다.
왕족이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절로 먼 나라까지 힘겹게 온 이들을 앉아서 편히 맞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아무리 아벨리움이 강대국이라 해도 말이다.
“그럼 저희도 나가죠.”
시녀들이 마지막으로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렇게 채비를 마친 나는 하드엘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그는 짙푸른 나무 아래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그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곤란한데.”
날 발견하자마자 하드엘은 이와 같은 첫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훑는 그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보자마자 곤란하다니. 도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건지.
그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난 미간을 모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그대의 모습이 매우 곤란하다고.”
“네?”
하드엘은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말해 주지 않고 뒤를 따르던 넬슨을 향해 물었다.
“넬슨, 그때 문서를 쓴 자는 사절 명단에서 제외했다 했지?”
“네.”
“확실해?”
“네, 얼마 전에도 물으시기에 열 번, 스무 번 확인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고개를 바로 했다.
넬슨 백작은 이런 황제의 뒤통수를 보며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백작을 흘긋 보다 다시 하드엘을 응시했다.
표정만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다.
“폐하, 사절 명단에서의 제외라니요? 누가…….”
“이만 서둘러 갑시다.”
그는 태연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흡족해하고 있었다.
말을 돌리는 걸로 보아서 물어도 답해 줄 것 같지 않아 캐묻기를 포기하고 나는 이만 시선을 내렸다.
은은하게 퍼진 투명한 봄 햇살 아래에서 하드엘은 한결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나란히 서서 보조를 맞추는 그의 걸음 소리가 내 구두굽 소리와 섞여 들렸다.
그렇게 머지않아 도착한 곳은 연한 갈색빛이 도는 건물 앞이었다.
일전에 봄의 무도회가 열린 별궁 뒤쪽에는 손님맞이용으로 쓰이는 또 다른 별궁이 하나 있었다.
사절단을 위해 특별히 꾸며 놓은 바로 이 별궁에 나는 하드엘과 나란히 들어섰다.
이미 도착한 사절단이 우리를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양 폐하를 뵈옵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눈으로는 사절에 섞여 있을 서랠의 왕자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왕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왕족이 있다면 분명 사절단 맨 앞에 있을 터. 그 생각에 시선을 한참 내리자 작은 꼬마 한 명이 시야에 걸렸다.
‘설마 이 아이가 왕자?’